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영주님의 뜻이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영지 재정을 총괄하는 지온까지 받아들인 이상, 영지 자체에 강화 마법진을 새겨 넣겠다는 로빈의 간 큰 의견은 그대로 실행될 가능성이 컸다. 물론 그 기간 제법 허리띠를 졸라매야겠지만 차후의 상황들이 로빈의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생각보다 수월할 수도 있었다.
“좋아요. 그럼 앞으로 우리 영지는 클리너를 확실히 훈련해 병력 운용의 안정성을 높이고, 영지 방어 체제를 굳히는 쪽으로 나아갈 거예요. 내년에 있을 마수 범람까지 체제를 완비하자고요.”
로빈의 선언과 함께 영지는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정기, 해갈기】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고, 어느덧 1년 하고도 몇 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그 시간은 모두가 큐브에 익숙해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알 수 없는 현상에 당황하던 사람들도 큐브가 탄생하고 3년 차에 접어들자 생활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익숙해졌다고 사건, 사고 자체가 없을 순 없었다. 지금도 제국 어딘가에서는 큐브가 터지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으니까.
물론 큐브가 터졌을 때 대처하는 방법이나 수습하는 방법 역시 더욱 정교해져 피해는 전체적으로 줄어들었지만 모든 사고를 막아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도 익숙해진 만큼 사고의 빈도수 역시 점점 줄어 들어갔다.
그렇다고 마냥 큐브에 순응하며 그렇게 무기력하게 살아온 것만은 아니었다. 황실을 주축으로 한 많은 학자가 큐브에 대하여 심도 있게 연구하며 많은 걸 알아냈다.
그중 가장 큰 쾌거는 큐브 발생 속도와 하늘에 떠있는 정체불명의 구체 간의 상관관계를 밝혀낸 것이었다.
낮이든 밤이든, 항상 같은 자리에서 지상을 굽어보는 정체불명의 구체.
이제는 큐브 문이라고 명명된 이 구체는 큐브가 생성되는 속도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처음에 반절 정도가 검게 물들어 있던 이 구체가 점점 검게 변할수록 큐브 생성 속도가 빨라지고, 검은 부분이 조금씩 줄어들수록 큐브가 느리게 생성된다는 것.
이 사실을 알아낸 건 황실의 천문학자들과 고문 해석학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내는 데 큰 공헌을 한 게 바로 로빈이 레드 큐브에서 얻었던 문구였는데, 과거부터 내려오던 각종 예언이나 고문에 기록된 표현의 실질적인 의미를 분석해 그 문구에 적용한 후, 각 단어의 의미를 유추한 것이다.
그리고 천문학자들은 그들이 분석한 단어를 토대로 실질적으로 전국적으로 생성되는 큐브의 수와 큐브 문의 형태를 관찰해 유의미한 결과물을 도출해 냈는데, 덕분에 하늘 위에 떠있는 저 이상한 구체가 결국 현 상황에 대한 성적표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난이도 높은 큐브를 클리어할수록 큐브 문의 검은 부분이 줄어든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사례로 확인된 바 있어 확실한 진리로 자리매김했고, 사람들이 슬픔과 고통으로 시름겨워 할수록 점점 검은 부분이 늘어날 거라는 것이 학계의 예측이었는데, 그 부분은 아직 확인되지 않아 미완의 명제로 남았다.
사람들이 큐브에 적응하고, 귀족들의 대처가 기민해진 시기부터 큐브 물자를 독점하던 황제의 정책 역시 변화했다. 법령상으론 5년으로 정해놨지만, 시스템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사실상 1년 만에 독점 거래를 포기하고 물자 거래를 자율에 맡긴 것이다.
그 덕분에 큐브 물자를 구입하기 위한 상단 간의 경쟁이 심화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가장 우위에 서있는 건 역시 황실에서 운영하는 제국 은행이었다.
자본력 자체도 웬만한 상단과는 상대도 안 되는데다가 황도에서 교육받은 클리너들은 대부분 제국 은행에 물건을 팔았기 때문이다.
라이선스를 발급해 준 황실에 대한 의리도 있고, 1년간 제국 은행에 팔아온 습관도 무시 못 하는데다, 사가는 가격 역시 다른 상단과 비슷하니 가장 믿을 수 있는 제국 은행을 이용하는 것이다.
물론 제국 어느 곳을 가도 제국 은행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큰 매력 포인트였지만 말이다.
황제는 물자 독점을 포기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큐브에 대한 제한 역시 점차 줄여 나갔다.
황실에서 독점적으로 처리하던 블루 큐브를 귀족들에게 맡기기 시작한 건데, 큐브를 통해 지방 영지의 기사들 역시 어느 정도 실력이 향상되었기에 시류에 따라 귀족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물론 전적으로 재량에 맡긴 건 아니고 큐브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 시험이 제법 까다로운지 아직까지 블루 큐브를 폭발시키며 문제를 일으킨 귀족은 없었다.
그렇게 블루 큐브까지 양보한 황제였지만 레드 큐브까지 귀족들에게 맡기진 못했다. 황제가 일부러 독점하는 건 아니고 레드 큐브를 클리어할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시험을 통과한 파티가 아직 없어서였다.
한 번 터지면 제국 규모의 재앙이 일어날 게 분명한 레드 큐브였기에 그 테스트 역시 까다롭기 그지없었는데, 최소한 블루 큐브를 클리어한 파티 중에 도전자가 생기면 황제가 직접 테스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제한에서 자유로운 건 이미 레드 큐브를 클리어한 그레이츠뿐이었다.
또한 황제가 블루 큐브를 지방 영지에 위임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큐브의 생성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갑자기 늘어난 큐브는 지방 영주의 사병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고, 그때부터 각 영주는 많은 큐브를 민간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급 큐브를 민간에 돌리며 클리너들의 활동이 왕성해졌고, 클리너를 지원하는 인원들은 지금도 늘어나고 있었다.
중, 상급 큐브는 영지의 기사들이나 사병들이 처리하고, 중, 하급 큐브는 클리너에게 맡긴다.
이렇게 정형화되기 시작한 시스템은 아마 당분간 계속 이어질 듯 보였다.
그렇게 큐브가 폭발적으로 생성되면서 자연스럽게 큐브에서 흔히 얻을 수 있는 마나석의 물량 역시 점차 늘어났다. 그렇게 늘어난 물량이 황제의 정책 변화로 민간에 풀리기 시작하며 제국민의 생활 역시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가장 쉽게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역시 마법 물품이 빠르게 늘어가는 거였다.
귀족가 혹은 마을의 보관 창고 정도로만 사용되던 냉장창고는 각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게 소형화되어 보급되기 시작했고, 온수를 뿜어내는 마법 장치, 냉난방 장치 등 실생활에 유용하지만 주로 귀족들이나 돈 많은 상인 정도만 누리던 많은 마법 물품들이 평민들에게도 널리 판매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이제 시작일 뿐, 지금도 도처에서 다양한 물건이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수많은 마법 공학자를 선점한 리아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 동안 그레이츠 역시 많은 일을 겪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로빈이 선언했던 대로 영지 전체를 강화 마법진으로 요새화한 것.
그에 소모된 비용은 대략 60만 골드 정도였는데, 영지민의 수가 많지 않은 그레이츠였기에 이 정도지, 만약 황도였으면 수백만 골드가 들어도 모자랄 큰 공사였다.
처음 영주 성을 강화 마법진으로 강화하자 로빈이 준비했던 20만 골드가 모조리 사용되었다.
만약 앞으로도 이 정도 비용이 든다면 영지를 모두 강화하면 100만 골드는 족히 든다는 결론이 나 이 공사를 계속할 것인지에 대하여 회의가 연일 이어졌고, 너무 큰 비용이 드는 바람에 로빈 역시 그 뜻을 꺾을 뻔했었다.
하지만 일이 공교롭게 되려는지, 그 무렵 영주 성에서 큐브 하나가 폭발하고 말았다.
평범한 하급 큐브인 G-C급 큐브에서 맹독 다트를 사용하는 고블린이 나타나 해독제를 준비하지 못한 클리너들이 전멸당한 것이다.
가격이 비싼 해독제는 옐로우 큐브를 클리어할 때만 필수적으로 챙기곤 했는데 그린 큐브에서 독을 사용하는 몬스터가 등장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 변고가 있었지만, 큐브 폭발과 동시에 집으로 숨어든 주민들은 큰 상처 없이 목숨을 구했고, 그 실효성을 몸소 느낀 로빈과 영지의 주요 인물들 모두가 강화 마법진 설치를 서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어떤 소설을 봐도 방어율 100%인 시스템은 없었다니까. 무슨 변수가 생겨도 생길 수밖에 없지. 이건 무조건 해야 하는 거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는 아무리 돈이 모자라도 꿋꿋이 영지를 강화해 나갔다.
물론 그 많은 돈을 구하기 위한 로빈의 마음고생 역시 만만치 않았다. 레드 큐브가 다시 생겨났을 때는 황제에게 용병을 자처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황제 역시 무슨 생각인지 로빈을 줄기차게 이용해 먹었다.
처음에는 황제의 뜻대로 큐브를 클리어하던 로빈도 그런 일이 몇 번 이어지자 예전에 선뜻 건넨 20만 골드가 이런 수고까지 미리 계산한 건가 싶어 황제의 쪼잔함을 성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이곳저곳에서 돈을 구하던 로빈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지로 돌아가게 된 건 황제가 큐브 물자를 민간에 풀어 마나석 가격이 급격히 내려가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그 시기에 맞춰 큐브 클리어가 전국적으로 조금씩 안정화되기 시작했고, 영주들도 머리를 써 각종 대피 시설을 마련하면서 민심 역시 빠르게 수습되어 갔다.
그레이츠 영지의 호재는 그때부터였다.
민심이 안정되자 일시적으로 판매량이 내려갔던 혼 래빗 그것과 그레이트 A, 그리고 언제나! 자신 있게!!의 판매량이 급증했고, 영지 수입 역시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리고 그 결과, 로빈이 공언했던 대로 영지의 모든 마을을 순조롭게 강화할 수 있었다.
로빈이 영지의 암흑기에 각 지방을 전전하며 클리어한 레드 큐브의 수는 모두 열두 개.
월연은 임신 때문에 잠시 파티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레드 큐브를 차례로 클리어하며 레드 큐브 정복자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인원 역시 서른 명으로 늘어나 황실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한 기사단을 거느리게 되었다.
황실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레드 큐브를 클리어하는 영지라는 명성 역시 제국에 널리 퍼져 이제는 그 누구도 그레이츠의 위용을 무시하지 못했다.
로빈 개인의 발전 역시 제법 두드러졌다. 이제는 물약을 사용하는 데 익숙해져 예전처럼 쓰러지거나 바로 실신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로빈은 그 정도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큐브 시스템이 안정화되는 와중에도 놈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큐브가 폭발할 때마다 황제가 조사관을 파견해 면밀히 검토했지만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일이 이쯤 되니 로빈도 놈들을 찾아가 대체 무슨 속셈인지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영지 내, 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로빈의 주변만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항상 유쾌했고, 로빈의 아내들 역시 여전했으니까.
그나마 로빈의 동생 세이라가 성인이 되면서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로빈의 여동생 세이라 그레이츠.
로빈이 항상 비글 망나니 2호라고 부르던 세이라는 윌리엄과 세릴의 장점만 모두 빼다 박은 대단한 미인으로 성장했다.
늘씬하면서도 우월한 몸매를 자랑하는 극상의 미녀.
비록 동생이라 로빈에게 여자로서 어필은 못 하지만 일반적인 기준으로 솔직히 외모만큼은 정말 대단했다.
“아이씨, 이제 겨우 성인이 돼서 마음 놓고 큐브나 때려 부수나 했는데, 아카데미라니!! 나도 레드 큐브를 클리어할 거라고!!”
물론 성격은 참 난감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세이라라도 귀족 영애인 이상 아카데미에서 수학해야 했다. 그렇게 아카데미로 떠나면서 얼마나 억울해하던지.
물론 로빈 역시 이제 성인이 된 세이라의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아카데미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격렬하게 아카데미를 거부하던 세이라는 축 늘어진 채 듀발에게 끌려갔다.
“하, 저 녀석. 나중에 결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누구요? 아가씨요?”
“응.”
“에이~ 그럴 리가요. 아가씨가 얼마나 미인인데요. 요즘 은근히 클리너 아가씨들이 인기가 많거든요? 평민들은 물론이고, 귀족들도 첩실로는 평민 클리너 여성을 가장 선호한데요. 귀족 여성 중에는 클리너가 없어서 그런 거지 젊은 귀족 남성들의 분위기를 보면 아가씨는 정실도 문제없을 거 같은데요.”
“아, 그래? 그건 몰랐네.”
“헤헤, 그 왜 있잖아요. 클리너들은 워낙 많이 움직여서 탄력 넘치는데다가 수입도 괜찮으니까요. 거기다가 예쁘면 금상첨화죠.”
그러니까 저쪽 세상으로 따지면 돈 잘 벌면서 운동 좋아하는 여자란 말이지?
그렇게 따지면 우리 세이라는 얼굴도 되고, 몸도 되고, 돈도 잘 버는 꽤 괜찮은 신붓감이라는 건데…….
하지만 녀석의 평소 행실이나 말투를 생각하면 그게 될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듀발 경을 호위로 보내신 거예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