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 * *
다음 날, 어김없이 대전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로빈은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히키시 백작을 옆에서 보조하는 보좌관 로랑 때문이었다.
이름: 로랑 매튜
성향: 복수심. 몽상가. 잘못된 믿음
타이틀: 암약하는 그림자(S). 상계의 거두(U). 암살의 대가(SR). 모략의 달인(R)
패시브: 조용한 발걸음 (랭크 C)
액티브: 번개 같은 칼날 (랭크 C)
세상의 파멸과 제국의 멸망을 바라는 그림자를 처단하라.
[진행 상황]
???
???
???
암약하는 그림자 - 조우
익살스러운 그림자 - 조우
보상: ???
페널티: ???
기한: 세상의 멸망. 모든 그림자의 제거
딱 잡았다, 요놈.
놈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올라온 퀘스트.
이것만 봐도 놈이 그놈들과 한패라는 게 확실해졌다. 그러니 이놈의 정체를 황제에게 알릴 생각에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힘든 것이다.
심지어 이놈은 신분까지 확실한 놈이 아니던가. 이놈을 잡아 족치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까지 차오르니 회의 같은 게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렇게 건성건성 빨리 회의를 마치고 황제에게 알릴 생각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로랑의 발언이 잔잔하던 로빈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레이츠 후작령에 자리 잡은 레드 큐브를 섭정공께서 처리했다는 소식이 황도에 파다하더군요.”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겨울이 오기 전에 처리해야 되는 상황이라 조금 서둘렀죠.”
황도에는 이미 그레이츠에서 레드 큐브를 정복했고, 황제가 쓰러진 상황이지만 북부의 사자가 전국의 레드 큐브를 제거할 거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자신이 쓰러져 민심이 흉흉해지는 걸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황제가 미리 퍼트린 소문이었다. 물론 이 정도로 민심이 수습되진 않았지만, 최악으로 치닫는 건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황제가 쓰러지면서 레드 큐브를 제거할 방법을 고민하던 일부 분별 있는 귀족들도 소문을 듣고 안정을 되찾았으니 황제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 수는 있는 방책이기도 했다.
“그레이츠 후작령의 병력이 강군이긴 하지만, 저희 히키시 백작의 병사들 역시 그에 못지않은 강군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저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게 어떠십니까?”
만약 다른 귀족이 나선다고 해도 학을 떼고 막을 일인데 히키시 백작, 그보다 흑막임이 분명해진 로랑에게 그 위험한 걸 맡길 리가 있겠는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게 차라리 믿음직할 정도로 뻔한 수작이라 속으로 헛웃음이 터졌지만, 이놈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꺼내나 싶어 애써 웃으며 부드럽게 사양했다.
“그건 좀 더 두고 볼 일이죠. 아직 기한이 제법 남았습니다. 아마 그때까지는 황제 폐하께서 쾌차하시지 않을까요?”
“하지만 세간에서는 황제 폐하께서 쉽게 회복하시기 힘들 거라는 이야기가 파다합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는 게 아닐는지요. 혹시… 섭정공께서 다른 마음을 품고 계신 건 아닌지.”
“다른 마음이요?”
“그렇소이다, 섭정공. 혹시 섭정공도 황제 폐하처럼 시간을 끌다 모든 큐브를 독점할 생각 아니시오?”
뭐래, 저 바보는?
저놈은 진짜 노답이네.
그림자는 그림자라 그렇다 치지만 히키시 백작은 대체 왜 저러나 싶었다. 레드 큐브가 터져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퀘스트에서 멸망을 바라는 단체라고 정의한 흑막, 그림자.
퀘스트는 그렇게 말하지만 최근 놈들의 행보를 보면 뭔가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정말 멸망을 바라는 놈들의 행동인가 싶을 정도로 제국이 가장 위태로운 순간에는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로랑의 정보 창까지 확인하고 나니 이놈들의 정체와 목적에 의구심이 더해졌다.
몽상가나 잘못된 믿음.
복수심은 그렇다 치지만 특히 저 몽상가는 세상의 멸망을 바라는 놈이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 미묘한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멸망을 바란다는 건 그야말로 다 같이 죽자는 건데, 복수심으로 가득 들어찬 놈이 아니라면 그런 놈들에게 쉬이 협력할 거 같지 않았다.
그런데 몽상가라.
헛된 것이 대상이긴 해도 몽상가라면 그걸 갈구하고 희망한다는 의미인데, 그건 멸망과 너무 먼 느낌이었다.
어쩌면 일선에서 활동하는 저 로랑이라는 놈도 뭔가에 속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저 히키시 백작은 무조건 속고 있거나, 이용당하는 입장인 듯 보였다. 히키시 백작의 얼굴에는 그저 탐욕만이 넘실대고 있었으니 말이다.
저렇게 욕심이 많은 놈이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그런 조직에 자발적으로 협력할 리는 없었다.
암약하는 그림자라, 무려 20년을 섬겼다는데 결국 속고 있는 거라니 한편으로는 딱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저 노골적인 탐욕은 마음에 걸렸다.
탐욕이라, 대체 무엇에 대한 탐욕일까?
로빈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히키시 백작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백작께서는 백작의 힘으로 레드 큐브를 클리어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시는 건가요? 잘못하면 한두 명이 죽는 거로 끝나지 않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북부군이 강군이라지만, 딱히 확인된 바 없는 이야기일 뿐. 내 병사들은 클리너 교육 시설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는 강군 중의 강군입니다. 실제로 전국 각지를 돌며 많은 큐브를 클리어하기도 했으니 검증된 병력이라고 할 수 있으니, 충분히 큐브를 클리어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하오.”
로빈이 젝트를 슬쩍 바라보니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히키시 백작의 말이 사실임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따지면 그레이츠의 병력 역시 북부에서 일어난 온갖 사고를 모두 해결한 강군이죠. 딱히 확인된 바 없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에게도 기회를 달라는 말씀입니다, 섭정공.”
기회는 개뿔.
들어가면 큐브가 터질 게 뻔한데 무슨 기회를, 어떻게 주겠는가.
저 바보 같은 히키시 백작도 그렇지만 옆에서 살살거리며 웃는 낯으로 이야기하는 로랑은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짜증 났다.
나도 나름 한 뻔뻔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놈은 뭔가 한 수 위? 아마 놈의 정체를 알고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불허합니다, 백작. 백작의 역량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허, 그러니까. 저의 역량을 믿을 수 없다는 뜻입니까? 저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두 분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으니, 차라리 기사 대전을 치러보는 게 어떨는지요.”
“좋다! 기사 대전으로 가문의 역량을 만방에 알리고 큐브를 배정받고 말리라!”
얼씨구,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네.
놈들이 하는 꼴을 보니 저들의 목적에 대하여 뭔가 윤곽이 잡히는 듯했다. 큐브는 핑계고 어떻게든 나와 기사 대전을 치르는 게 목표인 거 같았으니 말이다.
도대체 뭘까?
로빈은 저렇게 억지를 쓰면서까지 기사 대전을 치르려는 히키시 백작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레드 큐브를 배정받으려는 저 로랑의 목적은 십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걸 위해서 기사 대전을 벌이는 건 히키시 백작에게도 딱히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설령 이긴다고 해도 제법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트와이드 제국에서 귀족 간의 분쟁이 일어났을 때 해결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역시 귀족 재판소를 찾는 거였다. 예전 조셉 공작과 그레이트 A에 대한 분쟁이 발생했을 때 로빈이 제소한 바로 그 귀족 재판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곤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결투, 기사 대전, 그리고 영지전이었다.
결투는 로빈에게도 제법 익숙한 소재였다.
소설을 읽다 보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결투.
장갑을 벗어 던지며 결투를 신청하는 바로 그 결투였으니까.
그 결투가 이곳에서도 버젓이 존재했다. 조금 다른 점은 결투가 일어나면 상대를 직접 썰어버리는 소설 속 주인공과 달리 이곳은 본인이 직접 싸우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거다.
본인이 기사가 아니라면 이해라도 하지, 자기가 기사임에도 휘하의 기사를 결투에 내보내면서 무슨 명예를 운운하는지 로빈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비록 그렇게 주군을 대신해 결투를 치르는 게 기사에게는 대단히 큰 영예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영지전 역시 평범한 영지전이었다.
영지의 사활을 두고 겨루는 진검 승부.
다만 영지전에는 많은 제한이 있어서 정말 특별한 사유가 아니라면 영지전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나마 허락되는 경우는 상대 영주나 영지 관계자가 자신의 친족을 직접 살해했을 때 정도라고 할까? 그 외에는 워낙 말도 안 되는 것들뿐이라 사실상 영지전 사유로 실효성이 있는 건 저것뿐이었다.
남의 영지에서 이유 없이 영지민을 학살하거나 영지민을 약탈해 가는 건 별로 현실성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기사 대전.
기사 대전은 다수의 기사를 이끌고 귀족끼리 직접 결판을 내는 영지전의 축소판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귀족 본인이 직접 참가한다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 대부분은 대세가 기울면 상대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게 상식이지만, 원한이 깊게 쌓이면 항복이고 뭐고 바로 상대를 죽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으니 말이다.
기사 대전의 경우 영지전과 달리 그 요건이 다소 가벼운 편인데, 명예나 자존심이 걸린 경우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저 히키시 백작이 가문의 명예를 운운하며 저렇게 나대면 기사 대전을 치르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이 정도로 기사 대전까지 치르는 건 그 사유가 너무 조악하고 상대의 의도가 심히 불분명하다는 건데.
정말 승리를 자신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가 기사 대전까지 운운하며 강하게 나오면 내가 한발 물러나리란 걸 기대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딱히 상대의 의도대로 기사 대전을 받아줘야 할 필요성이 있을까 싶었다.
아니면 내가 진짜 싫어서 기사 대전을 통해 어떻게든 죽이려는 생각인가? 물론 내가 요 며칠 깐죽대며 약을 올리긴 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어쨌든 귀찮기만 한 일이라 그냥 거절하고 레드 큐브를 허가하지 않는 쪽으로 밀고 나가야겠다고 결정하고 히키시 백작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내가 거절하면 기사 대전이 벌어질 일도 없고, 내가 섭정공인 이상 놈이 자기 뜻을 무시하고 큐브에 들어갈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이놈 봐라?
저 로랑의 등장이 너무 충격적이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놈이 다이앤을 바라보는 눈길이 심히 불손했다. 온갖 추잡한 욕망이 가득한 것은 기본이요, 건방지게 입맛까지 다시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음습한 눈길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강렬한 소유욕.
저 인간이 건방지게 다이앤을 욕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큐브는 페이크고 정말 노리는 건 다이앤과 섭정공의 자리다?
그렇게 타깃을 큐브에서 다이앤 쪽으로 바꿔서 생각하니 놈의 생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깡인지 모르겠지만, 놈은 나를 기사 대전에서 처리할 계획인 거 같았다.
처음부터 날 싫어한데다 황제도 없겠다, 욕심이 앞을 가리면 그런 허황한 꿈을 꾸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게 가능할 거로 생각하는 건가?
“무서우면 피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래서야 황녀가 섭정공에게 의지할 수나 있을는지. 어쩌면 황녀에게는 저처럼 의지가 되는 남자가 필요할지도 모르겠군요. 역시 남자라면 낮에는 의지가 되고 밤에는 거친 게 최고 아니겠습니까? 섭정공은 외모만 봐도… 딱히?”
…저게 돌았나? 내 것의 반 토막밖에 안 되게 생긴 주제에.
도발은 하찮기 그지없지만 마지막에 내민 새끼손가락은 사람을 울컥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게 대체 누구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어이없음과 짜증으로 머리가 있는 대로 뜨거워졌다.
만약 로랑의 목적이 히키시 백작을 충동질해 나와 기사 대전을 붙이는 거라면 그 계략만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놈의 그것을 뽑아버리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으니 말이다.
“좋습니다, 히키시 백작. 백작이 그렇게 자신한다면, 해 드리지요. 그게 뭐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이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란 건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흐흐, 섭정공이나 조심하시지요. 검에는 자비가 없습니다.”
“그럼 바로 일정을 조율하겠습니다. 일시는…….”
당연히 이날 회의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그렇게 마무리되고 말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