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혹시나 해서 떠본 황제는 로랑의 반응에서 로빈이 짐작한 게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놈들 사이에 미묘한 벽이 있어 서로 교류가 없을 수도 있다는 예상 말이다.
“설마 했는데 진짜 모르고 있었군. 로빈의 말대로야. 예전에 그레이츠로 들어간 암살자가 어떻게 쫓겨났는지 넌 모르고 있었나? 그놈도 꽤 고생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클라운. 이 미친놈이.”
“이런 콩가루 조직이 제국을 위협하고 있었다니. 참 한심한 노릇이군. 자, 이제 담화는 끝이다. 로랑, 얌전히 항복하고 알고 있는 사실을 실토하면 곱게 죽여주겠다.”
“…이 와중에도 살려준다는 말은 없구나, 황제.”
“반역자를 살려줄 순 없지 않나. 네놈도 곱게 죽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래,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순 없지. 모두 황제를 쳐라!”
어차피 일은 그르쳤고, 자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잡혀가서 고초를 치르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낫다고 판단한 로랑과 암살자들은 모두 죽을 생각으로 황제에게 달려들었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 놈들을 잡아. 되도록 생포하라!”
로랑과 몇 수를 나눠 본 황제는 생각보다 뛰어난 그의 기량에 이채를 띠고 신중하게 놈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 정도 기량인데 반역이라니. 참 애석한 일이야. 황실에 충성했으면 좋은 동량이 되었을 터인데.”
“닥쳐라! 이 제국에서 첩년의 아들이 설 자리는 없어!”
“이상한 놈이군. 영지를 이어받지 못할 뿐, 서자라도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데 말이야. 평민도 아니고 귀족인 주제에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
“닥쳐!”
“하긴, 이제 와서는 다 의미 없는 일이지. 바로 끝을 내자!”
로랑이 제법 뛰어난 암살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황제를 당해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로랑은 몇 수를 더 나누기도 전에 검을 놓치고 기사들에게 포박되었는데.
“쿠… 쿨럭.”
“이런 제길, 독인가?”
“흐흐… 황제여……. 지금은 기고만장하겠지만… 어차피 넌 제국을 지키지 못해……. 아니, 네 가족… 백성들까지, 아무것도 지키지 못할 거다. 이미 맹독을 가득 품은 비수가……. 차라리… 황족이 모두 죽어 제국이 무너졌다면……. 백성이라도 살릴 수 있을 터인데……. 큭큭, 저승에서 너의 발버둥을……. 쿨럭!”
“이런, 미친…….”
몸 안에 퍼진 독을 어떻게 하기도 전에 저주를 퍼붓고 목숨을 끊은 로랑.
얼마나 지독한 놈을 삼켰는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제가 미처 나설 틈조차 없었다.
황제는 허탈한 표정으로 로랑의 시체를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그리고 기사들과 싸우던 로랑의 부하들도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래서야……. 얻은 게 없군.”
“주군, 그래도 황도에 숨어있던 쥐새끼들은 모조리 제거했습니다.”
“그래, 그걸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 * *
그렇게 황궁에서 로랑이 사망한 시각.
로빈은 황제가 연락하기도 전에 로랑의 사망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퀘스트가 그 즉시 사실을 알려주었으니까.
세상의 파멸과 제국의 멸망을 바라는 그림자를 처단하라.
[진행 상황]
???
???
???
암약하는 그림자 - 격살
익살스러운 그림자 - 조우
보상: ???
페널티: ???
기한: 세상의 멸망. 모든 그림자의 제거
“하, 역시 놈을 생포하는 건 무리였나?”
“영주님?”
“아니야. 황궁에서의 일이 그럭저럭 마무리된 거 같아서.”
[영주님, 놈들을 모두 잡았습니다. 하지만…….]
“생포하진 못했죠?”
[네, 모두 독을……. 순식간에 목숨을 끊어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럴 거예요. 수고하셨어요.”
아무래도 놈들을 생포하기 위해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모양이다.
대체 즉사하는 독을 품고 작전에 임하는 놈들은 무슨 생각으로 살아왔을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로빈의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놈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놈을 적어도 셋 이상 더 상대해야 했다.
“역시 황제한테 묻어가는 게 최고야. 이번에도 황제가 나서니까 어렵지 않게 한 놈 잡았잖아? 괜히 주인공이 아니지.”
최소한 놈들을 다 잡아서 평안을 찾을 때까지는 황제한테 딱 달라붙어야 할 거 같았다. 물론 받을 건 받고, 도울 것만 도우면서 그렇게 말이다.
“잡았다!!”
그리고 로빈이 영지와 연락하는 사이, 적진을 꿰뚫고 들어간 린이 기어코 히키시 백작을 잡아냈다.
“와, 얼굴에 멍 좀 봐.”
“저래도 되는 겁니까? 그래도 귀족인데…….”
“그렇긴 한데, 목숨은 건졌잖아. 원래 저기서 그냥 죽이기도 하거든.”
“…뭔가 수치스러울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죽는 거보단 낫겠군요.”
“그렇지.”
단순히 항복을 받아내는 거로는 도저히 마음에 안 차는지 히키시 백작을 적당히 두들겨준 린은 항복을 외치기도 전에 두들겨 맞고 기절한 백작을 질질 끌고 가 크레톤 공작이 자리 잡은 단상 앞에 떡하니 대령했다.
그레이츠의 전사들에게 기가 질린 백작 측 기사들은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고.
“에이! 린 단장.”
“난 여섯 놈 채웠어!”
“난 네 놈.”
“망했다, 세 놈이야.”
“이 새끼들이 후퇴하는 바람에…….”
처음 충돌로 상대를 기를 완전히 꺾어놔 린이 히키시 백작을 잡을 때까지 마음 놓고 적진을 헤집은 전사들은 예상보다 빨리 전투가 끝나버려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미친……. 저게 그레이츠.”
“북부의 사자, 정말 가공할 정도군.”
“저건 단순히 정예병이라고 정의할 수준이 아니야.”
그리고 구경하던 귀족들 역시 단순히 소문으로만 접하던 북부의 강군 그레이츠의 실체를 확인하고는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였으니 말이다.
“이제 최소한 이런 거로 까부는 놈들은 없겠지. 여기저기서 지원 요청이 오면 좀 귀찮겠지만…….”
흑웅의 말대로 힘을 보였으니 그레이츠를 무시하고 들어오는 놈들은 이제 없을 것이다.
다만 이제 황도에서도 그 위용을 자랑한 만큼 그에 따른 귀찮은 일들은 다 로빈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먼 길을 건너오고 말았다.
* * *
히키시 백작은 포박당한 상태로 황제에게 끌려가 반역죄를 선고받았다.
황제가 멀쩡하다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자신의 수족인 로랑이 궁에 숨어들어 1황녀를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란 히키시 백작.
그제야 자신이 완전히 속았다는 걸 깨달은 히키시 백작은 바로 황제에게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아무리 속았다 해도 로랑과 함께 황실의 전복을 꿈꾸던 히키시 백작을 용서할 황제가 아니었다.
만약 그 자신이 로랑의 암시로 그렇게 행동했다는 걸 히키시 백작이 알았다면 그 점을 어필해 황제에게 용서받을 수 있었을까? 물론 히키시 백작은 지금도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으니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히키시 백작은 사형을 당했지만, 가문의 이름만은 보존해 주는 조건으로 명부와 증언을 남겼고, 그와 연루된 많은 귀족 관료들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괜한 욕심으로 병력을 빌려줬다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은 꼴.
하지만 그들도 황제가 없는 틈에 뭔가 얻어보려 기웃거린데다 대역죄라는 서슬 퍼런 칼날이 자신을 노리고 있어서 순순히 관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황제는 귀족 관료들이 빠진 공백기에 평민 관료 육성을 위한 지원 정책, 그리고 황도 치안 유지를 위한 귀족세 인상 정책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만한 양아치 짓이었다.
“귀족들이 반발하지 않습니까? 세금을 그렇게 날치기로…….”
“그거야 당연하지 않은가. 적법한 절차로 통과한 법안이다. 귀족들은 당연히 법령에 따라 귀족세를 납부할 거야. 그게 귀족들의 당연한 의무요, 권리니까.”
“…그게 적법하다니 할 말이 없군요.”
황제의 당당하고 뻔뻔한 태도.
하지만 황제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귀족세를 올리자는 안건에는 모두가 반대했지만 어떻게든 법령을 반포하면 귀족들도 군말 없이 법령대로 세금을 납부하니 말이다.
이렇게 억지로 세금을 올려버리면 못 내겠다고 꼼수를 부리는 놈이 있을 법도 한데 항상 세금만은 꼬박꼬박 정확히 납부하는 게 이쪽 세계의 귀족이었다.
솔직히 로빈으로서는 아직도 이런 정서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 이제 후작이 대가를 받을 차례인가?”
“그렇죠. 기다리던 순간입니다.”
“내가 자네에게 황실에 충성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상을 내리지 않고 넘어가면…….”
“으흠…….”
“당연히 안 되겠지? 군주란 신상필벌이 분명해야 하니까.”
“흠흠. 뭐, 그렇죠. 제가 꼭 뭘 받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황제는 슬슬 간을 보며 장난을 치고 있었지만 로빈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뭘 뜯어가야 할지 고민하며 행복한 상상에 빠져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뜯어가야 해. 5만 골드? 아니면 10만 골드? 아니, 이건 너무 많은가?
로빈은 이번에 제대로 뜯어가서 자신의 협조를 구하면 제법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선례를 남기고 싶었다. 그래야 정말 중요한 순간에만 자신을 부르지 않겠는가.
물론 황제에게 협조할 생각이지만 사소한 일에 불려 다니는 건 너무 피곤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바쁘게 계산하고 있는데 황제는 시작부터 크게 질렀다. 로빈의 머릿속을 단번에 헝클어버리는 강력한 한 방이었다.
“뭐, 우선 금전적으로는 20만 골드를 지원해 줄 생각이네.”
…이 돈 많은 형님 보소.
정말 20만 골드라고?
20만 골드. 말이 20만 골드지, 세수가 제법 늘어난 그레이츠에게도 정말 큰 금액이었다.
사실 로빈은 지금까지 북부의 다른 영지들이 같이 부유해져야 변경백인 저에게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득을 최대한 골고루 분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황제가 느닷없이 20만 골드를 부르는 바람에 정신이 아득해진 로빈은 최대한 정신을 부여잡고 머리를 굴려 이득이 될 만한 다른 조건들을 빠르게 궁리해 냈다.
“음, 금전적으로는 충분한 대가라 만족스럽습니다, 폐하. 그리고 거기에 더해 황도의 마법 공학자들을 좀 파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대단한 거장이 아니라 기본적인 작업만 할 줄 아는 그런 하급 마법 공학자들도 환영입니다.”
“마법 공학자들이라……. 나도 그러고 싶은데, 불행히도 대부분 리아넨 쪽으로 넘어갔을 거야. 후작이 너무 늦은 거 같군.”
하, 리아넨. 내가 호랑이를 키웠군.
나와 동업하며 하급 마법 공학자들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낀 리아넨 공작이 미리 하급 마법 공학자를 쓸어가 버렸단다.
물론 우리 영지에도 예전에 데려간 하급 마법 공학자들이 제법 있지만, 그들은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가치가 배가되는 법이라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이미 늦었으니 다른 쪽을 알아봐야 할 거 같았다.
“그럼 혹시 큐브에서 나온 마법 물품 중 하나를 받을 수 있을까요? 블루 큐브를 모두 클리어하셨으니 뭔가 얻은 게 있으시겠죠?”
“음……. 그래?”
마음을 졸이며 조금 과한 조건을 제시했는데 잠시 고민하던 황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간이 확실히 이번에는 제대로 챙겨줄 생각인가 보다.
생각보다 귀한 걸 얻을 수 있을 거 같아 마음이 뿌듯하긴 하지만 저렇게 흔쾌히 넘겨주는 걸 보니 로빈은 뭔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황제가 껄끄러워하면서 내줘야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황제가 내온 마법 물품들이 로빈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제법 많은 물품이 있었다.
황제의 설명을 들어보니 단순히 블루 큐브뿐만 아니라 워낙 많은 큐브를 클리어하는 황제의 군대이다 보니 옐로우 큐브나, 심지어 그린 큐브에서 나온 마법 물품도 있단다.
그레이츠 영지에서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황도에서는 가끔 나온다니 로빈은 뭔가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많은 물품 중에 로빈의 눈에 딱 들어온 물건이 있었다.
[로쉬나의 방패] [랭크: A]
단 한 번, 치명적인 피해를 막아준다.
피해를 막은 후 로쉬나의 방패는 파괴된다.
한 번 치명적인 피해를 막아준다는 놀라운 물건. 이름은 방패지만 형태 자체는 반지라 착용하기도 수월해 높은 랭크에 어울리는 대단한 물건이었다.
이 물건을 보고 딱 떠오른 건 바로 린이었다.
그 녀석이 항상 터프하게 싸우는데다가 모든 전장에서 앞장서니 언제나 걱정이 많았는데 이게 있으면 앞으로도 안심할 수 있을 거 같아 이걸 골랐다.
물론 이 정도로 가치 있는 물건을 고르면 황제도 조금은 꺼릴 거 같아 고른 면도 있었지만 말이다.
“로쉬나의 방패라, 확실히 괜찮은 물건이지. 그걸로 되겠나?”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