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 * *
“에휴, 이러다가 나중에 칼이라도 맞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 우리 황제 폐하께서 자극해 달라고 하셔서 그렇게 하고는 있는데 말이야.”
“주인, 걱정하지 마. 칼침 놓으러 오는 놈은 내가 다 썰어버릴게.”
“그래, 널 믿어야지. 누굴 믿겠냐?”
그리고 그날 저녁, 오랜만에 침실을 찾은 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귀여워해주려는데 느닷없이 문이 열리며 황제가 찾아왔다.
이건 또 무슨 매너인가 싶어 뭐라고 하려는데 황제가 먼저 선수를 치는 게 아닌가.
“오~ 후작, 생각보다 대단하군. 다이앤이 그렇게 자랑을 한다더니…….”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하실 말씀입니까?”
“그럼 언제 하겠나, 지금 처음 봤는데. 실하군, 실해.”
저 양아치 같은 양반이 며칠 밖에서 쉬더니 아주 얼굴이 폈다. 나 역시 지난 며칠간 귀족들을 상대하며 답답함이 머리끝까지 올라왔으니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아니, 지금은 나보다 귀족들이 더 열 받아서 울분을 삭이고 있으려나?
“그건 어차피 그런 거고, 혹시 무슨 성과라도 있으십니까?”
“별로 없네. 살필 가문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말이야. 몸은 하나인데 참 곤란하단 말이지. 그래도 며칠간 발품을 팔아 몇 군데는 추려냈으니 이제 무슨 성과가 있을 거야.”
“음……. 일부러 시간을 끄시는 건 아니죠? 이 자리가 은근히 피곤하던데, 설마 이 기회에 뽕이라도 뽑으실 요량이신지…….”
“어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내 추호도 그런 생각은 없으이.”
퍽이나. 얼굴이 반질반질한데 무슨…….
“참, 그러고 보니 내일은 히키시 백작이 참모까지 대동해 회의에 참석한다던데. 자네는 한 번도 못 봤지? 그 로랑이라는 녀석 말이야.”
“아, 그런가요? 물론 전 볼 기회가 없었죠. 하지만 참모까지 대동한다니, 무슨 결단이라도 내리려는 걸까요? 그래도 그 참모가 제법 유능한 인물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한 번 겪어보면 알 거야. 난 계속 밖에서 동태를 주시하도록 하지.”
그래도 그 정보를 미리 파악한 걸 보면 황제가 놀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물론 자유를 만끽하며 얼굴이 좀 피긴 했지만 그건 오랜만에 호위도 없이 바깥바람을 쐬어 그런 거라고 믿고 싶었다. 사안이 사안이니 절대 놀러 다닌 건 아닐 거다.
“귀족들을 보고 있자니, 폐하의 노고가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뭔가, 뜬금없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후작이 그러니 뭔가 불쾌하군. 혹시 무슨 사고를 칠 생각은 아니겠지?”
이 양반이, 고맙다는데도 저러네. 그리고 내가 언제 사고를 쳤다고 그러시나?
요 며칠 새삼스레 느끼는 건데 역시 황제의 자리는 엿 같은 자리였다.
생각에는 개인차가 있지만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다. 어쨌든 황제 자리를 즐거워할 사람은 폭군이거나 성자,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뿐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었으니까.
말로는 만인지상이라고 하지만 뭐라도 하려고 하면 폭군이 아닌 이상 수많은 사람들과 합의를 거치거나 이해시켜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과정도 없이 바로 명령만 내리면 그건 그냥 폭군이 아닐까?
충신만 있으면 그래도 정치하기는 편하겠지만 원래 충신과 간신, 충신인 척하는 간신이 뒤섞여 있는 게 정치판이라 그걸 구별하는 것만 해도 엄청 피곤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라면 단박에 거절할 자리가 바로 황제의 자리였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이런 바지 황제 자리를 얼마간 더 유지해야 하는 모양이다. 저 인간이 빨리 뭐라도 건지길 기다리며 말이다.
* * *
그 시각, 정작 울분을 터트리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이런 미친, 빌어먹을 애송이 자식!”
로빈을 지방의 애송이라고만 생각하던 히키시 백작은 갑작스럽게 황제를 대리하며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을 거로 생각했던 로빈이 예상외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하자 욕지기를 내뱉으며 한숨을 토했다.
자신의 계산과 너무 달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랑은 그런 히키시 백작을 달래며 냉정하게 맥락을 짚고 들어갔다.
“우선, 황제 폐하의 환후가 깊은 건 확실한 모양입니다. 생명이 위독하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래, 맞는 거 같더군. 최측근 아이리스가 자책하며 두문불출하고 있고, 실신한 황제가 궁으로 이송되는 모습을 본 자들도 있어. 그리고 신전 측이나 황제와 같이 큐브에 입장했던 기사들을 떠봐도 비슷한 반응이더군.”
“그들이 황제와 같이 모의한 건 아니겠죠? 특히 기사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자들 아닙니까?”
“그 정도는 구별할 수 있네. 내가 그래도 군수 쪽으로 잔뼈가 굵어 기사들하고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아. 황제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몰라도 이미 다 알려진 일을 확인하는 건 가능하단 말이야. 기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큐브에서 적을 상대하다 큰 상처를 입은 게 분명하네. 혼수상태라는 말도 확실한 거 같고.”
“그 황제가…….”
며칠간 히키시 백작이 심혈을 기울여 조사한 건 역시 황제의 부상과 그 진위였다. 하지만 어떻게 알아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발표가 사실이라는 것.
그러니 이제 슬슬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해야 할 때였다.
애송이 하나를 잘 구슬려 이권이라도 얻으려 한 건 실패했지만, 지금 그건 그저 작은 일에 불과했다.
“1황녀와 황후의 밀약. 그건 아마 후계에 대한 약속일 가능성이 큽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황후가 지금 황제의 씨를 임신한 게 분명해. 아이를 낳고, 자신이 섭정할 수 있을 때까지 1황녀를 방패막이로 삼을 생각인 게지.”
“만약 섭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으면 레오니스 공작가의 힘까지 등에 업어 황후의 세가 막강해집니다. 정당한 후계자를 내세우면 황제의 세력도 당연히 황후를 지지할 테고요.”
“그렇겠지. 중요한 건 그레이츠 후작과 1황녀가 대체 무슨 생각이냐는 건데…….”
만인지상의 자리.
황제의 자리가 걸린 일이었다.
벌써 며칠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황제가 다시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한 히키시 백작은 그레이츠 내외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계산하기 바빴다.
황후가 나서 그레이츠와 밀약을 나눴다는 사실 자체가 황제가 다시 재기하는 건 무리라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그레이츠도 황후에게 적극 협조하고 있지만, 만약 황제가 진짜 서거하게 되면 생각이 바뀔 겁니다. 지금 보좌관 젝트는 그레이츠 후작과 죽이 맞아 지내고, 근위대 기사들 역시 그레이츠 쪽에서 넘어온 기사들과 사이가 제법 좋다는군요. 지금 저잣거리에 나도는 소문도 그렇고…….”
“그러니까, 그 애송이가 딴마음을 먹을 거다? 지금은 본색을 숨긴 채 인심을 사고 있고?”
“그런 자리가 황제라는 자리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제국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자리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제를 대리하는 섭정공이라는 매력적인 자리를 쉽게 놓을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권력욕이란 게 바로 그런 거였으니 말이다.
“젝트 그놈은 그야말로 권력에 빌붙는 박쥐 같은 녀석에 불과하지. 자카 자작의 소개로 아카데미에서 간 주제에 황제에게 빌붙고, 나중에 자카 자작이 조셉 공작에게 포섭되어 난을 벌였을 때도 자카 자작가의 멸문을 방치했으니까. 그리고 또 새로 공작위에 오른 크레톤 공작의 데릴사위로 들어간다지 않나? 확실히 젝트 놈이라면 그레이츠에 붙어 영화를 누리려 할 만해.”
젝트와 자카 자작가의 은원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사실 로빈도 여기까지는 모른다) 히키시 백작다운 착각이었다. 원래 젝트가 황제에게 투신한 것 자체가 자카 자작가에 대한 복수심의 발로였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1황녀, 1황녀…….”
히키시 백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하던 로랑은 뭔가 깨달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히키시 백작에게 말을 이었다.
“지금 그레이츠 후작은 1황녀를 대리해 섭정공의 자리에 앉은 겁니다. 그 말은 그레이츠 후작 외에 누구라도 1황녀를 차지하는 자가 섭정공이라는 거죠.”
“…그건 그렇지.”
“만약 지금 그레이츠 후작이 사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응? 그레이츠 후작이 죽는다고?”
히키시 백작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로랑이 고위 귀족들의 정세까지 짚어가며 설명을 이었다.
“세 개의 공작가와 다섯 개의 후작가가 정국을 주도하는 제국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릅니다. 외척인 레오니스 공작가는 황제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한발짝 물러났고, 크레톤 공작은 정치적인 문제와는 담을 쌓은 사람이죠. 결국 남은 건 리아넨 공작가뿐입니다.”
“그렇지.”
“그리고 후작가 쪽은 더 심합니다. 다섯 개의 후작가 중, 조셉 공작과 한편에 선 힐데 후작과 마이러스 후작은 처단, 그리고 조셉 공작과 같은 정치 노선이지만 그날 거사에는 불참했던 도나루 후작은 자신의 영지에 칩거 중이죠. 크레톤 공작이 승작한 빈자리는 리아누스 후작이 채우고, 그레이츠가 명예 후작으로 명목상 후작이 되었지만 남은 후작의 자리는 공백으로 남았습니다.”
“그렇군. 로티넨 후작은 레오니스 공작과 막역한 사이인데다 같이 동쪽 야만인들을 상대하기 바쁘니 의미가 없고. 요즘에는 큐브까지 더해져서 더 그러겠군. 황제가 고위 귀족을 다시 채우지 않고 시간을 끄는 것도 귀족들의 권한을 줄이겠다는 꿍꿍이가 숨어있는 결정이었지만…….”
“네, 하지만 그 말은 황도에서 활동하는 리아넨 공작을 제외하면 백작님이 가장 세가 강하다는 의미지요.”
“그건 그래, 그래서 귀족들이 나를 의지하는 거지.”
“리아넨 공작가는 태생적으로 황족과 연을 맺을 수 없는 가문이죠. 외척이 되면 귀족파로서 자신들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인데, 결국 그렇다는 건…….”
“그레이츠 애송이가 사라지면, 내가 황녀를 차지할 수도 있다?”
“그렇습니다. 황제의 측근들은 황녀에게 관심이 없을 겁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황후와 그 배 속에 있는 황제의 아이죠. 그들에게 섭정은 그저 황제의 아이를 지킬 방패막이에 불과합니다. 누가 돼도 시간만 끌어주면 상관없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어. 그럼 황후와 따로 연계를…….”
“아닙니다, 각하. 지금 잘하고 있는 그레이츠 후작을 그쪽에서 굳이 잘라낼 이유는 없죠. 우선 그레이츠 후작이 없어져야 그들의 눈을 돌릴 수 있습니다. 후작이 사라져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그들이 먼저 백작님께 손을 내밀지도 모릅니다. 그럼 백작님은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척 섭정의 자리만 차지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뒤에 궁을 장악하자?”
“1년이라는 시간은 길면 아주 긴 시간이죠. 그 아이가 멀쩡히 태어난다고 누가 보장한단 말입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백작님의 피를 이은 아이가 다음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죠.”
로랑의 감미로운 속삭임에 잠시 눈이 몽롱해진 히키시 백작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눈에는 탐욕만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흐흐, 그래. 내 아이가 황제가 되고 그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는 내가 정국을 쥐락펴락할 수 있겠군. 그 애송이를 죽이고, 황녀만 구워삶으면 된다는 거지? 황후와 거래하면 황녀가 내 손에 떨어지는 것도 시간문제지.”
“맞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어떻게 하면 로빈 그레이츠를 없앨 수 있을지 그걸 고민해야 합니다. 그 뒤는 순리대로 흘러갈 테니까요.”
“후후. 좋아, 아주 좋아. 그 자극적인 자태에 황위라는 선물까지, 확실히 그레이츠 애송이에게는 너무 아까운 여자다. 로랑, 어떻게 하면 로빈 그레이츠를 끌어들일 수 있을지 계략을 내라. 그리고 내일은 예정대로 너도 함께 입궁해 놈을 흔들어야겠다.”
“네, 각하. 저만 믿으십시오.”
그렇게 히키시 백작의 욕심을 한껏 자극한 로랑은 실소를 머금은 채 히키시 백작의 집무실을 나섰다.
“쉽군, 쉬워. 하긴 저렇게 되기까지 10년도 넘게 걸렸으니, 쉬운 것도 아닌가? 이제 정말 한 발자국만 남은 기분이군. 큭큭.”
새로운 세상을 위해 배운 일종의 암시로 히키시 백작을 구워삶은 게 벌써 십수 년.
최면 같은 형편 좋은 방법이 아니라 자신과 계속 교감하고 신뢰를 나누어야 효과적인 암시지만, 이 정도로 확고하게 신뢰를 다져놓으면 상대의 욕망을 자극해 행동을 유도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물론 효과적인 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