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그렇잖아. 다이앤은 나랑 결혼하면서 날 황실의 영원한 우군으로 만들었지. 지금 내가 이렇게 황실을 위해 일하는 것도 다 다이앤 덕이라고. 그러니까 폐하든 황실이든, 다이앤에게 고마워해야지.”
“호호, 그런 거예요?”
“그럼~ 내 개인은 별로 대단한 인물이 못 되지만, 그레이츠 영지의 영주 로빈은 좀 다르다고. 만만하지 않은 인물이거든. 8만 그레이츠 영지민과 수백의 전사들이 다 다이앤을 응원하고 있단 말이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분은 좋네요. 그러니까 오늘은 제가 독점으로 로빈도 기분 좋게 해 드릴게요~ 황궁이라고 생각하니 또 뭔가 자극적인 거 있죠?”
“그…건 그렇네. 황궁이라니……. 여기가 진정한 처가인 거잖아? 처가에서 뜨거운 하룻밤이라. 그런데 린은?”
“린은 전사들과 함께 궁을 지키고 있어요. 로빈과 절 근위대에게만 맡겨놓을 순 없다나 봐요. 예전에 아버지, 어머니가 궁에서 중독되셨잖아요. 기합이 아주 단단히 들어간 거 있죠?”
“음, 지금의 황궁은 예전의 황궁과는 완전히 다를 텐데. 쓸데없이 힘 빼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근위대를 지배하는 건 황제지만, 궁을 관리하는 건 황후의 임무였다.
예전 폐황후는 자신의 실속을 차리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었고 그 자신이 황제에게 독을 썼지만, 지금 황후인 레니아 트와이드는 폐황후와는 근본부터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 황후가 지배하고 있는 이 황궁에 불순분자가 들어서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적어도 우리 내외가 황궁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따로 병력을 챙긴 건 정말 황제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혹은 황제가 사망했을 때를 대비한 거지, 지금처럼 황제가 건재하단 걸 알았으면 굳이 병력을 이렇게 많이 챙겨오지도 않았을 거다.
황제가 건재한 상황이라면 황후는 우리에게 가장 우호적인 아군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예전에 다이앤이 지내던 그 방으로 갈까?”
“오~ 거기가 불끈불끈 존이에요?”
“후후. 물론 지금은 모든 게 바뀌었겠지만…….”
“아니에요. 제 방은 그대로라고 하더라고요. 물건들도 다 그대로. 황후 마마께서 혹시 모를 방문을 대비해 그렇게 하셨다네요.”
“그럴 수가, 그런 감사한 일이!”
오늘 하루만은 왠지 황후에 대한 충성심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 * *
그리고 그 시각.
히키시 백작 역시 자신의 참모 로랑과 갑작스러운 이 사태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었다.
“그 황제가 갑자기 쓰러지다니, 이래서 사람 일은 모른다는 거야.”
“하지만 황제 측에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지. 지금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으니, 금방 결과가 나올 거야. 하지만 지금 황제가 대전에 없다는 것만은 사실이지. 이 기회에 북부의 애송이를 잘 꼬드기면 몇 가지 사안 정도는 넘길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황제가 미리 정해놓은 인선인데, 그게 그렇게 쉽겠습니까?”
“그 말을 믿고 있었나? 황제가 쓰러진 게 사실이라면, 지금 애송이 놈이 황실에 들어온 건 황제 쪽 패거리의 농간일 가능성이 크지. 그 나이 대의 황제가 자신이 쓰러졌을 때를 대비하고 있었다는 건 정말 우습지도 않은 일이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패기 만만한 황제가 말이야.”
“그렇군요.”
히키시 백작은 만약 황제의 부상이 사실이라면 다이앤 1황녀의 입궁 자체가 젝트나 황후의 미봉책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부상 혹은 사망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정책적인 이득만 얻을 생각이었다.
“각하의 말씀대로 황제가 자리를 비운 것만은 확실하니, 지금은 정책적인 우위를 점하는 게 낫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사안들은 큰 이권이 걸려있습니다. 반드시 되찾아와야 합니다.”
“걱정하지 말게. 내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니.”
“그리고 정 안 되면 황제가 없다는 사실을 핑계로 레드 큐브를 토벌할 권리라도 받아오셔야 합니다.”
“그래, 황제도 한 일을 내가 못 할 리가 없지. 블루 큐브도 황제가 독점하는 바람에 속이 탔는데, 황제가 없는 이상 별다른 수도 없을 테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앞으로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고 접견을 마무리 지은 로랑은 득의에 찬 히키시 백작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저택을 빠져나왔다. 이 일이 자신에게 다시없을 기회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 * *
다음 날.
대전 귀족 회의장에 들어선 로빈은 어제 젝트에게 전달받은 귀족들의 요구 사항을 다시 떠올리며 한숨만 지었다.
정말 귀찮기 그지없는 업무.
그야말로 귀족들의 투정을 받아주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외에도 귀찮은 일투성이였다. 어제 처리해야 하는 문제들을 젝트에게 전달받았을 때는 정말 황제가 이걸 처리하기 귀찮아 도망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자신의 뒤에 다이앤이 앉아있는 한 때려치우고 영지로 복귀할 순 없으니 적당히 황제에게 다시 미루고 정말 필요한 사안부터 처리하자고 우길 계획이었다. 귀족들이 격렬하게 거부해 통과되지 못해도 그건 그거대로 상관없었으니 자신에게 손해날 일은 아니었다.
“대전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발의자 히키시 백작은 의견 제출해 주십시오.”
로빈을 보좌하는 젝트의 선언과 함께 피곤하기 그지없는 대전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선 히키시 백작이 제 주장을 피력하기 시작했는데.
“그레이츠 후작, 자네도 한 영지를 다스리는 입장이니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제한인지 잘 알 거라 믿네. 큐브 전리품을 황도에서 다 수거해 간다니, 게다가 기간도 무려 5년이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오늘 올라온 안건 중 하나는 바로 예전에 황제가 결정한 큐브 전리품 전량 매입 문제.
큐브 전리품의 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상황이라 귀족들에게는 상당히 껄끄러운 문제였다.
예전에 통과한 안건이지만 계속 이렇게 항의와 함께 논의가 반복되고 있다는데, 황제 역시 이 문제로 제법 피곤해했다고 한다. 당분간은 통과시키기 어려운 안건인데, 귀족들이 포기를 모르고 계속 밀어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젝트의 말에 의하면, 그냥 싹 다 밀어버려야 속이 시원할 거 같다고 했다는데 그게 안 되니 황제도 좀 짜증 나긴 했을 것이다.
“호칭부터 정정하겠습니다, 히키시 백작. 전 한 사람의 영주가 아니라 제국의 주인, 황제 폐하를 대신해 이곳에 서 있는 섭정공입니다. 언행에 주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섭정공.”
이건 무슨 기선 제압이나 그런 게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조치였다. 황실을 대표해 서있으니 내 개인적 성향과 상관없이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의무가 있었으니까.
물론 저 인간이 일부러 반말로 시작한 건 딴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지만 말이다. 아니면 나를 그저 아무 생각도 없는 망둥이로 생각하든지.
예전에도 느낀 건데 이쪽 세계의 귀족 간 호칭 문제는 언제나 오묘한 면이 있었다. 그러니까, 사석이라면 중년을 넘어선 저 히키시 백작이 후작인 나에게 저 정도 반 하대를 넣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저 듣는 당사자인 내 기분만 좀 상할 뿐이랄까? 이런 걸 굳이 트집 잡고 들어가면 또 옹졸한 놈이라는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예의를 아는 자라면 아무런 친분도 없는데 그런 식으로 말부터 트진 않는다. 존칭으로 시작해 관계가 무르익으면 말을 편하게 하는 게 정상이었으니 말이다.
원래 히키시란 인간이 그렇게 생겨 먹은 건지, 아니면 진짜 기선 제압을 위해 그렇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단히 무례한 태도였다. 어쩌면 내가 발끈해 냉정을 잃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사안은 잘 알았습니다. 물론 저도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안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섭정공.”
“…만, 지금 이 사안을 제가 결정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양반이, 사람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왜 이래? 애당초 이건 내가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사안이라니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섭정공?”
“말 그대로입니다. 이 사안은 이미 귀족 회의를 통해 황제 폐하께서 결정을 내리신 사안, 그리고 그 후에 두 번이나 이의가 들어왔지만, 변경 없이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 사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황제 폐하의 자리를 잠시 지킬 뿐인 제가 변경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안은 훗날 황제 폐하께서 회복하시면 그때 다시 논의하도록 하시죠.”
“하…….”
로빈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히키시 백작. 그리고 눈을 부릅뜨며 겨우 말을 이었다.
“그럼 제국 라이선스 발급을 황실에서 독점하고 있는 문제나 새로 발견된 마법 도안의 개런티 문제도…….”
“그것들도 당연히 황제 폐하와 논의하셔야죠. 전 황제 폐하께서 이미 결정하신 사안에 대해서는 변경할 권한도, 생각도 없으니까요.”
“이런…….”
잠시 정적이 이는 사이, 귀족파 귀족 하나가 로빈에게 따져 물었다.
“그럼 황제 폐하께서는 언제 깨어나십니까? 아니, 확실히 깨어나시기는 하는 겁니까?”
“무슨 그런 불경한 말씀을. 당연히 머지않아 쾌차하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대체 섭정공은 왜 거기 계시는 겁니까? 사안을 하나도 돌보지 않겠다면 이 귀족 회의는 또 무슨 의미가 있고요?”
한 귀족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인 로빈은 웃으며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말씀 잘하셨네요. 황제 폐하께서 이미 결정하신 사안 외에도 처리해야 할 민정 사안이 한둘이 아닙니다. 황도 치안 안정화를 위한 귀족세 인상 문제, 그리고 평민 관료 육성을 위한 지원 확대 문제까지. 제가 처리해야 할 사안들은 이거죠.”
“그걸……. 처리하자고요?”
“네, 이게 더 급한 사안 같은데요.”
로빈이 지적한 사안은 황제가 밀어붙이다가 귀족들의 반대로 통과하지 못한 사안들. 그러니까 귀족들에게 지극히 불리한 사안뿐이었다.
사실 저것들까지 강제하려면 강제할 수 있는 황제였지만, 귀족들의 말을 들어주는 척이라도 하기 위해 억지로 통과시키지 않은 일종의 선심성 사안이기도 했다.
하지만 귀족들도 황제가 금방 쾌차할 거라는 로빈의 말에 움찔해 이를 갈면서도 그가 제안한 사안들에 대하여 논의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의 선택은 당연히 반대였지만 말이다.
로빈은 황도 귀족들이 그렇게 궁핍하면 황도 치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방 영지에서 자금을 모아 지원할 수 있다는 둥, 평민 관료가 늘어나는 게 귀족의 입지를 좁히는 거면 평민보다 능력이 부족하단 걸 인정하는 거냐고 빈정대며 그들의 화를 돋우었다.
만약 저쪽 세상이었다면 지방에서 자금을 모아 황도를 지원한다는 말에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지만, 이곳에선 그렇게 일이 진행되면 황도 귀족들이 치욕을 느끼는 세상이라 로빈도 멋대로 지를 수 있었다.
적어도 자신의 제안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황도 귀족을 거지에 무능한 인사로 취급하는 로빈의 언사에 냉정을 잃은 귀족들이지만 그래도 자신들에게 손해가 되는 법안을 통과시킬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았다.
그리고 결국 회의는 그렇게 아무런 사안도 결정짓지 못한 채 흐지부지 마무리되고 말았는데.
“뭐, 이 정도면 선방했네. 내가 뭘 결정할 생각도 아니었으니까.”
오늘 회의는 애당초 로빈이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뭔가 목적이 있는 귀족파와 아무런 목적 없이 시간만 끌겠다는 로빈이 싸웠으니 결과가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로빈은 좀 피곤하긴 하지만 하루를 잘 넘겼다는 생각에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고성이 오가는 귀족 회의 난장판에, 물론 로빈이 먼저 빈정대며 일부러 자초한 거지만 질린 다이앤이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안겨오는 걸 즐기며 그렇게 말이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이어진 귀족 회의 역시 첫날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으려는 로빈과 뭐라도 통과시키려는 귀족들의 대치.
하지만 결국 로빈의 물타기에 흐지부지 마무리되고 서로 헛심만 빼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것도 하면 는다고, 블랙 컨슈머의 독설도 한 귀로 듣고 바로 흘려버리는 것에 익숙한 로빈에게 귀족들의 비아냥이나 빈정거림 정도는 아무런 타격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로빈의 격 낮은 빈정거림에 귀족들이 흥분하고 있을 뿐.
그리고 그들의 흥분은 회의가 아무런 성과 없이 마무리되는 데 크게 공헌하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