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그래도 수는 차이가 날 거예요. 영지에서 따로 전사들을 충원하지는 않을 생각이거든요.”
“저희 100명이면 충분합니다. 영지도 바쁜데 굳이…….”
“겨우 500이라면서? 한 명당 넷씩만 썰면 되겠네.”
“…계산 못 하냐?”
“흥, 내가 100명 처리할 거니까 걱정 마셔. 그럼 일 인당 네 명 맞잖아? 주인, 날 믿어!”
“…그래, 알아서 해라.”
혹시나 해 병력 충원이 없음을 알렸는데도 흑웅과 린의 자신감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100마리 처리하면 상이라도 있어? 그… 뭐라더라? 신상필벌? 그게 분명해야 한다던데.”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은 소리야?
하지만 녀석이 실비아도 아니고 원래 상보다 벌을 더 밝히는 녀석인데 웬일로 상 욕심을 내고 있으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이 참 가관이었다.
“후후, 상을 받아서 꼬맹이한테 자랑해야지. 꼬맹이가 얼마나 약 오를까?”
…너 그러다 또 실비아한테 혼난다?
이 녀석들은 정말 사이가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다.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녀석들이랄까? 개와 고양이도 아니고 개(웰시코기)와 개(도베르만)인데 대체 왜 저러는 건지.
어쨌든 둘의 태도를 보니 기사 대전 자체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이 기회에 100명으로 500명을 썰어버리면 아마 황도의 귀족들도 감히 그레이츠를 가볍게 보지 못할 것이다.
성격상 튀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상대가 기사 대전을 청한 만큼 영지가 무시당하고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라 이번에는 힘을 제대로 보일 생각이었다.
* * *
기사 대전을 준비하느라 바쁜지 히키시 백작도 며칠간은 잠잠했다. 맨날 같은 안건을 올리며 귀찮게 하는 것도 멈추고 귀족들에게 기사를 빌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젝트의 조사에 의하면 귀족파 귀족 몇몇이 무슨 밀약을 나누고 히키시 백작에게 기사를 빌려주기로 했단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황제는 놈들이 쓸데없이 인력을 낭비한다고 혀를 찼다. 그래도 기사인데 살아있으면 큐브라도 클리어하지 않겠냐며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귀족파의 기사들까지 아까워하다니, 참 황제다운 마인드이긴 하지만 특별한 정보도 얻어내지 못하면서 저러고 있으니 좀 얄밉기도 했다.
마지막 회의를 끝으로 며칠 동안 특별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영양가 없는 놈이랑 쓸데없이 싸우기만 하고 정작 중요한 놈은 놓치는 게 아닌가 싶어 로빈도 점점 초조해졌다. 저만 그런 건 아닌지 황제와 젝트도 제법 심각한 분위기였고.
하지만 기사 대전이 벌어지기 이틀 전.
조금 묘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얻게 되는데.
그곳은 바로 그레이츠 영지였다.
전투력으로는 압도할 거라 확신하는 로빈이지만, 그래도 전사들이 다치는 건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대비책을 궁리하다 영지로 연락해 사제들을 요청하기로 했다. 이곳에도 물론 사제들이 있지만, 그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 분명하니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치료받으려면 영지의 사제들이 최고라고 판단한 것이다.
[사제님들을요? 바로 요청하겠습니다.]
“그래요, 지온. 영지에 별일은 없나요?”
그렇게 사제를 요청하고 가볍게 영지 상황을 물었는데, 지온이 이상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닌가.
[사실 문제가 생겨 영주님께 연락을 넣으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온의 말을 들어보니, 영지에 상단이 찾아왔는데 이 상단이 행동하는 게 자못 의심스럽다는 것.
우버 마을을 벗어나 몰래 영지 내로 들어서려는 거 같아 치안대가 계속 주시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영지에 외지인이요? 지금 이 타이밍에? 그들은 지금 뭘 하고 있나요?”
[영지민들과 친한 척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치안대의 말을 들어보면 느낌이 좀 그렇답니다. 원래 그런 게 있잖습니까? 일종의 감? 뭔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껄끄러운 그런 느낌이요.]
“그래요? 치안대면 외지인을 가장 많이 접하는 사람들인데 그 감을 무시할 순 없겠죠.”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이 시기에 영지 쪽으로 불청객이라니. 이게 과연 우연일까?
놈들은 예전에 한 번 크게 덴 적이 있었다. 예전에 영지에서 테러를 일으키려 했던 그 그림자도 치안대의 수색에 정체가 들통 나 여러 번 잡힐 위기를 겪지 않았던가? 그런데 또 비슷한 짓을 벌인다는 이야기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확실히 의심스러운 상황이니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 당연한 조치였다.
“지온, 확실히 경계하세요. 놈들은 우리 쪽에 유감이 많잖아요? 특히 저택을 위주로 철저히 방어 병력을 배치하시고요. 병력은 충분하죠?”
[네, 영주님. 저택은 철저히 보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오히려 상황 전하가 걱정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온전치 못한 상황에서 그분까지 변을 당한다면…….]
장인어른을 암살한다.
지온의 말을 듣고 보니 뭔가가 머리를 내리치는 기분이었다. 나는 황제가 멀쩡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놈들은 전혀 모르지 않는가.
만약 황제가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서 장인어른까지 변을 당하면 제국은 혼란에 빠져들 것이다. 제국에서 황족이란 존재는 그 정도로 대단한 의미가 있었으니까.
로랑이 세상을 파멸시키려 한다는 조직의 목적까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다 해도, 황족을 모두 없애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헛된 망상 정도는 충분히 할 만했다.
그야말로 놈의 타이틀 몽상가와 가장 어울리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맞아요, 지온. 확실히 일리가 있어요. 놈들을 철저히 감시하시고요. 푸시 캣츠에도 상황을 알리세요. 장인어른의 경호를 확실히 하라고요.”
[네, 영주님.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지온에게 마지막 지시를 내린 로빈은 서둘러 황제와 황후를 찾아갔다. 놈들의 목적이 황족이라면 단순히 장인어른만을 노릴 리가 없었다. 장인어른이 변을 당해도, 나와 다이앤이 살아있다면 섭정으로 어떻게든 제국을 이끌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그저 대체할 수 있는 인물에 불과했다. 내가 죽어도 다이앤이 재혼하면 새로운 섭정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결국 놈들의 목적은 내가 아니라 다이앤인 것이다.
“폐하, 아무래도 놈들의 목적이 황족과 황실 그 자체인 거 같습니다.”
“뭐? 황실? 그게 무슨…….”
황제는 로빈의 설명을 듣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놈들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간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물론 황제 자체가 건재하기 때문에 모든 전제가 어그러졌지만, 놈들은 그걸 모르니 충분히 그런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최소한 나를 죽이고 섭정공을 차지한다는 그 엉성한 계획보다는 체계적이지 않은가.
“오늘 알게 된 사실인데 그렇지 않아도 히키시 백작의 상단 중 하나의 위치가 불분명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네. 로랑이 직접 관리하는 상단인데 그러니까 그 상단이…….”
“레페로 상단!”
“그래, 맞아. 다른 상단은 모두 목적지로 움직였는데 레페로 상단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지.”
“맞습니다. 지금 저희 영지에 있는 상단이 바로 그곳입니다.”
“배를 타고 바로 그곳으로 갔다?”
“시간은 얼추 맞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셨다는 게 확실해진 후 바로 상단이 출발했으면…….”
상황을 전해 듣던 젝트는 지금까지처럼 철저하게 흔적을 지우지 못한 게 놈들도 조급해져서 그런 거라고 판단했다.
“황제 폐하가 쓰러진 건 그들에게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을 겁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꼭 잡아야 할 찬스. 그러니 지금까지처럼 철저하게 흔적을 지우지 못한 거죠.”
“어쩌면 아예 히키시 백작을 버릴 생각일지도 모르죠. 황족을 모두 없애버리면 제국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히키시 백작도…….”
“히키시 백작과 그레이츠를 붙여 시선을 끌고, 히키시 백작의 이름을 단 상단으로 부황 폐하를 제거한다? 그 죄는 모조리 히키시 백작이 뒤집어쓸 테고, 로랑 매튜 본인은 조용히 사라지겠군.”
“매튜 남작가도 그 대가를 치르겠지만…….”
“로랑은 오히려 그걸 바라고 있을 거야. 로랑 매튜는 자신의 가문을 증오하니까. 내가 로랑을 의심하면서도 그와 가문을 연결 짓지 않은 건 그 때문이지.”
역시 놈도 그런 쪽인가?
가문에서 대접받지 못한 둘째.
대체 복수심은 어디서 생겨난 타이틀인가 의아했는데 그게 가문에서 시작된 복수심인 모양이다.
“결국 로랑의 목적이 황족 그 자체라면 그 타깃은 후작이 아니라 다이앤이겠군.”
“그렇지 않아도 저도 따로 보고를 드리려고 했어요, 페리안. 오늘 들어온 보고인데, 궁의 사정을 캐고 다니는 정체불명의 무리가 있는 모양이에요. 기사들은 끝까지 페리안을 굳게 믿고 있지만, 단순히 잡무를 보는 일꾼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물론 평소에는 그들까지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
“그래, 날 간호한다는 명목으로 이곳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그럼 정보가 조금 샜을 수도 있겠군. 적어도 다이앤이 어디에서 기거하는지 정도는 놈들도 알고 있겠어. 다이앤의 호위를 따로 준비해야 하나?”
“네. 맞습니다, 폐하. 다이앤의 경호에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만약 황궁 내에서 기사 대전이 벌어진다면 많은 기사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릴 겁니다. 보기 드문 이벤트니까요. 만약 그레이츠의 전사들이 모두 빠진다면 다이앤의 호위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거죠?”
“…그렇군. 순간적으로 호위 공백이 생길지도…….”
황제의 기사들은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 그들이 아는 건 그저 황후와 다이앤이 유도했던 대로 황후가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렇기에 만약 황궁에서 무슨 변고가 일어나면 그들은 주저 없이 다이앤을 버리고 황후를 선택할 것이다.
그럴 경우 다이앤을 지켜야 할 자들이 바로 영지의 전사들인데 그들은 그 시각 히키시 백작과 기사 대전을 벌여야 한다.
“대충 알 만하군. 그럼 대비책을 세우면 될 일.”
황제의 말대로 이젠 대비책을 세울 일만 남았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기사 대전이 약속된 그날이 되었다.
로빈은 황궁 대연무장에 설치된 자신의 막사에서 전투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서는 그레이츠의 전사들이 몸을 풀며 오늘의 전투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야~ 많네. 확실히 500 정도면 싸울 맛 나겠어.”
“이런 경험은 예전에 황제 양반을 따라서 그 누구야? 힐데? 그놈 영지로 쳐들어간 이후 처음이네.”
“그때는 황제 양반이 그놈부터 토막 내버려서 손맛만 버렸다고.”
“오늘 저놈들은 어떨지 모르겠어. 린 단장이 뽑아버린다고 벼르고 있던데, 시작하자마자 끝나는 건 아니겠지? 상대 대장이 죽으면 끝나는 거라며?”
“끙, 린 단장이라면 그럴지도. 요즘은 완전 괴물이라니까. 영주님께 부탁드려서 말려야 하나?”
“글쎄, 그게 될까? 차라리 마님이 낫지 않아?”
“아, 마님. 그래. 마님이면 린 단장도 어쩔 수 없지. 누가 뭐래도 정실 파워인데.”
“야야, 아서라. 그놈한테 가장 열 받으신 분이 마님이야. 영주님께 새끼손가락 들이밀었다잖아. 요만 하다고.”
“킥킥, 미친놈이 죽고 싶으면 뭔 짓을 못 해?”
딱 봐도 긴장이라기보다 린이 폭주해 히키시 백작부터 썰어버려 빨리 끝날 걸 걱정하고 있었다.
저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어차피 중요한 건 기사 대전이 아니기에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린을 불러 오늘 있을 기사 대전에서 주의해야 할 점을 설명하는데.
“뭐, 주인? 말도 안 돼. 그놈을 살려두라고? 항복? 하~앙~복? 그게 말이나 돼?”
“나도 생각 같아서는 그냥 죽이고 싶은데 말이야.”
로빈은 쓴웃음을 지으며 어제 있었던 마지막 작전 회의를 떠올렸다.
“그래, 후작은 히키시 백작을 어쩔 셈인가?”
“전투 중에 죽을 거 같은데요. 우리 전사들이 여간 화가 많이 난 게 아니라서요. 특히 린 같은 녀석은 눈이 돌아가면 제 말도 안 듣거든요.”
딱히 살려둘 이유를 못 느껴 그냥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실 히키시 백작이 전투에서 목숨을 건진다 해도 인간답게 사는 건 이미 그른 상황이라 그냥 살려둬도 되지만 지금도 그 새끼손가락과 눈빛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굳이 린이 제어하려고 한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어차피 죽일 거면 난전 중에 부득이하게 사망하는 편이 나아서 그녀를 말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린이면, 그때 그 두 번째 부인 말이군. 하긴 그녀라면…….”
“네, 아주 망아지 같은 녀석이죠.”
“게다가 후작의 것을 노골적으로 탐냈으니 살려두고 싶지 않겠지. 후작과 영지를 대놓고 무시한 것도 크고. 다른 건 몰라도 그쪽으로는 민감하지 않나.”
“음, 꼭 그렇다기보단…….”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