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하지만 이번에는 백작을 살려뒀으면 하는데.”
“백작을요?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이미 놈들의 꼬리를 잡은 후고 히키시 백작도 단순히 이용당한 거라 아무 가치도 없는데 굳이 살려놓으라는 황제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로빈.
그리고 그런 그를 위해 젝트가 설명하고 나섰다.
“후작님도 느끼셨겠지만, 황도에는 관료 귀족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그 관료 귀족들이 히키시 백작에게 기사를 빌려줬지요. 만약 이대로 일이 진행되면…….”
“히키시 백작은 반역죄, 그러니까 기사를 빌려준 귀족들에게도 죄를 물을 수 있다는 거군요. 히키시 백작의 자백만 받아내면.”
“네, 장부도 있을 겁니다. 히키시 백작의 자백에 장부까지 있으면 그들을 끝장낼 수 있죠.”
“그 정도 가담으로 사형까지는 무리지만 실각은 확실하네요. 하긴, 제국 초창기라면 몰라도 요즘 같은 시대에 관료 귀족은…….”
귀족 회의가 있는 세상에서 굳이 관료까지 귀족일 이유는 없었다. 황권을 견제하는 쪽으로는 귀족 회의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황제의 명령대로 신속,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려면 귀족인 관료보다 철저하게 교육받은 유능한 평민 관료가 더 효율적이었다.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배부른 귀족 관리보다 고르고 골라 임관한 평민 관리가 유능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크레톤 공작처럼 귀족이면서 철두철미한 인사도 있었지만 말이다.
“어떤가, 후작.”
“네, 그런 이유라면 흔쾌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 억울해할 것도 없어. 어차피 히키시 백작은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그렇겠죠. 반역죄니까요.”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결국 반역죄로 처벌받을 수밖에 없는 히키시 백작.
하지만 이 상황에서 섭정을 해치고 황녀인 다이앤을 탐낸 것 자체만 해도 큰 죄였기 때문에 딱히 동정심이 생기진 않았다.
“이렇게 된 거야.”
“아씨, 그럼 못 죽이네?”
“응, 죽이면 안 되지.”
“죽이지만 않으면 돼? 그냥 산 채로 뽑아버리면?”
“…그럼 죽지 않겠냐?”
“…알았어, 주인.”
이 녀석이 무슨 끔찍한 소리를. 아무리 미워도 그걸 산 채로 뽑는다는 건 좀 그렇지 않냐? 듣기만 해도 소름이 그냥…….
그리고 대기 중인 로빈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영지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었다.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놈이 완벽하게 낚이기 전에는 영지에 침입한 놈들도 체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만약 놈들이 잡히기 전에 로랑에게 통신이라도 넣는다면 여우 같은 로랑이 낌새를 눈치채고 도주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와 로빈, 그리고 영지가 한 몸같이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어때요?”
[아직 움직임이 없습니다. 목표는 확실히 상황 전하가 맞습니다. 어제부터 신전 근처를 배회하며 동태를 살피고 있으니까요.]
“역시 그렇네요. 호위 상태는 어때요? 감시 인력은 충분하죠?”
[네, 푸시 캣츠의 여성분들이 사제로 가장한 채 상황 전하를 밀착 마크하고 있습니다. 작전이 시작되면 백랑 님과 제필 경까지 나서 놈들을 처리할 거고요. 큰 여관부터 신전 근처까지 골목마다 치안대가 지키고 있으니 절대 놓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요? 백랑 님과 제필, 그리고 치안대라. 하긴, 그러려고 치안대를 잔뜩 뽑은 거니 잘 이용해야죠. 어쨌든 작전 시작까지는 절대 들키면 안 돼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휴~ 황실에서 빨리 연락이 와야 놈들을 잡고 마무리 지을 텐데. 혹시 전투가 시작한 뒤에 움직일 생각인가? 물론 그 시기가 가장 안전하긴 하지만 생각보다 인내심이 대단한걸.”
이제 전투 시간이 임박했는데 아직 황제에게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아무래도 놈은 전투가 시작된 이후에 움직일 모양이다.
“후작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온과 통신을 마치고 놈들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는데 황궁 근위대 기사 하나가 달려와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왔다.
“자, 가자.”
두 개의 수정구를 들고 털레털레 막사를 나서는 로빈.
그리고 린과 흑웅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전장에는 수많은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고, 주변에는 구경하는 귀족들로 넘쳐 났다. 그리고 중앙에는 히키시 백작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번 전투의 심판 격인 리아넨 공작과 크레톤 공작 역시 단상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크레톤 공작은 이런 시국에 귀족들끼리 전투를 벌이는 것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있었다. 리아넨 저 양반은 그저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결국 100명이군요, 섭정공. 너무 싱겁게 끝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네, 뭐. 백작이나 조심하세요. 여기저기서 잔뜩 끌어모았는데 고이 돌려보내줘야 하잖아요?”
“흐흐, 언제까지 그리 당당할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요. 황녀님의 부드러운 살결도 기대되고요.”
…그냥 죽이면 안 되나?
아니다. 어차피 죽을 놈인데 굳이 내 손을 더럽힐 이유는 없지.
“네, 망상은 자유니까요.”
물론 그걸 입 밖에 낸 순간 죽을 이유가 충분하지만, 황제와 약속한 게 있으니 참기로 했다.
* * *
히키시 백작과 쓸데없는 실랑이 끝에 크레톤 공작의 지시에 따라 본진으로 돌아온 로빈.
그곳에는 100명의 전사들이 로빈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신호가 올라오면 전사들에게 명령해 상대 기사들을 처리하고 히키시 백작을 포박하면 오늘 그가 할 일은 끝이다.
[지금부터 로빈 그레이츠 후작과 아르곤 히키시 백작의 기사 대전을 시작하겠다! 모두~ 격돌!]
신호가 올라오자 로빈이 손을 들어 적진을 가리켰다.
“자! 저 건방진 돼지 놈을 잡아오세요. 다친 분들은 알죠? 알아서 빠지시고요. 이런 곳에서 어이없게 목숨을 잃을 분들은 없으리라 믿어요.”
“네! 영주님!”
“나를 따르라! 가자!! 돼지 잡으러 간다!!”
“오오~ 선두는 린 단장이다!”
“다섯 놈도 처리 못 한 녀석은 백랑 족장과 개인 면담이다!!”
“그건 너무 가혹하잖아! 네 마리로 하자!”
“여섯 놈으로 해서 탈락자를 늘리자!!”
“저 사악한 놈!”
뭔가 중구난방에 난잡해 보이지만 이런 난전에서 모야족 전사들을 이기는 건 쉽지 않았다. 난전에서 서로를 이용하는 것에 능숙한 모야족 전사들은 수가 늘어날수록 놀라운 시너지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준황제급 괴수 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잠시 후, 당당하게 진용을 갖추고 전진하던 기사들과 린을 선두에 세우고 돌진하는 전사들이 충돌했다.
“뭐야? 선두가 여기사야? 오, 쌔끈한데?”
선두에 선 상대 측 기사들은 웬 늘씬한 미인이 앞으로 달려 나오나 싶어 희희낙락하다가.
“이얏!!”
“윽!”
“미친…….”
“괴… 괴물이다!”
붉은 학살자까지 발동하고 달려오는 린의 대검에 잔혹하게 분쇄되고 말았다.
그리고 린은 그 대열을 그대로 가르고 곧장 상대 대장이 위치한 중앙으로 파고드는데.
놈들도 정신을 차리고 린을 막기 위해 달려들고는 있지만 불붙은 린나니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약해!!”
“으악!”
뒤쪽에서 전황을 주시하던 로빈은 린이 500명의 대열을 물살 가르듯 뚫고 들어가는 모습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로빈을 호위하는 듀발 역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고.
“역시 놈들이 저 끔찍한 마녀를 막는 건 무리군요. 큐브 클리어 이후에는 말도 안 나올 정도로 성장해 버린 마녀라…….”
“그러네, 네가 봐도 그렇지? 생각보다 빨리 끝나겠어. 나쁘지 않은데?”
린이 워낙 압도적인 무위를 보이는 바람에 생각보다 전투 시간이 길지 않을 거 같았다.
그리고 저런 상황이면 오히려 부상자나 사망자가 줄어든다. 저런 전투에서는 서로 비슷한 전력이 끝없이 소모전을 벌이는 게 최악이었으니 말이다.
[후작, 놈이 물었다.]
“네, 알겠습니다. 이쪽도 상황이 마무리되는 분위기네요. 영지 쪽도 정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놈을 잡겠다.]
황제와의 통신을 마무리 지은 로빈은 바로 영지로 연락해 침입해 온 놈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잡아넣으라고 명령했다.
* * *
그 시각 황궁.
예상치 못한 기사 대전이라는 이벤트에 기사들까지 일부 빠져나간 황궁은 평소보다 더 한적했다.
그리고 그 적막을 뚫고 십수 명의 복면인이 궁에 숨어들었다.
“목표는 다이앤 1황녀다. 2층 열두 번째 방. 황녀를 호위하던 전사들은 지금 전투 중, 기사들은 황후전에 몰려있으니 순찰만 피하면 무주공산이야.”
“황후도 처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좋겠지만 아마 불가능할 거야. 그리고 굳이 황후를 건드릴 이유도 없다. 1년 안에 황족이 태어난다고? 그 정도면 천지가 개벽할 수 있는 긴 시간이지. 그때까지 제국은 황족의 공백을 감당하지 못해. 제국은 그런 국가다.”
“네!”
“그깟 혈통에 좌지우지되는 게 무슨 제국이냐? 이런 제국은 사라져야 해. 오늘 모든 황족을 지우고,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가자!”
암살자들은 기척을 죽이고 다이앤의 처소까지 순식간에 당도했다. 이미 기사들의 순찰 루트까지 알아낸 상황이라 로랑의 말대로 거칠 것이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래도 너무 쉽잖아?”
“황제의 수족들이 굳이 황녀까지 보호할 이유는 없잖습니까? 황궁이라 안심하고 있는 것도 있고.”
“그건 그런데…….”
“대장,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서둘러 처리하고 빠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 네 말이 옳다. 화살은 시위를 떠났어.”
다시 마음을 다잡은 로랑은 바로 1황녀가 머무는 침소 문을 열고 책을 읽고 있는 금발 귀부인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검을 휘둘러 목표를 처리하려 했으나.
“챙!”
1황녀가 기다렸다는 듯 검을 빼들고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게 아닌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너, 황녀가 아니구나!”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나타난 기사들이 황녀의 처소를 포위하고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녀라고 생각했던 여성도 가발을 벗고 검을 바로 세우는데.
“…황제. 아이리스. 대체 이게…….”
다 죽어간다던 황제가 나타나고 1황녀로 위장하고 있던 인물이 여기사 아이리스라는 사실에 정신을 차릴 수 없던 로랑은 그저 멍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꼬리를 잡았구만, 로랑 매튜. 그 답답한 복면은 이제 벗지 그러나?”
황제는 득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이 작전을 세울 때 로빈이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폐하, 로랑은 분명 본인이 움직일 겁니다. 놈은 상인이지만 암살자이기도 하니,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놈이 암살자라고?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그냥 보면 압니다. 암살자는 일반인과 근육의 형태가 전혀 달라요. 푸시 캣츠의 그 레이디들처럼 말이죠.”
“…그렇구만.”
아무리 부황 폐하를 보호하기 위한 인원이라도 영지에 암살자를 밀어 넣었는데 아무런 반발조차 하지 않다니. 담이 큰 건지, 아니면 그만큼 자신을 믿는 건지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리고 로빈의 예상이 여지없이 맞아 들어가 큰 어려움 없이 현장에서 로랑을 포위할 수 있었다.
“…황제라고? 설마 위독한 척하고 있었던 건가? 대체 왜 그렇게까지…….”
“왜긴, 테러나 일삼는 조직이 뒤에 숨어있는데 어떻게 안심하고 제국을 경영할까. 네놈들이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이상 끝까지 쫓아가 뿌리 뽑을 것이다.”
“하, 설마 내 정체를 알고 있었나?”
“아아, 우리 쪽에 쓸데없이 보는 눈만 좋은 친구가 하나 있어서 말이야. 자네가 직접 들어올 거란 사실도 눈치채고 있었지.”
황제의 말에 할 말을 잃은 로랑은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이어지는 황제의 말을 듣고는 모든 일이 어그러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황제와 황실을 너무 무시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로랑, 아무리 내가 쓰러졌다지만, 황궁의 경계가 너무 쉽게 무너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건…….”
“네놈들도 참 그래. 예전 방법 그대로 하인을 포섭하다니. 우리를 그렇게까지 바보 취급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이…익.”
“아, 그리고 안심하게. 그레이츠로 넘어간 동료들도 곧 자네 곁으로 돌아올 거야. 예전에 동료가 그렇게 당했는데 또 그레이츠로 암살자를 보내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그게 무슨 말이냐?”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