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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273화 (273/303)

273화

…이 인간……. 배포 보소.

저런 물건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긴다고?

뭔가 지는 기분이라 다시 물건을 뒤적거리던 로빈은 묘한 물건을 발견했다.

그린 큐브를 공략하고 나온 물건이라는데 페널티가 있어서 다른 기사들이 사용하기 애매하다는 물건.

하지만 그 물건은 로빈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라실의 팔찌] [랭크 C]

착용자는 항상 큐브 내부에 있는 것과 같은 상태를 유지한다.

단, 마나를 사용 시 그 사용량이 늘어난다.

페널티가 있지만, 로빈에게 딱 필요한 그런 물건이었다.

“그건 라실의 팔찌 아닌가? 별로 좋은 물건은 아닌데…….”

“그렇습니까?”

“처음에는 큐브 밖에서도 액티브 스킬을 쓸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라 제법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페널티가 너무 심해. 스킬을 한 번 사용하고 나면 마나가 완전히 고갈되더군. 그것뿐만이 아니야. 스킬을 안 써도 마나가 조금씩 줄어드니, 득은 없고 실만 있는 꼴이지.”

“흠.”

황제의 설명에도 로빈의 생각은 변함없었다. 어차피 저가 스킬을 쓸 것도 아니고 실비아가 만든 물약이 효과를 발휘하기만 하면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마나가 줄어드는 건 물론 치명적인 페널티지만 그게 아니라도 로빈이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차피 전투 조루였기 때문에 마나가 줄어들어도 크게 타격이 없다고 할까?

다른 건 몰라도 어릴 때 마나를 느낀 덕인지 마나량만은 준수했기 때문에 약효가 끝날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 같았다.

“이걸로 하죠.”

“음… 그래? 알았네. 후작이 필요하다면 가져가게나.”

“그리고 다이앤의 물건 정도나 챙겨가겠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다이앤이 예전에 쓰던 물건을 따로 보관해 주셨더군요.”

“아아, 그거 말이군. 좋네. 원하는 만큼 챙겨가게나.”

이렇게 아이템 두 가지와 20만 골드를 챙긴 로빈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제 빈약한 발상으로는 배포가 큰 저 황제 형님의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관계가 파탄 날 정도로 과한 걸 요구하면 불가능은 아니지만,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래도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많은 걸 챙겨 제법 흡족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로빈이 무엇을 받아갈지 확정 짓자 황제는 로랑이 죽을 때 퍼부은 꺼림칙한 이야기를 꺼냈다. 놈들이 그레이츠 쪽에서도 몇몇 문제를 일으켰으니 로빈도 그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음……. 찜찜하긴 하군요. 거의 저주에 가깝지 않습니까?”

“그렇지. 솔직히 저것보다 더 심한 저주도 많이 들어봤지만, 녀석의 말에는 뭔가 묘한 구석이 있더군. 단순한 저주가 아닌 느낌? 녀석은 확실히 뭔가를 더 아는 분위기였어.”

“확실히 그렇네요.”

죽으면서 굳이 저런 정보를 전해주다니.

정말 참된 악당의 자세였다.

그리고 대부분 저런 정보를 허투루 여긴 주인공은 어떻게든 곤란을 겪곤 한다.

‘단순한 저주겠지’ ‘적이 남긴 말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그냥 넘어가는 건 그야말로 패망의 지름길.

적이 남긴 말일수록 더 신중하게 기억하고 되새길 필요가 있었다.

“놈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처럼 보이지만 뭔가 하고 있는 건 확실한가 봅니다. 아니면 놈이 그렇게 자신만만해하진 않겠죠.”

“그렇군. 경계를 늦출 수 없겠어.”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 맹독을 가득 품은 비수가… 하고 뒤에 말을 끊어버린 건데…….”

“원래 비수는 암살이나 배신을 표현하는 단어지. 하지만 딱히 날 배신할 만한 사람은 없거든. 배신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주려면 내 최측근이라는 건데, 내 측근들은 날 배신할 수 없는 자들만 남았다네.”

“그런가요?”

황제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측근이라 봤자 여기사 아이리스, 젝트, 조단, 그리고 황후 정도였다.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로빈 정도.

아이리스와 황후는 황제의 부인으로 황제와는 운명 공동체였다.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황제가 없으면 죽고 못 살 여인들이고.

그리고 아이리스는 소설에서 황제를 대신해 목숨을 버린 인물이기도 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배신 가능성은 제로.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참모인 젝트와 조단인데, 조단은 소설 속 황제의 1회 차 때 황제를 위해 목숨 바쳐 3황자에게 대항했고, 2회 차 때도 끝까지 황제에게만 충성하는 충신으로 나온다.

물론 현실이 소설의 내용과 많이 달라졌지만, 사람의 성격은 소설이든 현실이든 그리 큰 차이가 없었으니 아마 조단도 황제를 배신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남은 건 젝트.

소설 속에서는 리아넨 쪽에 붙어 황제와 적대하는 인물이고 황제파 귀족 중 하나에게 큰 원한을 가진 게 젝트이니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이쪽이었다.

“젝트는요? 혹시 귀족이나 그런 쪽에 원한이 있든지 그러진 않나요? 이상하게 재능 있는 평민들은 귀족에게 원한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고요.”

“젝트? 오호, 그건 또 어떻게 알았나? 하여간 자네는 이상한 곳에서 예리하군. 맞아, 젝트는 귀족에게 유감이 많았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미 원수는 갚았거든. 직접 원수를 갚아준 당사자가 그런 말을 하니 이것도 참 묘한 기분이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원수를 갚아줬다고? 혹시 히키시 백작인가?

“예전에 조셉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워프 게이트를 지키던 기사, 기억나나? 자카 자작가의…….”

“네, 이름까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되다 만 마스터 녀석이 하나 있었죠. 이름만 거창한 제국 8검. 이제 그것도 좀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히 촌스럽기만 하고 별 의미도 없어 보이는데요.”

“하하, 그래. 그건 좀 생각해 보지. 분위기가 좀 풀리면 제국 무술 대회라도 열어볼 생각이니까. 하여간, 그때 자네를 막다가 죽은 그 기사가 젝트의 원수라네. 자카 자작의 동생, 베레스 자카.”

“아, 그래요? 일이 또 그렇게 됐네요. 그때 자카 자작가는 완전히 멸문해 버렸으니…….”

어쩐지 이제 공작위를 이어받을 젝트가 변함없이 내게 깍듯하더라니.

그런 일이 있었군.

어쨌든 이로써 그나마 남은 가능성마저 사라졌다. 이미 원수를 갚고 홀가분하게 황제를 따르는 전도유망한 젝트가 굳이 황제를 배신할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젝트는 혈연조차 하나 남지 않은 홑몸이었다. 황제가 자신하는 것도 그런 계산까지 모두 끝났기 때문이리라.

“아무래도 배신이나 그런 건 아닌 모양이네요. 사실 배신이나 그런 것만 아니라면 그럭저럭 대처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어쨌든 놈들이 아직 건재한 모양이니 좀 더 주의해야겠어. 후작도 방심하지 말라고 이렇게 전해주는 걸세.”

“네, 폐하. 저도 조심하겠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궁리해 봐도 딱히 짚이는 게 없어 결국 최대한 조심하기로 하고 황제와의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제 황도에서 내가 할 일은 모두 마쳤으니 돈을 챙겨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레드 큐브도 레벨업한 황제가 알아서 다 처리할 테니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었고.

나는 오히려 북부 근처에 새로 생길 다른 큐브를 신경 쓰는 게 순리에 맞았으니 말이다.

* * *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오오, 이런 속옷도 있었어? 이야~ 앤… 아주 제법이야~”

“맞다. 로빈이 은근히 이런 스타일 좋아했죠? 구멍 많은 거. 헤헤. 그럼 오늘 저녁은 이걸로?”

“콜~”

다이앤의 짐을 챙기다 서랍에서 튀어나온 승부 속옷을 보고 키득거리던 로빈은 문득 고개를 돌리다 창밖으로 보이는 넓은 정원 가운데 자리 잡은 검은색 늑대 조각상을 발견했다.

“설마 저게 라이칸 2세야?”

“네, 맞아요. 귀엽죠?”

“음……. 저건 귀엽다기보다는…….”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다이앤이 설명했던 강아지 조각상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늠름한 늑대 조각상이었다. 저걸 보고 칸을 떠올리는 건 도저히 무리일 정도로 큰 갭이 존재했고.

그러고 보니 이 여자가 말했던 그 라이칸 1세도 제법 늠름했던 거 같은데.

아무래도 자신의 여자는 갯과 동물은 모두 귀엽다고만 생각하는 특이한 취향의 소유자인 모양이다. 어쩌면 그녀가 나의 또 다른 여자인 실비아와 린과 사이좋게 잘 지내는 것도 그런 영향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이제 라이칸 2세를 다시 볼 일은 없겠네요.”

“서운해?”

“네, 아무래도 좀 그래요.”

“음……. 그럼, 아예 가져갈까?”

조각상이라.

분명 황제가 다이앤의 물건은 다 가져가도 된다고 했으니, 저것도 괜찮겠지?

황제가 직접 다이앤의 물건은 모두 가져가라고 허락한 만큼 그리 크지 않은 저 조각상을 챙겨가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닌 거 같아 전사들에게 조각상을 챙기라고 지시했다. 작지만 조각상이라 무게는 제법 되지만 저 정도는 전사들에게 큰 짐도 아니었다.

“정말이요? 로빈, 사랑해요!”

게다가 저렇게 다이앤이 좋아하니 그 정도 수고쯤이야.

전사들도 활짝 웃는 다이앤의 모습이 기분 좋은지 고개를 끄덕이며 조각상을 마차에 실었다.

그렇게 로빈이 영지로 떠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황후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던 황제는 정원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늑대 조각상이 없어진 걸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여기 분명 조각상이 있었거늘.”

“아, 그거요? 그레이츠 후작이 가져갔어요. 시종장이 보고하길, 페리안도 허락했다고 하던데요.”

“…뭐? 내가? 그럴 리가 있나. 그 녀석은 분명 다이앤의 물건을 챙겨가겠다고 했는데.”

“다이앤이 그 조각상을 꽤 아꼈다고 해요. 그래서 가져간 게 아닐까요?”

“맞아, 제법 아끼긴 했지. 그래도 그렇지, 그걸 가져가다니…….”

“귀한 건가요?”

“하, 귀한 건 둘째 치고 다시 구할 수도 없는 물건이야. 니아(레니아의 애칭)도 알 거야. 조각가 리파엔리라고…….”

“네, 기억나요. 아직까지 그 아성을 넘어서는 조각가가 없잖아요? 무려 300년 전 사람인데도요.”

“맞아. 그 리파엔리의 작품이야.”

“대단한 물건이긴 하네요. 하지만 리파엔리는 작품 활동을 많이 해서 대체품을 충분히 구할 수 있잖아요? 물론 조금 비싸긴 하겠지만요.”

황후의 지적에 황제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쉴 뿐이었다.

“물론 리파엔리의 조각을 구하려면 구할 수는 있겠지. 문제는 조각의 재질. 작품을 크게 만드는 리파엔리가 그런 작은 조각상을 만든 건 리파엔리조차 많은 재료를 구하지 못해서였어. 조각상의 재질이 흑옥석이거든. 그 단단한 흑옥석으로 조각이라니. 정말 혼이 담긴 작품이었지.”

워낙 단단해 채취가 어려워 가격도 거의 보석에 가까운 흑옥석.

그 조각상이 흑옥석으로 만든 것이라는 이야기에 황후의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도대체 그런 귀한 조각상이 왜 정원 한가운데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맙소사, 그래요? 그런데 왜 그런 귀한 게 정원 한가운데…….”

“다른 조각상과 같이 두기에는 그 녀석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신 거야. 그래서 부황 폐하께서 따로 빼놓으셨지. 흑옥석이라 마모되지도 않으니까.”

“아~”

“부황 폐하께서 종종 여기로 오셔서 그 조각상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곤 하셨지. 다이앤이 그 조각상을 아끼게 된 것도, 사실 부황 폐하께서 이곳에 자주 들르셔서였어.”

“그럼 가치도 대단하겠는데요.”

“어, 부르는 게 값이겠지만……. 굳이 가격을 매긴다면… 100만 골드 정도? 어쩐지 그 녀석이 그렇게 군말 없이 물러간다 했더니…….”

“이제 와서 다시 가져오라는 건 무리겠죠?”

“아무래도 그렇군. 뭐든 들어주겠다고 내가 말한 것도 있으니…….”

“그럼 그냥 아버님께 드렸다고 생각하세요. 후작이 그걸 팔아먹진 않을 거 아니에요?”

“녀석이라면 그럴지도? 아니지, 다이앤이 그 조각상을 아끼니 그래도 팔아먹진 않겠군. 하, 괘씸한 녀석.”

황제는 조각상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이 있어 뭐라고 따질 수도 없었으니 울분만 쌓일 뿐이었다.

그렇게 황제는 언젠가는 반드시 100만 골드짜리 일을 로빈에게 맡기고 말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 * *

영지로 돌아와 짐을 푼 로빈은 자신의 집 정원 가운데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라이칸 2세를 가져다놓았다.

만약 저 조각상의 가치를 알았으면 집안에 신줏단지 모시듯 모셔놓겠지만, 조각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로빈은 그 가치를 전혀 몰랐다. 그저 잘 만든 검은 조각상이거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머~ 늠름한 조각상이네~”

“오, 황도에서 사온 선물이냐? 확실히 보기는 좋구나.”

“음……. 에이, 설마…….”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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