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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269화 (269/303)

269화

* * *

기사 대전은 일주일 후, 황궁 중앙 연무장에서 치르기로 했다.

인원은 500 이하.

아마 놈들이 동원할 수 있는 수가 500 정도인가 보다.

본인의 기사들과 귀족파 쪽에서 동원할 수 있는 기사들의 수가 그 정도인가 본데, 확실히 그레이츠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런 겨울에는 많은 수를 동원할수록 저쪽에 유리하긴 했다. 우리는 아무래도 많은 병력을 동원하는 건 제법 부담스러웠으니 말이다.

“굳이 그런 억지를 들어줄 이유가 있었습니까?”

“글쎄요.”

그날 회의를 마치고 황제에게 보고하러 가는 길.

젝트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내 반응에 의아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처럼 누가 뭐라고 하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거로 생각했나 보다.

물론 나에게도 생각은 있었다.

로랑과 히키시가 그냥 아무 의미도 없는 곁다리 귀족이라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로랑은 흑막.

이렇게 놈들의 뜻대로 기사 대전을 치르면 어떤 움직임이 있을 테고, 그러면 뭔가 덜미를 잡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지금까지 황제가 저 로랑을 어쩌지 못한 것도 그 덜미를 못 잡아서가 아니던가.

물론 어떻게 싸워도 히키시 백작이 나를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해 그런 결정을 내린 거지만 말이다.

그렇게 황제 궁에서 병문안을 가장한 작전 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황제와 황후, 그리고 로빈과 젝트, 이렇게 넷뿐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로빈은 로랑이 흑막임을 황제에게 알렸다.

“로랑이 분명합니다. 폐하께서 놓치신 끈이 분명 로랑과 연결되어 있을 겁니다.”

회의의 내용과 기사 대전에 대하여 전달받은 황제 역시 로랑이 의심스럽다는 걸 인정했다. 예전부터 황제가 의심하고 있던 인사였기에 그가 놈을 의심하게 유도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심정적으로야 그렇지. 이 상황에서 굳이 레드 큐브를 배정해 달란 것도 그렇고, 예전 폭탄 건도 있으니 충분히 의심스러운데 유감스럽게도 증거가 없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심증만으로 귀족을 체포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그건 그렇죠. 다른 귀족들의 반발이 극심할 테니까요. 그럼 이제부터라도 로랑을 집중적으로 파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귀족들이 의심스럽지 않은 건 아니야. 그런데 아무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모든 힘을 로랑에게만 집중할 순 없네.”

“음…….”

하지만 황제는 모든 역량을 로랑 쪽으로 집중하는 것에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의심스러운 건 맞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제국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신중하게 접근하려는 황제의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조금 답답한 건 사실이었다.

이 인간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려나.

만약 기사 대전을 벌여 히키시 백작을 제압해도, 로랑에 대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면 이대로 흐지부지 넘어가게 될지도 몰랐다.

“폐하, 제 명예를 걸고 로랑이 확실합니다. 지금처럼 놈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일 때 로랑 쪽에 집중해야 증거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네에게 걸 만한 명예란 게 있었나? 원래 명예는 지나가던 개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는 게 자네였던 거 같은데……. 걸려면 다이앤이나 영지, 가족 같은 걸 걸어야지.”

아, 그러네. 아까 놈이 하도 명예 운운하길래 내가 어떤 인간인지 잠시 망각했다.

하지만 그걸 그렇게 끄집어내 뼈를 때리다니.

역시 황제다운 태클이랄까?

그래도 황제의 말이 사실이라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는 못했다.

“그럼… 영지라도?”

김이 새긴 했지만 뒤늦게라도 조심스럽게 영지를 걸어봤는데 황제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됐네, 이 사람아.”

됐다고 말은 하지만 내 말이 제법 인상적이었는지 황제도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장담한다고?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한 녀석이니…….”

고민하며 작게 중얼거린 황제는 결국 로빈을 믿고 힘을 한곳으로 모으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귀족들을 감시하고는 있지만 대부분 이 혼란 중에 조금의 이익이라도 더 얻기 위해 움직이는 잔챙이에 불과했다. 로빈에게는 조만간 성과가 있을 거라 큰소리쳤지만 사실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 혼란을 계속 이어갈 순 없었기에 황제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황제의 부재가 장기화되어 민심이 엉망이 되기 전에는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테니 말이다.

딱히 성과가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흐지부지되느니 차라리 사람 보는 눈이 확실한 로빈을 믿고 한번 모험을 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좋아. 후작을 한번 믿어보겠네. 당장 로랑과 그 주변을 감시하는 데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하도록 하지.”

생각보다 쉽게 황제를 설득한 로빈은 오늘 회의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로랑과 히키시 백작의 정확한 의도가 무엇인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후작은 로랑이 히키시 백작을 이용해 다이앤과 섭정공의 지위를 차지하려고 한다는 건가? 그리고 그 후에 섭정공의 권한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정책을 바꾸겠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섭정공이 되면 제국을 완전히 혼란스럽게 어지럽힐 수 있고, 그들이 활동하기도 더욱더 쉬워지겠죠.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노골적으로…….”

“누가 봐도 욕망이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이었죠. 하지만 그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너무 노골적이라 오히려 이상하다?”

“네, 아시다시피 로랑은 제법 유능한 놈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티가 나는 계략을 사용할 거라고는…….”

로빈의 이야기에 젝트가 정면으로 반박했다. 아무리 로빈을 도발하기 위해서라지만 너무 노골적이라고 지적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허점이 너무 많은 방법입니다. 그레이츠 후작을 기사 대전에서 처리하는 것도 문제인데, 만약 그걸 성공했다고 쳐도 원수나 마찬가지인 히키시 백작에게 1황녀님이 넘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대체 무슨 수로 1황녀님을 차지하겠다는 걸까요?”

“황도 내에서 그레이츠 후작과 1황녀의 로맨스는 제법 유명해요. 평민들은 몰라도 귀족들은 대부분 알고 있거든요. 정략도 아니고 서로 좋아서 결혼한 건데, 그 남편을 죽이고 1황녀를 차지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젝트의 지적에 황후까지 나서 계략의 허점을 지적했다.

“음…….”

히키시 백작의 음탕한 눈길과 도발에 열 올랐던 로빈도 냉정을 찾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허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해 들은 로랑의 철저한 행적과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황제도 의심만 쌓였을 뿐 놈에 관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게 아닌가.

아무래도 내가 다이앤에게 음탕한 눈길을 보내는 히키시 백작에게 너무 흥분해 잠시 객관적인 판단력을 잃은 모양이다.

“그럼 뭘까, 그놈의 진정한 목적은…….”

황제 역시 젝트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놈의 진정한 목적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온 정보만으로는 놈의 목적을 파악하는 게 불가능했다.

“우선, 놈만 집중적으로 파봐야겠군. 레니아, 당신도 무슨 특별한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도록 해.”

“예, 페리안. 그럴게요.”

“후작과 젝트도 마찬가지. 우선 정보를 모은 후 다시 모이지. 어쨌든 놈들이 원하는 대로 기사 대전을 약속했으니 후작의 말대로 뭔가 움직임이 있을 거야.”

* * *

그렇게 황제 일행이 큰 성과 없이 회의를 마무리할 무렵.

히키시 백작은 득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계획대로 기사 대전이 열리면, 바로 그레이츠 후작을 격살하고 황후와 접선한다. 로랑, 철저히 준비하게. 난 귀족들에게 기사들을 빌리지. 그레이츠는 겨울만 되면 마수 때문에 몸살이라지? 그리고 꼴에 자기 영지를 꽤 아끼는 영주라니, 많은 기사를 동원하지 못할 거야. 제가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기사 대전을 받아들이는 꼴이라니. 정말 우습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각하. 모든 게 각하의 뜻대로 흘러갈 겁니다. 이제 각하가 섭정공에 오르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크크. 좋아, 아주 좋군. 그 황녀가 이제 내 것이 된단 말이지.”

득의에 찬 히키시 백작의 장단에 맞춰 살살거린 로랑은 백작의 집무실을 나서며 음충맞게 웃었다.

“후후, 드디어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가 되었군. 이제 저 머저리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끝이야. 오합지졸 기사들을 모은다고 그레이츠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어리석긴……. 하긴, 그래서 써먹기 좋은 거지만.”

이제 저 히키시 백작과 작별을 고할 시간이었다.

* * *

황제와의 은밀한 회의를 마무리 지은 로빈은 침소로 돌아와 흑웅과 전사들을 모았다. 놈의 목적이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기사 대전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었어? 주인, 그 새끼 X지를 날려버려도 되지?”

“분명 새끼손가락보다 작을 거야. 로빈이 대전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소리 지를 뻔했다니까. 감히 로빈에게 새끼손가락을 들이밀어?”

다이앤도 놈의 눈빛이 불쾌했는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왠지 놈의 음탕한 눈빛보다 다른 걸 더 기분 나빠하는 분위기였지만 말이다.

“뭐라고 하려고 했는데?”

“뭐긴요! 우리 로빈의 것은 네놈 팔뚝만 한데 네 X지는 안녕하시냐고 안부를 물으려 했죠.”

…분노 포인트가 거기였어? 그래도 팔뚝은 너무 갔잖아?

열 받았을 때 상대방의 부모님 안부는 종종 묻는다만, X지의 안부를 묻는 건 또 처음이네. 그놈의 눈빛은 불쾌하지 않은 건가?

솔직히 놈의 노골적인 눈빛에 예전 기억이라도 떠올랐을까 봐 조금 걱정했는데 다이앤은 의연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니 그녀도 제법 이를 갈고 있는 모양이다. 오늘처럼 냉정한 표정의 다이앤은 처음이었으니까.

“뭐, 그 정도야 예전에도 많이 겪어봐서요. 그리고 어쨌든 기사 대전으로 붙게 되었잖아요? 그럼 뭐, 알아서 죽겠네요.”

“언니, 안심하세요. 제가 뽑아버릴 거니까요. 혓바닥이든 X지든, 다 뽑아버릴 거예요.”

린 역시 다이앤의 말에 호응해 놈을 없애버릴 거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마님을 무시하는 건 그레이츠를 무시한 것과 같습니다.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겠군요.”

침착한 흑웅마저 저렇게 이글거리는 걸 보니 놈의 태도가 상당히 불쾌한 모양이다. 특히 린은 단순히 흥분한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놈에게 달려가 바로 뽑아버릴 기세였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돼서 기사 대전으로 한 판 해야 해요. 쓸데없는 싸움을 자초한 꼴이긴 한데, 상황이 상황이니 이해해 줬으면 좋겠네요.”

“굳이 남의 시선을 끌고 싶지 않는 영주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한 번쯤은 영지의 힘을 제대로 보이는 게 앞으로의 귀찮음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실 소문만 무성했지 황도 귀족들은 그레이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 주인. 원래 호랑이가 무서운 걸 모르니까 개새끼가 짖는 거야. 무서운 걸 알면 그렇게 못 짖지.”

저렴한 비유이기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병력이 클리너 교육관에 묶여있는 히키시 백작이 자력으로 500명의 기사를 동원할 리는 없고 결국 다른 귀족들에게 빌린다는 뜻인데, 그들이 히키시 백작에게 병력을 빌려주는 것만 해도 우리 영지를 가볍게 보고 있다는 의미였다.

누구도 남의 기사 대전에서 자신의 기사가 죽는 걸 원하진 않을 테니 히키시 백작이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든지, 아니면 그 이상으로 히키시 백작에게 뭔가를 얻은 모양인데 기사들이 다 죽어 나자빠지면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닐 것이다.

“어때요, 흑웅? 황도의 기사들 수준은?”

“황실 근위대는 그래도 봐줄 만하지만…….”

“사실 군부의 다른 기사들도 별거 없더라. 황실 근위대만 좀 할 만하고.”

흑웅이 말을 아끼는 가운데 린이 나서서 대신 대답했다.

며칠 동안 황도에 머물면서 린과 흑웅을 포함한 전사들은 종종 다른 기사들과 만나 가벼운 대련을 즐기곤 했다. 대부분 황실 근위대였지만, 종종 군부의 다른 기사들도 있었는데 그들 모두 그레이츠의 전사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로빈이 자랑하는 그레이츠의 전사들은 황제의 근위 기사단(황실 근위대와는 다름)이나 작센과 크라우의 남부 해안가 특작 부대, 혹은 동쪽 대장벽을 지키는 레오니스 공작령의 정예 기사들과 동급인 최정예 병력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일반적인 황도 귀족의 기사들은 기사라고 하지만 정예 기사라고 하기 힘든 수준이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히키시 백작에게는 답이 없었다.

그나마 유일한 강점은 머릿수 정도?

하지만 그것조차 마수가 아닌 인간을 상대하는 이상 문제가 될까 싶었다. 인간은 마수와 달리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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