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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264화 (264/303)

264화

황제의 침실은 근위대가 물 샐 틈 없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황제를 돌보고 있는 사람은 꿈과 희망의 교단 대신관 세루피스.

제필의 경우처럼 내상이 도진 건지 흑마법사보다 신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음…….”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황제의 모습은 누가 봐도 병색이 완연했다. 일부러 가장하려고 해도 저렇게 실감 나게 꾸미기는 어려워 보였고.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전투는 순조로웠습니다. 하지만 놈에게 결정타를 먹이기 위해 폐하께서 친히 공격하시다 그만…….”

“혹시 놈이 발악이라도?”

“네, 단말마 비명을 토하며 쓰러지는 척하다가 폐하를 공격했습니다.”

“큐브는 그럼?”

“놈에게 물린 상황에서도 폐하께서는 끝까지 검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검을 내리쳐 놈의 처리하셨고, 큐브는 클리어되었습니다.”

“…그래요?”

누워있는 황제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던 로빈은 세루피스 대신관을 제외하고 모두 나가달라고 요청했다. 황제 폐하의 병세에 대하여 비밀리에 확인해 볼 게 있다는 구실이었다.

이미 레드 큐브를 클리어한 경험이 있는 그레이츠였기에 몇 가지 확인해 볼 게 있다는 로빈의 말이 그럭저럭 먹혀들었다. 지금까지 황제를 위해 많은 일을 도맡아온 충신이기도 했고.

그렇게 모두 나가고 대신관만 남은 상황에서 로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폐하. 일어나세요. 이게 또 무슨 일입니까?”

그런데 로빈이 작게 이야기하자 황제가 슬쩍 눈을 뜨고 헛웃음을 터트리는 게 아닌가.

“후작… 어떻게 알았지?”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요. 폐하께서 상대를 압도하는 전투에서 다치실 리가 있겠습니까?”

“…아이리스군.”

“네.”

솔직히 처음에는 정말 다친 줄 알았다. 그래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실제로 소설에서 이번 큐브를 공략하다 다친 전적이 있었기에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머리에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상황을 들어보니 황제가 다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먼저 처음부터 의심스러웠던 건 같이 싸운 아이리스 경이 너무나 멀쩡했다는 거다.

황제의 충신 중의 충신, 소설에서는 황제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아이리스가 황제가 사경을 헤맬 정도로 크게 다칠 동안 저렇게 멀쩡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본인이 죽거나 더 크게 다치는 게 정상적인 흐름이었다.

기껏해야 다섯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아이리스가 멀쩡한 건 별로 다치지 않았거나 아예 다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여기서부터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투 상황을 확인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장 선두에서 앞장서 싸우는 아이리스가 다치지 않을 정도로 압도하는 전투였다.

로빈은 황제의 타이틀을 빌려 쓰면서 황제의 무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간접적으로 느껴봤다. 그런데 그 황제가 방심 따위로 놈에게 치명상을 입는다는 건 정말 믿기 힘든 일이었다.

놈이 쌩쌩한 가운데 방심했다면 그래도 한 대 얻어맞을 수도 있지만, 설명을 들어보니 그것도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방심하고 있었다 해도 다 죽어가는 놈이 쥐어짠 공격 따위는 바로 피하고 피해 없이 반격할 수 있는 게 황제의 수준이었다.

만약 황제가 다치는 상황이 온다면 그건 모든 기사들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몰리는 그런 처절한 전투 정도인데, 아이리스의 말을 들어보니 그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래도 그 와중에 놀라운 게 있다면 같은 R-B 큐브인데 황제의 파티는 압도하다시피 클리어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로빈은 그 차이를 정보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자신과 달리 이전에도 이번 큐브를 공략한 경험이 있었을 테니까.

만약 로빈도 드라쿠나스가 그런 놈인 줄 알았다면 다른 방향으로 준비했을 거고, 그랬다면 좀 더 수월하게 공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황제의 공략조 수준은 로빈의 기대 이상이었다.

“하, 아이리스가 이런 걸 잘 못해서 미리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그걸 눈치채다니. 역시 쉽지 않군.”

쉽지 않긴. 어차피 걸릴 걸 알고 있었으면서. 애초에 완벽하게 속이려 했으면 예전에 그렇게 운을 띄우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그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싶어 모른 척하고 말을 이었다.

“…폐하, 절 속여서 대체 뭘,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같은 편을 속이려는 듯한 황제의 황당한 작전에 기가 막힌 척 짜게 식은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자 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믿지만, 자네의 연기력은 믿을 수 없어서 말이야. 자네는 은근히 얼굴에 다 티가 나서 큰일을 맡기기는 어렵다네. 사실 반반이지.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고. 각자 그에 적합한 플랜이 있으니까.”

“…그럴 거면 이런 일에 절 끌어들이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나도 그러고 싶었지. 그러고 싶었는데……. 자네가 굳이 다이앤과 결혼하려고 그렇게 일을 벌이고, 결국 결혼까지 해내지 않았나. 원래 그 역할은 조단에게 맡길 예정이었단 말일세.”

오호,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다이앤을 이용한 가지치기를 계획하고 계셨다? 몇 번이나 나에게 다이앤과 결혼하지 말라고 넌지시 충고한 건 이런 복잡한 일을 피하게 해주고 싶은 선의였고?

원래 처음에 황제가 약속한 건 변경백에 오르는 대신 북부의 일만 신경 써도 상관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결혼 후 귀족 회의에 불참해도 투덜거릴 뿐 딱히 문제 삼지는 않은 거였고.

귀족 회의에 오라고 자꾸 보채는 건 사실 황제의 스트레스 해소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어쩌다 보니 그 외에 복잡한 일을 몇 가지 맡긴 했지만 그건 내가 자초한 면이 있었고, 아직 황제는 그 큰 약속을 깨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어쨌든 그동안 내가 겪는 귀찮은 일들은 상당 부분 다이앤에게서 시작된 거다. 후작이라는 작위, 귀족 회의, 그리고 이번 일까지.

그래서 황제는 내가 황도의 일과 깊게 연루될 다이앤과 결혼하겠다고 설쳤을 때 넌지시 반대했었나 보다. 앞으로 귀찮은 일이 이어질 텐데 굳이 다이앤과 결혼해야겠냐고 몇 번이나 돌려서 말하기도 했었고.

소설에서는 남부 연합국으로 시집보내서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이 문제는 내가 너무 단정적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2황자는 없애고, 다이앤은 조단과 결혼시켜 귀족들의 가지치기에 이용하는 게 황제의 기본적인 플랜인 거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설령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어도 다이앤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거다. 귀찮은 일이 있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그때도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가지고 싶었던 게 다이앤인데 그걸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그런데, 크라우 백작 자제라고요? 그분은 저보다 더 연기를 못할 텐데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속여 먹기는 좋지 않나. 아마 자네처럼 내가 가짜로 다쳤다는 걸 눈치채진 못했을걸?”

“…그건 그렇네요.”

역시 이 양반은 양아치군. 굳이 측근을 속여서 일을 벌이려고 하다니.

“그래도 자네라서 더 나은 점이 있긴 하군. 자네는 선이 고와서 은근히 만만해 보이니, 상대가 더 마음 놓고 움직이긴 하겠어.”

…만만하게 생겨서 미안하네요.

맞는 말이긴 한데 기분이 또 영 좋지 않았다.

“뭐, 좋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가 다이앤을 가진 대가라고 생각하겠습니다. 하지만 내막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짜고, 이 일을 정확히 누가 알고 있는 겁니까?”

“대충 짐작하고 있을 텐데? 황후와 젝트만 알고 있네. 아, 저 대신관도 알고 있지.”

역시 대신관은 알고 있었군. 하긴 그럴 수밖에 없지.

떫은 감을 먹은 듯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고 있는 대신관을 보니 로빈은 자기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솟아올랐다. 언데드 난리 때 어떻게 황제와 엮여 신탁으로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더니, 그걸 빌미로 지금까지 쪽쪽 빨리는 게 분명했으니까.

덕분에 꿈과 희망의 교단 역시 교세를 제법 확장할 수 있었지만, 저 대신관 개인을 보면 참 딱한 인생이었다. 저 흉악한 황제에게 덜미를 잡혀 이런 일에도 손 보태고 있지 않은가.

“그래요? 그런데 다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창백하세요?”

“아아, 그거? 후후. 그건 자네의 공이 컸네. 자네 영지에서 발견된 그 페널티 포션의 효과니까.”

좋은 효과를 부여하는 대신 그 대가로 일정한 페널티를 얻는 페널티 포션.

당연히 그 조합식 역시 황실에 보고한 지 오래다.

황실은 당분간 큐브에서 나온 모든 조합식을 전국적으로 공유할 계획이었고, 지금도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로열티도 지금은 챙길 수 없는 상황이었고.

로빈이 이번 공략 때 지참한 해독제나 회복약 역시 황도에서 공개한 조합식으로 영지에서 제작한 거였다.

이 정책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는 불확실하지만, 큐브 공략이 안정적으로 진행되는 데 크게 공헌한 건 사실이었다. 이것 역시 황제가 권력이 강력하지 않으면 이어질 수 없는 정책이었다.

어쨌든 황제는 그 포션을 개량해서 일종의 가사 상태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실제로 같이 공략에 나선 기사들을 모두 속였으니 효과 역시 대단했고.

“…그렇군요. 그런데 폐하께서 굳이 이런 일을 만드신 걸 보면 뭔가 낌새가 있었던 건가요?”

“후, 그래. 사실 이걸 할까, 말까 고민하기도 했네. 그런데 놈들의 꼬리가 황도에서 자취를 감추었어. 그냥 귀족들 문제면 굳이 이 난리를 피우지 않을 텐데, 놈들이 연루된 일이니 조금 무리할 수밖에 없었네.”

“놈들이요?”

지금까지 꼬리를 말고 있던 놈들이 움직였다는 소식에 로빈도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큐브보다 정체와 목적을 알 수 없는 놈들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 놈들의 꼬리를 잡기 위해서라면 황제의 이 엉뚱한 연극에 흔쾌히 동참할 의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역시 민심이나 영지였다. 황제가 앓아누웠다고 소문나면 기껏 잡아놓은 민심이 흔들릴 거고, 영지 역시 마수 범람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라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민심이 문제군요. 레드 큐브가 모두 클리어되기도 전에 폐하께서 쓰러졌단 걸 알게 되면…….”

“그래서 후작이 있지 않나. 나 말고 레드 큐브를 클리어한 후작 말일세. 후작이 레드 큐브를 클리어하겠다고 나서면 지금 내 자리를 대신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도 확보되겠지.”

그걸 그렇게 계산하고 있었군. 하여간 여우 같은 양반이라니까.

“그리고 정당성으로 공격하지 못하니 다른 경로를 찾을 수밖에 없어. 난 그 틈을 노리는 거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귀족이 연루된 일이군요.”

“그래. 몇몇 귀족이 의심스러워. 그래서 내가 물밑으로 들어가 놈들의 동태를 확인해 볼 생각이야.”

“하지만…….”

“음, 자네가 걱정하고 있는 건 아마 영지겠지? 마수 범람의 시기가 다가오는데 병력까지 빼왔으니 마음이 편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안심하게. 마수 범람은 내년일 가능성이 크니. 아마 그럴 거야.”

…그러니까 1회 차에서 마수 범람이 내년이었다?

이 양반, 이거 진짜. 내가 마수 범람에 신경 쓰고 있는 걸 알면서도 미리 말하지 않았단 거잖아? 이건 또 은근히 약 오르네.

나쁜 상황이 아닌데 약 오르다니. 역시 이 황제는 정말…….

“으득, 그렇군요. 개인적으로 신탁까지 받으시는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믿겠습니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 대체 뭐죠?”

“별일 아니네. 우선 그냥 황제처럼 황제가 할 일을 해주면 돼. 귀족들이야 당연히 물어뜯을 텐데, 그것만 상대해 주게. 당당하고 뻔뻔하게. 그런 건 또 은근히 잘하지 않나?”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십니까?”

물론 뻔뻔하게 행동하라면 당연히 철판도 깔 수 있지만, 지금까지 퓨어하게 살았건만.

“좋습니다, 폐하. 상황이 그러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만 이번 일은 대가를 톡톡히 받아갈 생각입니다.”

“하하, 좋네. 뭐든 말만 하게나. 내, 다 내어줄 테니.”

딱 기억했다.

나중에 다른 말 하지나 마시라고요. 이번엔 정말 제대로 한밑천 챙겨갈 테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로빈은 대가를 단단히 챙겨갈 생각이었다. 그 자신이 피곤한 만큼 딱 그만큼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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