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 * *
황제의 병세를 확인하려는 귀족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대전.
귀족들이 앞으로의 국정 운영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고 있는 가운데, 대전 중앙으로 로빈과 다이앤, 그리고 황후와 젝트를 위시한 황제의 측근들이 걸어 들어왔다.
“…1황녀?”
귀족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선사한 건 황제의 복식을 차려입고 입장한 다이앤이었다. 평소에는 수수한 의상이나 로빈이 좋아하는 야릇한 의상을 선호하는 다이앤이었지만, 작정하고 화려하게 꾸미니 여신급 미친 미모와 엄청난 시너지를 보이며 그 위압감이 제법 대단했다.
아마 다이앤을 천덕꾸러기 황녀로만 기억하던 귀족들에게는 저 모습이 자못 놀라웠을 것이다.
그리고 귀족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젝트가 나서서 황제의 뜻을 알렸다.
“폐하께서는 자신이 부득이하게 국정을 운영할 수 없을 때, 1황녀이신 다이앤 그레이츠 저하, 그리고 그 부군이신 로빈 그레이츠 명예 후작에게 그 소임을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귀족가로 시집간 황녀가 황실을 맡는다니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귀족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사실 로빈도 곰곰이 계산하기 전에는 황제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으니 말이다.
아마 저들도 굳건하게 큐브를 썰어대던 황제가 이른 나이에 이렇게 쓰러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고, 다음 보위에 대하여 고민해 본 귀족 역시 거의 없을 것이다. 황제의 카리스마가 워낙 강해 감히 황위에 대해서는 딴생각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 황위가 다이앤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던 귀족 역시 얼마 없었다. 방계 혈족도 아니고 시집간 황녀라니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일이긴 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2황자님을 다시 궁으로 모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시집간 황녀라니, 이 무슨…….”
로젠트 자작인가?
젝트가 넘겨준 황도 귀족 요람에 의하면 로젠트 자작은 군부 쪽 중견 관료로 남성 우월주의의 선두주자였다. 게다가 생각이 짧고, 즉흥적이며, 단순하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니 저건 무슨 정치적인 의도가 들어간 발언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일 것이다.
아마 평소에 라이언을 존경하던 마음과 잠시라도 여성이 황위에 앉는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껴 저렇게 반발하는 게 아닐까?
로빈은 이쯤에서 저 말에 따로 반박해서 분위기를 바꿔야 하나 싶었는데 크레톤 공작이 한발 먼저 나섰다.
“탈적한 작센 백작은 황위 계승권이 없다네. 섭정할 권리 역시 없고.”
“하, 그러면 차라리 상황 전하를 다시 모셨어야죠.”
귀족들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이던 크레톤 공작은 궁중 서기관을 불러 전례부터 따졌다. 천 년을 이어온 제국이다 보니 그간 별의별 일이 다 있었을 테고, 이와 비슷한 사례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선위한 상황 전하께서 다시 회궁한 전례는 없지만, 황제께서 후계 없이 졸하시거나 정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환후가 깊은 경우, 다른 황족이 없을 때 한해서 황녀가 황위를 잇거나 황녀를 대신해 부마가 다음 황손이 황위를 이어받을 때까지 섭정한 사례가 있습니다.”
“황후 마마는?”
“황후 마마께서 섭정에 나서시는 건 황손을 대리하는 경우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황후 마마께서는…….”
“역시 그런가?”
“네. 또 황실 계율에 보면, 선위한 상황이 다시 황위를 돌려받기 위해서는 모든 황족이 졸하거나 황위를 포기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이앤 황녀님이 황위 계승권을 완전히 포기하기 전에는 상황 전하께서 돌아오실 수 없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일단 법도는 그렇게 됩니다.”
“이럴 수가, 결국 황족이 아무도 남지 않은 상황이라 이런 일이…….”
그렇게 귀족들이 말을 잇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이앤이 나섰다.
“저 다이앤 그레이츠는 황제 폐하께서 쾌차하실 때까지 황위를 지킬 것이며, 제 남편 로빈 그레이츠를 섭정으로 두고 정국을 운영해 나갈 겁니다.”
“황후, 레니아 트와이드는 다이앤 1황녀를 지지합니다. 부디 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황위를 굳건히 지켜주시길.”
“감사합니다, 황후 마마. 폐하께서 빠르게 쾌차하시길 마음속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이 일을 가장 반발해야 할 황후가 먼저 고개 숙여 황위를 부탁하는 모습에 귀족들은 할 말을 잃었다. 전례도 있는데다 황위 계승권도 그랬기 때문에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그 광경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 둘 사이에 어떤 밀약이 있었음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거래의 내용까지 알 순 없지만 대세는 저렇게 굳어진 것이다.
귀족들은 저 둘 사이에 대체 어떤 약속이 오고 갔을지를 상상하며 앞날의 일을 점치기 바빴다. 어떤 귀족은 오히려 이 기회에 어수룩한 그레이츠 내외를 구슬려 이익을 얻으려는 계산에 혈안이었고.
그렇게 오만 가지 계산이 판치는 가운데, 황제가 멀쩡하리라 생각하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휴~ 첫 관문은 그럭저럭 잘 넘어갔네요.”
“오늘은 저들도 당황해서 그런지 가볍게 넘어갔습니다. 아마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정무를 보게 되면 꽤 피곤하실 겁니다.”
귀족들에게 황제의 병세를 알리고 그를 대신해 로빈이 섭정하겠음을 선포하며 마무리된 첫 대전 회의.
회의를 마무리 지은 로빈은 황제의 개인 집무실로 돌아와 젝트와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그런데 어느 한 놈도 폐하의 병세가 어떤지 자세히 알아보려 하지 않네요. 이건 너무 콩가루 아닌가요?”
“저희 쪽 귀족들에게는 자중하길 부탁드렸습니다. 물론 그 수가 그리 많진 않지만요.”
“음, 확실히 골수 황제파 귀족들은 중앙보다 지방을 지키는 데 주력하고 있었죠? 폐하께서 중앙 귀족들은 별로 포섭하지 않으셨고요.”
“어느 정도 의견 대립과 조율, 그리고 갈등이 없다면 살아있는 정치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잖습니까? 죽은 정치는 부패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니……. 그나마 지방을 꽉 잡고 있는 것도 큐브가 아니면 그러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그래도 리아넨은 잡았죠?”
“네, 후작님이 조언하신 이후 따로 리아넨 공작과는 몇 번의 회동을 거쳤습니다. 덕분에 지금 리아넨 공작은 다시 중립파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죠.”
“그래요? 그럼 지금 귀족파는 누가 중심인가요?”
“히키시 백작이라고, 예전에 군수 쪽 관료로 계시던 분입니다. 그분인데…….”
“왜요?”
“아마 후작님께 유감이 많을 겁니다. 지금 저희가 가장 주시하고 있는 곳도 그곳이고요.”
“저에게 유감이 많다라……. 무슨 이유가 있나요?”
“그러니까…….”
젝트의 설명을 들으니 얼핏 기억이 났다.
예전에 자신의 결혼식 날 있었던 폭탄 소동.
황도와 그레이츠 영지에서 테러가 있었고, 그때 물자를 소홀히 관리했다는 이유로 실각한 귀족이 바로 히키시 백작이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군수 쪽이 아닌 외교 쪽 관리로 다시 임관되었단다.
“…그런 귀족을 굳이 다시 임관시킨 건…….”
“한 번의 실수로 중앙에서 내보내기에는 히키시 백작가의 명망이 낮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기도 했고, 그 대가라고 하긴 뭐 하지만 파괴된 황도를 복구하는 데 들어가는 자금을 모두 히키시 백작가가 감당했습니다. 공장은 멀쩡했지만, 폭발의 여파로 주변은 상당히 큰 피해가 있었으니까요.”
역시 이쪽 세계의 귀족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구성하고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이건 하루 이틀 사이에 형성된 것도,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도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룩센 대제가 교육에도 열을 올려 평민 출신 관료들이 늘어난 건 분명 바람직한 변화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사실 뭔가 의뭉스러운 가문이라 군수 쪽 일을 맡길 수 없어 외교부로 보낸 거지만 사실상 좌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당시 외교부는 전혀 하는 일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남부 연합국과의 관계도 소원해져 왕래가 거의 없었고. 해상 왕국이야, 뭐…….”
“관직을 버리고 나가라고 한직에 발령한 건데 꿋꿋하게 버티더니, 결국 남부 연합국과의 경색된 분위기가 호전되며 외교부가 탄력을 받았죠. 사실 그 인사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진작에 사퇴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음…….”
그러니까, 나가라고 일부러 한직으로 돌리면서 자존심을 건드렸는데 그 와중에도 끝까지 버텼다는 이야기다.
자존심 강한 인사가 그 자존심을 꺾은 거고.
“그런데 왜 저를 싫어해요? 오히려 제가 저쪽을 싫어해야 정상 아닌가요? 지가 잘못해서 내가 피해를 봤는데.”
“사람 일이 원래 그렇잖습니까? 딱히 논리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죠.”
“그러니까, 지가 잘못해서 실각한 주제에 날 원망한다? 그렇다고 황제를 원망하기는 상대가 너무 세고 난 좀 만만하다 이건가 보네요.”
“…굳이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어떤 인간인지 알 만하네요. 그런데 그런 인간에게 귀족들이 몰려간다고요? 리아넨 공작이 중도로 빠졌다고 해도 좀…….”
“그건 황제 폐하께서도 조사하고 계신 건데, 가문에 돈이 많습니다.”
히키시 백작가는 대대로 관료 가문, 그러니까 영지가 없는 귀족이었고 관직에 임관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가문이라 상단조차 꾸리지 않아 그리 부유한 가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대 히키시 백작은 관료로 일하면서 상단에까지 손을 뻗어 제법 부를 쌓은 상황이었다.
공직자의 겸업이 제한되는 저쪽 세계였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거기에 비리가 드러난다면 문제는 또 달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클리너 길드에 가장 먼저 신청한 것도 하키시 백작입니다. 그쪽에 히키시 백작가의 병력이 제법 많이 들어가 있고요. 최근에 얻은 정보인데, 히키시 백작가의 사병이 제법 많아 상황이 안 좋은 지방 영주들에게 요청해 큐브를 클리어하고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는군요.”
결국 히키시 백작이 큐브 시스템에서 앞서가는 선두주자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자기의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폭탄이 털린 주제에 그렇게 앞서가는 안목이 있다는 게 쉽게 믿기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네요.”
“괜찮은 참모가 있는 모양인데, 사실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 쪽도 그곳을 중점적으로 파봤는데, 딱히 나오는 게 없었습니다. 참모가 남작가의 차남인데다, 신원이 너무 확실했거든요.”
“음……. 놈들이 귀족을 포섭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히키시 백작의 참모는 로랑 매튜. 매튜 남작가의 차남인데, 히키시 백작을 섬긴 지가 20년도 넘습니다. 사실 매튜 남작가 자체가 히키시 백작을 섬기는 가문이라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고요.”
“…확실히 그렇네요. 20년이라. 뭔가 좀 켕기는 기분이긴 한데… 우선 히키시 백작이 어떤지 겪어봐야겠네요.”
“네, 아무래도 직접 확인하는 게 가장 좋죠.”
“그러게요. 우리 폐하께서는 지금…….”
“밖으로 나가서 직접 알아보고 계십니다.”
“하, 결국 나가셨나요? 역시 대단한 분이시네요. 아무도 모르게 황궁을 빠져나가시다니. 지금쯤이면 물 만난 고기 같으시려나? 오랜만에 자유롭게 나가셨으니…….”
“아무래도 그렇겠죠. 또 은근히 그런 걸 즐기시는 분이시라…….”
“그분이야 알아서 하실 테니, 우린 우리 일이나 하면 되죠, 뭐. 그래서 내일 올라올 안건은 뭔가요?”
“네, 후작님. 그러니까…….”
젝트에게 상정될 몇 가지 안건에 대하여 조언을 들은 로빈은 자리를 파하고 다이앤이 기다리는 침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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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꽤 피곤하겠다고 느끼며 침소에 든 로빈.
“로빈, 피곤하죠?”
“오늘이야 그냥 인사만 한 거고. 이제 내일부터가 진짜지. 다이앤도 내일부터는 피곤할 거야.”
“저야, 그냥 황좌에 앉아만 있는 거잖아요? 일은 로빈이 다 하는 거고요.”
“그게 앉아만 있어도 피곤할걸? 어쨌든 그리 길지 않을 테니 조금만 버텨보자고.”
“그래야죠. 그래도 황족으로서 한 번이라도 황실과 제국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건 조금 뿌듯해요. 저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을 거로 생각했거든요.”
“그래? 음…….”
다이앤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천덕꾸러기로 살다 황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시집을 잘 가는 거뿐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잠깐만, 시집이라…….
“아닌데. 생각해 보니까 다이앤은 이미 황실에 큰 공을 세운 거나 마찬가지야.”
“예?”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