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지난 결혼식 때도 몰래 방문했던 장인어른이 공식적으로 황도를 방문한 건 황제 취임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대대적으로 환영 인사를 올리는 거고.
아무래도 황제는 장인어른이 황도를 공식적으로 방문하고 이곳에서 머물러도 자신의 권력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종종 황도에 들러달라는 암묵적인 시위? 아니면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싶은 과시?
이런 심리가 아닐까 싶다.
장인어른도 당당하고 의젓한 황제의 모습에 미소를 머금고 계셨다.
역시 키우기 반, 저 하기 반이라고. 자신이 잘못 키웠음에도 제국을 잘 다스리고 있는 황제가 대견하긴 한 모양이다.
장인어른과 함께 황도에 도착하는 바람에 어찌어찌 황궁까지 동행한 로빈은 자신의 저택이 아니라 황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제 와서 자기만 몸을 빼기는 애매한 분위기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건데 적어도 오늘 하루는 황궁에서 머물고 다음 날 저택으로 거처를 옮길 생각이었다. 저 역시 준황족이라 황궁에서 머물러도 되지만, 이곳은 딱히 정이 가는 곳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황궁에 도착한 이상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호위 역시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에 맘 편히 떠나리라 다짐했다.
* * *
의도는 아니었지만 황궁에 든 이상 조용히 잠만 자고 내일 날이 새자마자 황궁을 탈출하려던 로빈의 작은 소망은 황제에 의해 어그러지게 되었다.
늦은 저녁 시간에 황제가 요청해 도착한 황제의 집무실에는 조단과 이제 젝트 크레톤이 된 젝트까지 로빈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거, 제가 못 올 곳에 온 기분이네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후작. 어서 오게나.”
“오랜만입니다, 후작님.”
“네,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죄송하군요, 크레톤 공작님.”
“이거, 후작님이 그러시니 기분이 참 묘하군요. 하하.”
그동안 젝트를 마구잡이고 갈아대던 크레톤 공작은 젝트가 재무부 쪽 업무를 마스터하자마자 데릴사위로 받아들여 작위와 직위까지 모두 물려주고 은퇴하셨다.
원래 장인어른이 선위할 때 같이 은퇴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승작하자마자 은퇴하는 건 도리가 아니고 후계자 역시 불투명해 그럴 수 없었다며 홀가분해했다는데 그 어른도 참 대단하긴 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신하들이 자발적으로 은퇴를 결심할 정도로 영향력 있던 장인어른이 대단한 건가?
하여간 그렇게 젝트는 크레톤 공작이 되었다.
“그래도 이쪽 일은 저보다 조단 저 양반에게 어울리는 일인데 죽겠습니다.”
“일과 관련된 측면에서는 그런데, 그렇다고 크레톤 공작 부인의 취향이 아닌 남자를 강제로 결혼시킬 순 없는 일이었지. 이제 적당히 순응할 때도 된 거 같은데.”
“쩝, 말이 그렇다는 거죠.”
“저는 제 자리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 괜히 이상한 말씀 하지 마시지요, 공작. 누가 들을까 두렵군요.”
“조단 저 양반이 아주 부인에게 잡혀 삽니다. 애처가도 그런 애처가가 없어요. 덕분에 북국 아우레우스와의 관계도 점점 돈독해지고 있지만, 가끔 보면 눈꼴사나울 정도랄까요?”
“아, 그래요? 하긴……. 유나 공주 정도면.”
“아니, 저만 그런 거처럼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공작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흠흠. 그거야, 뭐…….”
“이 인간들이 이렇게 살아.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그래.”
이래서 신혼 초기의 새신랑들이란 상종할 사람들이 못 된다니까. 다들 저렇게 잡혀 살아서 어쩌겠다는 건지, 원.
유나 공주와 결혼한 조단 크라우는 요즘 거의 주말 부부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유나 공주 자체가 답답한 황도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영지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중에는 황도에서 일하고 주말만 되면 바로 자신의 영지로 도망친다는데, 빨리 은퇴해 영지로 돌아가 영주 직을 이을 날만 기다리고 있단다. 분명 조단 크라우는 마지막까지 황제 옆을 지키는 충신 중의 충신이었는데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 역시 황도가 그만큼 잘 돌아가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저 조단 크라우가 안심하고 영지로 돌아갈 생각까지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젝트 크레톤 역시 정시 퇴근의 선두주자라는데, 너무 일찍 퇴근해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토의할 인물이 없다는 황제의 푸념이 참 인상적이었다. 얼마나 빨리 도망가는지 정해진 퇴근 시간에서 1분만 늦어도 이미 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나?
물론 정말 중요한 사안은 통신 수정구를 날리면 되니 그저 푸념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저 젝트 역시 결혼한 이후에는 가정에 충실한 편인가 보다. 하긴, 그렇지 않으면 전대 크레톤 공작의 불호령이 떨어질 테지만 말이다.
“중매를 서준 게 실수였어. 저렇게 공처가가 될 줄 알았으면 늦게 결혼시키는 건데.”
허탈하게 웃으며 푸념하는 황제의 표정도 제법 밝았다.
그러고 보니, 저 양반도 참 많이 변했네. 예전에 처음 봤을 때는 잘못하면 베일 정도로 날이 서있었는데 말이야. 분위기도 퇴폐적이었고.
역시 베이비 파워인가? 아니면 생활이 안정되어서?
자신의 원수인 조셉 공작과 폐황후, 그리고 3황자까지 이른 시간에 처리하고 제국을 다스린 지도 벌써 3년 차.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제국이 잘 돌아가고 아이까지 가진 아버지가 되면서 많이 유해진 모양이다.
물론 저것도 바람직한 변화이긴 하지만…….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놈들을 빨리 찾는 거죠.”
“그렇지. 놈들을 빨리 찾아서 모조리 처리하고, 제국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야지. 우리 에단에게 그런 날피리가 끼어있는 제국을 물려줄 순 없으니 말이야.”
혹시 방심하고 있나 싶어 훅 찔렀더니, 눈빛이 갑자기 달라진다. 분위기는 유해졌지만, 날카로운 송곳니를 잃어버리진 않은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미래까지 걸려있자 느껴지는 기세 역시 더욱 강렬해졌다.
그래, 이게 아버지지.
이런 분위기면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하지만 놈들을 찾을 방법이 없으니 문제군.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니. 후작도 알다시피 모든 큐브 폭발을 조사해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어.”
황제의 말대로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놈들을 찾는 건 요원하기만 했다.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몇 년을 방심시켜 놓고 무슨 거창한 일을 벌이지나 않을지 걱정스럽기도 했고.
나였으면 이미 몇 번은 움직였을 텐데 정말 인내심이 대단한 놈들이었다.
“놈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 오리무중인가요?”
“그렇다네. 우선 정체가 밝혀진 로랑의 과거 행적을 집요하게 파봤는데도 쓸 만한 정보가 없더군. 확실히 이런 쪽으로는 우리가 못 당하겠어. 요즘에는 혹시 이놈들의 본거지가 제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야.”
“음……. 전염병이 해상 왕국 쪽에서 일어났으니 거기가 본거지라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네요.”
“그렇다네. 어쨌든 지금도 황실의 정보망을 동원해 전국을 살펴보고 있으니 무슨 움직임이 있으면 낌새를 눈치챌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 그런데 무슨 일로 절 부르신 건가요? 크라우 백작 자제와 크레톤 공작의 신혼 생활에 대하여 자랑하려고 부르신 건 아닐 텐데요.”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들은 건 대부분 두 새신랑의 신혼 생활과 자랑질뿐이었다. 왕년(?)에 신혼 생활 한번 즐겨보지 못한 사람이 누가 있다고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잡혀(?) 사는 주제에 저러고 있으니 뭔가 묘하게 아니꼬웠다.
물론 나는 아직도, 그리고 영원히 신혼이지만 말이다.
“아, 그렇지. 사실 후작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네.”
“부탁이요?”
“그렇지. 사실은 말이야. 레드 큐브 공략 팀에 대한 심사 요청이 들어왔어. 그걸 내가 테스트해야 하는데 후작도 알다시피 이것저것 준비할 게 좀 많아서 바쁘지 뭔가.”
레드 큐브를 공략할 팀을 심사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자격 없는 이들을 통과시킨다면 국운이 흔들릴 정도로 큰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중요한 일을 굳이 나에게 맡긴다는 걸 보면 그 팀은 이미 황제의 테스트에 통과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테스트도 없이 그냥 통과시키면 그건 그거대로 형평성에 문제가 생기니 요식 행위로 테스트를 치르라는 뜻이 아닐까?
“어디의 기사들입니까?”
“아아, 레오니스 공작가의 기사들이네. 실력은 출중한 기사들인데 너무 경직돼 있어서 탈락시켰던 팀이야. 아무래도 돌발 변수에 적응하지 못할 거 같더군. 하지만 그 후에 경험을 많이 쌓았는지 많이 유연해졌길래 이번에는 통과시킬 생각이야.”
“아, 레오니스요.”
황제의 처가 레오니스 공작가.
사실 전투력만으로 따지면 전국에서 수위권인 기사들이니 실력 하나는 믿을 만했다. 물론 레드 큐브까지 클리어한 영지의 기사들이 패배하진 않겠지만 그 정도면 상대해 볼 만한 기사들이랄까?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레오니스라니 왠지 호기심이 동했다.
“적당히 어울리다 테스트에 통과시키면 되는 거군요.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좀 귀찮은 일이지만 부탁하지. 후작도 알다시피 레드 큐브가 생성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어. 언제까지 황실과 그레이츠가 그걸 다 처리하고 다닐 순 없지 않나. 이제 슬슬 때가 되었으니, 레오니스를 시작으로 리아넨, 리아누스, 그리고 크라우와 작센까지 힘깨나 쓴다는 영주들에게 레드 큐브를 배분할 생각이네.”
“좋은 생각이시네요. 저 빌어먹을 큐브 문도 점점 검게 물들어가니까요. 앞으로도 레드 큐브는 더 늘어날 겁니다.”
“그나마 레드 큐브를 클리어할 때마다 얼룩이 조금씩 벗겨지지만, 그것도 그때뿐이고 느리긴 하지만 점점 검게 차오르기만 하니 짜증스럽더군. 내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만 하면 점점 괜찮아질 거라더니, 학자들의 해석이 틀린 모양이야.”
학자들의 해석을 되짚어보던 황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예전에 황제에게 바친, 그러니까 그레이츠 영지에서 처음 레드 큐브를 클리어한 후 얻은 쪽지의 중2스러운 문구에 그런 표현이 있긴 했다. 슬픔과 고통, 그리고 타락이 죄라서 그 죄가 하늘을 검게 물들인다고 했던가?
직관적으로 해석하면 학자들의 말이 맞는 거 같지만 예측은 그저 예측일 뿐이라 그게 사실로 입증되기까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황제가 제국을 그럭저럭 괜찮게 이끌어가고 있는데 자꾸 저렇게 얼룩이 짙어지며 큐브가 늘어나니 내가 황제라도 짜증스럽긴 할 거 같았다.
“하지만 어찌할 방도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 초월적인 현상을 저희가 어떻게 할 방법은 없으니…….”
“하긴, 그건 그래. 열심히 큐브나 클리어해서 얼룩이나 지우는 수밖에.”
그때 옆에서 둘의 대화를 경청하던 조단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무슨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학자들의 분석이 틀린 게 아니라면 점점 검은 부분이 지워지든, 아니면 현상 유지라도 하는 게 정상인데 계속 늘어가기만 하니…….”
“예전보다 백성들의 생활 수준도 올라가고, 큐브 덕분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일자리도 늘어나 수익도 상승했습니다. 그나마 문제가 있다면 불안감인데, 요즘은 큐브가 터졌을 때 발생하는 사상자 수도 많이 줄었죠.”
“큐브 클리어 환경과 클리어 상태는 점점 좋아지는데 저 큐브 문은 그게 아니라고 하니 참 답답할 노릇이야.”
지금 제국의 근심거리라면 점점 검게 물들어가는 큐브 문과 늘어만 가는 큐브.
하지만 큐브가 늘어나 레드 큐브가 생성되면 다시 큐브 문의 검은 부분을 제거할 수 있어 그 과정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 흐름이 어디서부터 문제인지는 당장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니, 지금으로선 큐브를 제때 클리어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기사가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 일은 제가 맡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좋네. 후작. 부탁 좀 하지. 아, 그리고 사상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후작은 영지 자체를 대피소로 만들어버렸더군. 내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하지만 후작다운 일이긴 했어.”
“솔직히 재무부의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돈 낭비지만, 수치가 말해주니 그게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군요.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후작님.”
“아무래도 사람이 귀한 영지라서요. 불안감에 떠는 건 또 제 취향 아니고……. 저도 황도라면 감히 그런 생각 못 했을 겁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