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음, 이게 막상 큐브를 클리어하다 보니 듀발의 위치가 좀 어정쩡하더라고. 본인도 그걸 신경 쓰는 거 같아서 듀발은 팀에서 제외할 생각이야. 녀석도 오히려 홀가분해하니까.”
“그래요?”
“응, 그것도 그런데 세이가 혼자 황도에 가있는 거잖아? 그래서 믿을 만한 기사를 붙여주고 싶었는데, 정말 믿을 만한 기사들은 다 레드 큐브를 클리어하는 레드 팀이더라고. 세이가 듀발을 강하게 원한 것도 있고. 이리저리 따져봐도 듀발이 가장 적당한 인사랄까?”
순수한 탱커에 가까운 듀발은 아무리 기량이 향상되어도 레드 큐브에 등장하는 놈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건 듀발의 능력이 부족하다기보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부분이었는데, 가장 많은 아이템을 얻은 황제의 파티에서도 탱커를 쓰지 않는 걸 보면 버티는 방법으로는 레드 큐브를 클리어할 수 없는 것이다.
게임처럼 탱커가 몬스터를 막아내고 힐로 체력을 쭉쭉 채우는 건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그런 상황이라 머리나 식힐 겸해서 세이라와 함께 황도로 보냈다. 사실 세이라를 조금이라도 제어할 수 있는 기사가 듀발뿐인 것도 그가 호위로 나설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였고.
어쨌든 그런 복합적인 이유로 세이라의 호위는 듀발로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평화로운 가족들에 비해 로빈의 가정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신혼 초 어머니 마리아나가 다이앤에게만 은근슬쩍 눈치를 주던 것을 넘어 어느 순간부터 집안의 모든 어른들이 로빈에게 이런저런 압박을 넣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아이였다.
“어머, 우리 사위님 오셨군요~ 호호, 우리 사위님은 언제까지 이렇게 둘만 오실 건가요~ 이제 슬슬 셋이 될 때도 된 거 같은데~”
“흠흠, 자네와 다이앤의 아이라면 참 귀엽겠군. 기대가 돼.”
처가에 들를 때마다 이런 식으로 은근히 눈총 주시는 장인, 장모님부터.
“녀석, 그러다가 마흔이 될 때까지 은퇴 못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모든 아이가 너처럼 천재는 아니야. 보통의 아이들은 적어도 열다섯 살은 돼야 영주 직을 이어받을 수 있다고.”
이렇게 진지하게 걱정해 주시는 척하면서 아이를 바라는 할아버지.
“사실 할아버지가 되기에는 좀 이르지만, 그래도 아이는 있었으면 좋겠구나.”
“호호, 나처럼 젊은 할머니라니. 하지만 할머니라고 불려도 좋으니 아이는 빨리 봤으면 좋겠어~ 우리 로빈과 다이앤의 아이라니, 얼마나 예쁠지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구나~”
이렇게 대놓고 압박을 넣으시는 부모님까지.
하지만 로빈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 바쁘잖아요. 슬슬 여유가 생기면 생각해 볼게요.”
몇 달 바쁘게 돌아다니고, 마수 범람까지 겹쳐 영지가 부산스러울 때는 그래도 저 핑계가 통했는데, 새로운 해가 밝아오고 영지가 안정된 이후에는 저 말도 통하지 않았다. 이젠 저뿐만 아니라 다이앤에게도 대놓고 압박이 들어오는 상황이라 계속 미루기도 애매했고.
심지어 어머니 마리아나는 사정만 하면 무조건 임신하는 약을 실비아에게 의뢰하다 로빈에게 덜미를 잡힌 적도 있었다.
피임약을 뚫고 임신하는 고약한 약이라니.
그런 게 있겠냐고 헛웃음 짓던 로빈은 조금만 연구하면 불가능도 아니라는 실비아의 말에 표정까지 싹 바꾸고 절대 만들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걸 만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자 실비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순응할 수밖에 없었고.
사실 아이에 대한 압박이 전방위로 거세진 건 몇 달 전 황후의 임신 소식이 전해진 이후였다. 너보다 더 바쁜 황제도 저렇게 아이를 가지는데 넌 뭐가 문제냐는 마리아나의 채근에는 대답할 말이 궁색했으니 말이다.
“아후, 이 양반은 또 언제 일을 벌인 거야? 나보다 더 바쁜 양반이 진짜 능력도 좋네.”
가족들의 성화에 궁지에 몰린 로빈이 세상 누구보다 바쁜 와중에 아이까지 만들었다는 황제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며 당시 이런 한탄을 내뱉기도 했다.
물론 황제가 아이를 가진 건 황제 개인에게도, 제국을 위해서도 대단한 경사였지만 그 때문에 자신이 눈총받는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가족을 모아놓고 스물이 되면 그때 아이를 가지겠다고 선언했다.
적어도 흑막을 모조리 제거하기 전까지는 아이를 가지지 않으려고 했는데 주변의 압박이 너무 거세 어느 정도 타협한 것이다.
당장 아이를 가지길 원하던 가족들도 로빈이 단호하게 나오자 더 재촉하면 혹시 안 낳겠다고 할까 걱정이라도 됐는지 못마땅해하시면서도 이후론 더 이상 아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황후가 당당히 아들을 출산했고, 제국 규모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모든 귀족이 황도로 모여들었다.
당연히 로빈과 다이앤, 그리고 상황 내외분들 역시 그 축하 파티에 초대되어 황도로 향하게 되었는데.
로빈으로선 예전 그 일이 있고 난 후 무려 처음 발걸음 하는 황도행이었다.
* * *
로빈이 황도로 출발하는 날.
영지는 이른 아침부터 출발 준비로 부산스러웠다.
이번 황도행에는 로빈과 다이앤은 물론 상황 내외까지 함께하기 때문에 호위 인선 문제부터 제법 신경 쓰이는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번 황도행의 최종 호위 책임자인 린이 그렇게 호위 병력을 책임지는 사이, 로빈은 출발 직전까지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시기에 처리해야 할 영지의 사안들을 지온에게 확인하고 있었다.
“큐브 전략 물자들은 따로 정비하고, 약초나 시약, 보석은 바로 실비아 쪽으로 넘기세요. 마나석은 무조건 비축. 앞으로도 마나석이 사용될 일은 무궁무진하니, 좀 더 신경 써주세요. 설마 영지에서 다른 곳으로 물자를 파는 클리너는 없겠죠?”
“네, 저희 영지는 외부에서 들어온 클리너도 없고 영지민들뿐이라 클리너 길드에서 바로 물자를 매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럴 일이 없죠.”
“그래요. 큐브는 지금처럼 클리어해 주시면 되겠고. 계절도 이제 봄으로 들어섰으니 마수 놈들도 잠잠할 테죠? 별문제는 없겠네요.”
“안심하고 다녀오십시오. 영주님이 며칠 자리를 비운다고 흔들릴 그런 영지가 아닙니다.”
“그러게요. 누가 보면 한 몇 달은 나가있는 줄 알겠어요.”
이렇게 몇 가지 사안을 확인한 로빈은 한숨을 내쉬며 다이앤이 기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휴, 이 정도면 진짜 워커홀릭인데.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지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변해버린 건지, 요즘 보면 전생의 자신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자신이 원했던 금수저 라이프는 이런 게 아니었거늘. 어느새 노동(?)에 익숙해진 자신이 야속할 정도였다.
“아니지,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고 했어. 큐브만 지금처럼 안정화되고 그놈들만 어떻게 처리하면 그때부터는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예쁜 마누라 셋과 산뜻한 전원 라이프라니. 후후.”
이렇게 의지를 다지면 다시 의욕이 샘솟다가도.
“아니지, 아니야. 지금 놈들이 설쳐대서 바쁜 건가? 큐브가 생기기 전에도 난 바빴어. 결국 답은 은퇴뿐인가? 에휴, 지금 아이를 가져도 15년은 있어야 영주를 물려준다는 건데. 언제 키워서 언제 은퇴하냐? 정말 답이 없네. 할아버지의 말씀이 틀린 것만은 아니라니까.”
은퇴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 허탈해질 뿐이었다.
“로빈, 표정이 왜 그래요?”
그렇게 로빈이 혼자 이랬다저랬다 쇼를 하고 있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오는 다이앤.
“우리 아이를 언제 키워 언제 은퇴하나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서 말이야.”
“풋, 에이~ 그게 뭐예요. 있지도 않은 아이는 또 어떻게 키우게요?”
“그러게. 하~ 진짜 노답이네.”
로빈의 엉뚱한 한마디에 웃음을 터트린 다이앤은 왜 꼭 은퇴해야 한가하게 보낼 수 있는 거냐며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로빈이 은퇴를 안 해도 대리 영주를 세우면 되는 거 아닌가요?”
“대리 영주라, 글쎄. 그게 가능할까? 대리 영주라 봤자 엄마 아니면 할아버지 아냐? 그 두 분은 불가능하지.”
“아니죠, 로빈. 아가씨가 시집가면서 데릴사위를 데려오시면 가능하죠.”
“세이라의 남편이라……. 어떤 놈일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될까?”
“되든 안 되든, 아이를 가지고 15년이나 키워서 은퇴하는 것보다는 빠르지 않을까요? 관리들만 잘 키워 놓으면 영지는 알아서 굴러갈 테고. 한 몇 년 영지 일을 가르치면 불가능도 아니죠.”
“그래, 맞아. 그렇군. 그게 빠르겠어.”
“아버지께서 예비 관리를 가르치고 계시잖아요. 그 아이들도 이제 몇 년 안에 관리로 임관할 테고, 그러면 관리 풀도 늘어나 영주의 일도 줄어들 거예요.”
“그렇지. 다른 분도 아니고 장인어른이 가르치는 관리니까 다들 평타는 칠 거야.”
다이앤의 말대로 장인어른께서는 관리를 지망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그게 벌써 햇수로 3년.
이제 몇 년만 있으면 그들이 제대로 된 관리로 영지에서 일하게 될 테니 지온의 부담도 줄어들고 내 부담 역시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다이앤의 말대로 세이라가 어느 귀족가의 삼남 정도를 데릴사위로 데려올 수만 있으면 내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대리 영주에서 성장한 내 아들에게 영주 직이 이어지면 그레이츠의 혈통도 지킬 수 있어 웬만한 반대는 물리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놈이 영주 직에 욕심을 내는 경우인데……. 그런 인간만 아니길 바라야겠군. 아니, 적당히 주물러서 교육하면 그것도 상관없으려나.”
제 말을 듣고 다시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든 로빈을 바라보며 웃음 짓던 다이앤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끌고 갔다. 이제 떠날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행복 회로에서 빠져나올 기미가 없어서였다.
“로빈, 어서 가요. 그 일은 나중에 다시 고민하시고요.”
“아, 그렇지. 준비는 다 된 거야?”
“그럼요. 다들 로빈만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그렇게 다이앤에게 이끌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이번 황도행에 합류한 전사들과 호위단의 대표 린, 그리고 장인어른 내외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하, 사돈어른.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걱정 마시오. 그저 늙은이 하나가 아들 녀석이랑 손자를 보러 가는 건데 무슨 일이야 있겠소이까?”
“그래도 조심하시오. 황도는 번잡한 곳이지 않소. 내, 낚싯대를 손질해 놓고 사돈어른을 기다리고 있겠소이다.”
“하하, 그러시오. 다녀오자마자 손맛 좀 봅시다 그려.”
영지에서 보낸 시간이 어느덧 3년째.
이제 장인어른도 룩센 대제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룩센 트와이드라는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 보였다. 어느새 의기투합하더니 할아버지와 함께 낚시 모임을 만들어 주말마다 낚시하러 다니곤 했으니 말이다.
아버지, 할아버지, 장인어른, 폴 경, 그리고 알버스 원로까지.
어떻게 저런 5인조가 탄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려 아버지가 막내인 저 모임은 작년에 결성되어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저 가운데 대물을 낚는 건 할아버지 카인의 몫이고, 장인어른과 폴 경은 회를 뜨거나 음식을 만드는 담당이었는데 왕년에는 제법 괜찮은 기사였다던 장인어른과 지금도 현역에 가까운 실력을 자랑하는 폴 경이 뜬 회는 그 두께가 절묘해서 로빈도 종종 감탄하곤 했었다.
특히 저번 주에는 무려 다랑어 비슷하게 생긴 대물 녀석을 낚아오셔서 온 가족이 환호성을 질렀었는데. 우리 가족은 물론 다른 멤버들의 가족까지 배불리 먹고도 남을 정도였으니 그 크기를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어떻게 그런 놈이 근해까지 올라왔는지는 정말 미스터리였지만 할아버지의 낚시 스킬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할 뿐이었다.
하여간 그렇게 사이좋게 지내는 분들이니만큼 분위기는 정말 화기애애했다.
“장인어른, 이제 가실 시간입니다.”
“오, 사위 오셨군. 그럼 어서 가세나.”
로빈이 출발하자 일행들, 그리고 그 뒤로 호위대가 뒤따랐다.
린을 포함한 전사단으로 50명.
그리고 푸시 캣츠에서 따로 파견한 시녀들 10명까지.
린이 고르고 고른 이번 황도행의 호위대였다.
그렇게 워프 게이트를 타고 황도에 도착하자 황제와 황후까지 직접 게이트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도열한 엄청난 수의 기사들까지.
황제와 황실 근위대, 황제의 친위 기사단까지 모조리 나온 거라 정말 장관이었다. 아마 제국에서 이렇게 황제가 직접 마중 나올 만한 사람은 장인어른뿐이지 않을까?
“환영합니다, 부황 폐하.”
“오랜만이군, 황제. 지금껏 선정을 베풀어줘 백성들을 대표해 고맙게 생각하네.”
“아닙니다, 부황 폐하. 당연히 해야 할 바를 실천했을 뿐입니다. 어서 드시지요. 궁까지 안내하겠습니다.”
“고맙네, 황제.”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