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그렇게 가족들이 조각상이 멋지다고 감탄을 터트릴 때 아버지 윌리엄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자신도 조각을 공부하기 위해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다 알게 된 거장 리파엔리의 역작 「역동적인 검은 늑대」와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윌리엄은 그저 짝퉁이겠거니 생각하며 가볍게 넘어갔다. 그래도 제법 잘 만든 모조품이라고 감탄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100만 골드짜리 조각상을 강탈한 로빈은 여장을 풀고 바로 관저로 출발했다. 영지가 안전하다는 사실은 미리 들어 알고 있지만, 정확한 경위를 확인하고 앞으로의 일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대수림과 마수 산맥의 움직임도 따로 보고받아야 하니 제법 일이 많았다.
로빈이 온다는 이야기를 미리 전달해서인지 회의실에는 영지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특히 백랑과 제필의 표정이 아주 밝았는데 놈들을 모조리 처리한 것이 매우 흡족해서 그런 거 같았다.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이번에 침입한 놈들을 깔끔하게 처리했다죠?”
“하하, 영주님. 예전에는 놈을 놓치는 바람에 껄끄러웠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한 번에 해치웠지 뭐야. 놈들이 또 연막탄을 터트릴 거 같아서 미리 대비한 게 주효했다니까?”
“오, 그래요? 어떻게 했는데요?”
예전에 클라운을 상대할 때는 연막탄에 고전했던 영지 치안대.
이번에는 놈들이 그런 걸 사용할 걸 대비해 흡연통이란 걸 만들어갔단다.
얼핏 들으면 담배가 생각나지만 이건 이름대로 연기를 흡수하는 그런 장치였다. 원래 용도는 아궁이 위에 설치해 연기를 빨아들이는, 저쪽 세상 물건으로 따지면 주방 기구 ‘후드’ 같은 마법 기구인데, 그걸 작게 개량해 들고 간 거였다.
크기는 작게, 그리고 순간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히센이 제법 고생하긴 했지만 히센 역시 영지를 헤집고 간 놈에게는 나름 유감이 많아 비슷한 놈들을 잡는다는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한다.
제법 정교하고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옆에서 실비아나 도리아 여사, 그리고 마법 공학자들까지 나서서 도운 건 당연한 일이었고.
“와, 그런 걸 만들었어요?”
“하하, 놈들의 당황하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해. 연막탄이 터지자마자 1초도 안 돼서 연기가 다 사라지니 어쩔 줄 몰라 하더라고.”
백랑의 말을 들으니 딱 그 모습이 상상이 가 로빈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 앞으로는 연막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응, 영주님. 이게 실비아 부인이 낸 의견이거든. 꼭 상을 주라고, 그렇게 말해달라던데.”
“…그래요?”
물건을 만든 건 히센이지만 그걸 만들자고 의견을 낸 건 실비아인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백랑에게 그 공을 어필해 달라고 한 실비아도 참 어지간하다. 그걸 그대로 정확히 전달한 백랑 역시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 도망치는 걸 봉쇄할 수 있다니, 적어도 클라운 같은 놈이 몰래 숨어든다면 무조건 잡을 수 있다는 의미였기에 로빈도 아주 흡족했다.
의견을 낸 실비아는 물론 히센과 도리아, 그리고 마법 공학자들에게도 뭔가 큰 상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치안대의 공도 컸습니다. 폐하께서 쓰러지신데다 영주님이 자리를 비워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켰으니까요. 그들에게도 따로 치하의 말씀을 전하시는 게 어떨는지요. 영주님의 따듯한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겁니다.”
감탄하고 있는 로빈에게 조심스레 조언하는 루이.
로빈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공을 인정했다.
“확실히 그렇네요. 놈들의 이상 행동을 발견해 보고한 병사와 놈들을 감시한 병사들에게는 상금을 내리고, 다른 치안대원들을 위해서는 따로 음식이라도 내려야겠어요.”
“네, 영주님. 지시대로 이행하겠습니다.”
그 밖에 소소한 이야기들이 넘쳐 났다. 푸시 캣츠의 아가씨들이 장인어른을 밀착 호위한 이야기부터 사건 당일 신전의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며 진땀을 뺀 이야기까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푸시 캣츠의 에이스 레이카가 신전에 침입한 놈들의 거기를 무참히 도륙했다는 이야기였다.
“레이카만 부르짖던 놈들이 푸시 캣츠에 발길을 딱 끊었지. 하긴 나라도 거시기가 오그라들 거 같은데… 놈들이야, 뭐…….”
“그 전사들도 이제 정 붙일 곳을 찾아야죠.”
레이카를 부르짖던 푸시 캣츠의 단골들이 그런 끔찍한 장면을 봤다니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말로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는 그런 이야기였으니 그 충격이 제법 대단했을 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사라면 떠받들어줄 모야족 처녀들이 아직도 산더미같이 남아있는데 대체 왜 이상한 데서 헛심을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 기회에 적당한 짝을 만나 제대로 정착했으면 하는 게 로빈의 작은 바람이었다.
“자, 좋아요. 그 이야기는 이제 거기까지 하고요. 그 일 외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나요?”
“네, 올겨울은 이상하게 마수들이 더 잠잠하군요. 작년에 워낙 활동이 적어 저점을 찍었으니 올해가 범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더 낮은 저점이 있었던 거죠. 아마 범람은 내년인 듯하네요.”
마수 범람 시즌이 다가오면 한두 해 정도 마수들의 습격이 뜸해지는 시기가 찾아온다.
작년에 마수들의 움직임이 그리 많지 않아 그런 시기가 왔다고 단정 짓고 올해 마수들이 범람할 거라 생각했던 건데, 역시 황제의 말대로 범람은 내년인 모양이다.
물론 황제가 그리 말한 이상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을 수도 있어 방비를 늦추지는 않았는데, 상황이 이러니 계획을 좀 수정해야 할 거 같았다.
“좋아요. 큐브는요?”
“큐브 쪽도 양호합니다. 다만 큐브 내 적들의 수준은 조금씩 올라가는 느낌입니다. 아직 정확한 통계가 나온 건 아니지만…….”
“그래요. 마수들이 조용하니, 다른 북방의 영지들도 문제는 없겠네요?”
“네, 다들 앞으로도 올해 겨울만 같았으면 좋다고 하는군요.”
“그러게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현 상황에 대한 보고가 마무리되고 이제 앞으로의 일을 논의할 차례.
로빈은 내년 있을 마수 범람을 대비해 클리너들의 교육에 더 집중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그들을 따로 훈련하며, 그와 동시에 더 늦기 전에 좀 더 많은 영지민을 2차 각성시키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 문제는 예전에도 한 번 논의한 적이 있었기에 이견이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가 썩 개운하지 않아요. 그래서 말인데, 이 기회에 영지의 모든 건물에 강화 마법진을 새겨 넣으면 어떨까요? 폐하께 제법 목돈은 얻어와서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예요.”
“…뭐? 영주, 제정신인가? 얼마나 많은 돈이 들지 상상도 안 되는 일을…….”
“그건…….”
“굳이 그렇게까지.”
여기서 말하는 강화 마법진은 예전에 실비아가 공장에 새겨 넣은 그 마법진을 말하며, 남쪽 요새나 북부 관문에 새겨져 있어 마수들의 공격을 수월하게 막을 수 있게 도와주는 그 마법진이었다.
“마수 범람은 솔직히 관문에서 틀어막으면 병사들이나 고생할 뿐, 영지민들에게까지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죠. 하지만 큐브 폭발은 좀 다르잖아요? 물론 모든 영지민과 치안대가 한뜻으로 외부인의 전횡을 경계하고 있지만 한 번 터지면 치명적인 피해를 본다는 부분이 좀 걸려요. 사실…….”
그리고 뒤이어 황제에게 들은 놈의 마지막 한마디를 전하자 사람들도 침을 삼키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봤는데요. 지금 영지 차원에서 가장 성가신 일은 어쨌든 큐브 폭발에 관련된 것들이더라고요. 뭔가 수를 쓰면 역시 그쪽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가 아무리 잘 싸워도 마을이 상하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든 집에 강화 마법진을 새겼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자명했다.
웬만한 큐브가 폭발했을 때 집 안으로만 대피해도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 부득이한 상황에서 큐브가 폭발해도 그걸 수습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거다.
물론 오우거나 트롤처럼 수준 높은 큐브가 폭발한다면 강화 마법진을 새겨 놓는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지만, 오히려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큐브들은 따로 신경 써서 관리하는데다가 대부분 전사들이 나서서 클리어하기 때문에 차라리 더 안전한 것이다.
“고급 큐브들에 대한 방비는 더욱 강화하고, 하급 큐브들은 터져도 영지에 큰 피해가 없다면 우리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분명 일리 있는 말씀이시지만, 그런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지가 고민이군요.”
“그렇죠? 우선 이번에 폐하께 받아온 것이 20만 골드예요. 지금 저희 재정 상태는 어때요?”
“여유 자금은 10만 골드 정도군요. 쥐어짜면 좀 더 나오긴 하겠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영지를 한꺼번에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히센 님, 히센 님은 견적을 좀 뽑아보죠. 돈이 얼마나 들까요?”
“…허, 나 원 참. 세상에, 영지를 강화 마법진으로 도배하려는 영주가 있다니…….”
로빈의 말에도 입을 다물지 못하는 히센.
히센이 말을 잇지 못하자 로빈은 다시 한 번 계산부터 해달라고 보챘다.
“기막혀하지만 마시고, 견적부터 좀 가요. 그래야 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잖아요.”
“끙, 그래. 어디 보자……. 이건 뭐, 견적도 안 나오는구나. 집의 상태부터, 벽의 재질에 따라 들어가는 마나석의 양이 달라서 금액도 달라져. 나중에 집이라도 수리한다면 그건 또 어떻고. 그런데 그걸 나보고 계산하라고 하면…….”
확실히 히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변수가 한두 가지도 아닌데 미리부터 계산하는 건 사실상 무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로빈이 아니었다.
“그런가요? 그럼 우선 지금 가진 돈으로 영주 성부터 시작해요. 한번 해보면 견적이 나오겠죠.”
“…무조건 할 생각이군, 영주.”
“네, 무조건 할 생각이에요.”
우선 큐브가 하나라도 폭발할까 봐 불안감을 안고 사는 건 나부터가 너무 지친다. 상급 큐브 수십 개라면 그래도 허용 범위지만, 수백 개에 달하는 하급 큐브까지 그래야 한다니.
이대로는 제명대로도 못 살 거 같았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무슨 문제라도 생겨 마을 하나가 쑥대밭이 되면 인구수가 적은 그레이츠로서는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내가 황도에서 힘을 보인 이상, 지금보다 더 많은 요청이 들어올 것이고, 그중에는 거절하기 힘든 요청도 제법 섞여있을 거다.
지금까지는 황제 정도만 우리 측 전력을 대충 짐작할 뿐이었는데, 이젠 모든 귀족이 확인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종종 내가 영지를 비울 경우를 생각해도 후방이 튼튼한 게 더 안심된다.
가족과 내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주변 사람들.
지금까지 그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살아왔고, 그 마음이 결국 영지까지 확대되어 영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건데, 만에 하나라도 내가 없는 사이 엉뚱한 사고로 영지가 망가지면 내 마음도 꺾일 거 같았다.
“저도 무작정 결정한 건 아니에요. 강화 마법진에서 가장 많은 돈이 들어가는 부분은 역시 마나석이죠. 그리고 마법 공학자. 우리 영지에 마법 공학자의 수가 그리 많은 건 아니지만, 계신 분들은 다 출중한 분들이에요.”
“그건 그렇지.”
뻔뻔하게도 자신의 출중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히센.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로빈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문제는 마나석인데, 아시다시피 마나석의 가격은 계속 내려가는 추세예요. 지금이야 많은 물자를 황실이 독점하고 있어 그 하락 폭이 그리 크지 않은데, 이제 점점 더 싸질 거예요. 황실도 언제까지 물자를 독점할 생각은 없거든요? 이번 레드 큐브 공략이 모두 마무리되면 조금씩 정책을 바꿀 가능성이 크죠.”
“마나석 가격이 폭락하면 확실히 비용이 줄어들지. 마법진을 새기는 것뿐만 아니라 몇 년에 한 번씩 관리하는 것도 문제였는데, 마나석 가격만 내려가면…….”
“네, 저희가 충분히 유지할 수 있겠죠.”
로빈의 설명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게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한 거 같았다.
“확실히 가능하기만 하면 나쁠 게 없지. 솔직히 쫄리는 건 사실이거든. 게다가 앞으로 큐브가 더 늘어난다며? 언제, 어떤 변수가 끼어들 지 알 수도 없잖아?”
“사실 지금도 어디서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노심초사입니다. 만약 하급 큐브만이라도 안전이 담보된다면…….”
너무 많은 돈이 드는 무식한 방법이라 떠올리지 못했을 뿐, 그게 가능하다는 걸 깨닫자 생각보다 괜찮은 방법이라고 느꼈는지 영지를 지키는 무장들 사이에서는 긍정적인 기류가 퍼져 나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