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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279화 (279/303)

279화

하지만 유일한 특례가 있었으니 귀족 자제 중 가주의 보증을 받은 인물이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면 그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단다.

“잠깐, 보증? 난 그런 거 한 적 없는데.”

“네, 그게 그러니까…….”

황도에서만 큐브 클리어에 도전할 수 있는 라이선스라도 감지덕지인 세이라가 클리너 길드를 방문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실력 검증을 요청했다.

마리아나의 눈총 때문에 횟수가 많진 않지만, 영지에서도 몇 번 클리어한 경험이 있어 당당히 Y-C 클리어 마크를 달고 있는 세이라였고, 실력은 그 이상이라 능력을 입증하는 건 쉬웠으니 유일한 난관은 가주의 보증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절차대로라면 가문에 연락해 확인을 받아야 하지만 황도 길드에서는 그레이츠라는 이름 하나로 바로 허가를 내려버린 것이다.

“뭐? 그건 불법 아냐?”

“원래 대귀족의 자제들은 신분하고 실력만 확인되면 그렇게 바로 허가를 내준답니다. 신원을 명확하게 하는 게 주된 목적이라면서요.”

“아, 그건 그렇지. 실력하고 신분만 확실하면 그렇긴 하지.”

“황도 클리너 길드가 그런 식으로 운영된다는 걸 알려준 것도 드라나 남작 영애라더군요. 그래서 더 친해지신 모양인데…….”

“그래? 그 아가씨는 그런 걸 어떻게 알았대?”

“그 영애도 클리너라서요. 오늘도 아가씨와 함께 큐브에 들어갔고요.”

“음…….”

“오빠!!”

로빈이 세이라의 새로운 친구에 대하여 어떻게 결론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는 사이 그녀가 돌아왔다.

영지에서보다 더 활기찬 모습.

아무래도 어머니의 눈총 없이 마음껏 큐브를 클리어하고 다니는 게 어지간히 즐거운가 보다. 저런 녀석이 아카데미에 가기 싫다고 그리 고집을 부렸으니.

“큐브에 갔다 왔다면서?”

“응, 헤헤~ 하루에 하나씩 착착 처리하고 있지. 고급 큐브는 아니지만 이게 어디야? 만약 그것도 없었으면 답답해 죽을 뻔했다니까?”

“뭐, 그래. 그 드라나 남작 영애? 그 아가씨랑 같이 간 거야?”

“응? 아아, 레지? 그렇지. 그나마 이곳에서 나랑 말이 통하는 게 레지뿐이거든.”

“그래?”

“응, 다른 애들은 나랑 좀 다르다고 할까? 걔들은 대하기가 좀 거북한데 레지는 그나마 괜찮아. 같은 북부 출신이기도 하고.”

“혹시 다른 낌새는 없고?”

“무슨……? 아아. 에이, 오빠. 걱정하지 마. 같이 큐브를 클리어한다고 레지가 나랑 같은 급은 아니라고. 걔는 나보다 훨씬 약하거든? 날 어떻게 하려고 해도 당해줄 내가 아니지. 나도 조심은 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친구라고 무작정 믿는 건 아닌 모양이라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마음을 놓기에는 뭔가 조금 부족했다.

“앞으로는 큐브를 클리어할 때 무조건 듀발과 같이 다녀. 만약 그게 아니라면 큐브에는 발도 못 붙이게 할 거야.”

“끙, 치사해.”

“어쩔 거야? 듀발이랑 같이 갈 거야? 아니면 안 갈 거야?”

“알았어. 듀발 오빠랑 같이 다니면 되잖아.”

“듀발, 세이라 좀 잘 돌봐줘.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영주님. 명심하겠습니다.”

신중한 듀발을 녀석에게 붙이면 사고를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레드 큐브에서는 조금 애매한 듀발이지만, 웬만한 큐브는 혼자서도 클리어할 수 있는 대단한 기사였으니 말이다.

생각 같아서는 아예 상종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아무 이유 없이 잘 지내는 친구랑 떨어뜨려놓는 건 무리라 듀발에게 세이라의 안전을 당부하는 거로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그 레지라는 여자를 한번 만나봐야 할 거 같았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뭔가 답이 나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 이야기는 그 정도로 마무리 지은 후, 앞으로는 제발 다른 귀족 자제들이랑 결투를 벌이지 말라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퍼부어 세이라를 몸서리치게 만든 로빈은 일정대로 황실 연무장으로 출발했다.

황제가 부탁한 대로 레오니스 공작령의 기사들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린과 전사들이 그런 로빈의 뒤를 따랐다.

* * *

연무장에는 이미 레오니스 공작과 그 기사들이 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직접 마주치는 건 처음인가, 후작? 만나서 반갑네.”

“네. 처음 뵙겠습니다, 레오니스 공작님.”

황제의 성인식이나 이런저런 행사에서 멀찍이 바라본 적은 있지만, 황제와 황후가 결혼한 후에는 황도를 방문하지 않은 레오니스 공작이었기에 이렇게 직접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레오니스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장인어른과 비슷한 연배인 공작은 예전부터 이름 날린 대단한 기사라 그런지 아직 정정해 보였고 뒤에 도열한 기사들의 수준도 사뭇 대단했으니 말이다.

저 정도면 확실히 황제가 자신할 만한 수준이었다.

“어떤 식으로 테스트할 계획인가?”

“가장 단순하고 직관적인 대련으로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테스트라기보다는 서로 검을 나누며 교류하는 거로 생각하시면 될 거 같네요. 어차피 레오니스의 기사들이 레드 큐브에 도전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건 황제 폐하께서 잘 알고 계시니까요.”

“흠, 그런가?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군. 그럼 나도 조금 편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겠어.”

확실히 충신은 충신이다. 모든 게 황제의 뜻이니 이견이 없다는 거겠지? 아무리 그레이츠가 레드 큐브를 클리어했다지만 황제가 아닌 후작에게 테스트받는다는 건 기분 나빠할 만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레오니스라면 충분히 존중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로빈 역시 언행을 신중히 했다.

레오니스의 기사는 모두 20인.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게 고르고 고른 정예인 듯한데 그레이츠의 정예 전사들과 같이 서니 그 모습이 제법 볼만했다.

그리고 그렇게 짝지어진 기사와 전사들은 연무장 앞으로 나와 차례대로 실력을 겨루기 시작했다.

“그레이츠의 기사들은 참 자유분방하군. 수단, 방법을 가리지도 않고 거리낌이 없어. 저런 건 배워야 하는데 말이야.”

“…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정예 전사들을 대동했지만 그렇다고 레드 팀을 데려온 건 아니었다. 이미 이 수준을 넘어버린 레드 팀으로는 상대의 전력을 확인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그런지 전사들과 기사들의 대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단순히 그 정도로 마무리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대결의 양상이 치열해지자 이 인간들이 옛날 습관대로 흙을 뿌리거나 다친 척하는 등 온갖 치졸한 수로 상대를 쓰러트리는 게 아닌가?

다양한 변칙 공격에 기사들이 쓰러져갔지만 레오니스 공작은 대범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오히려 그레이츠의 전사들을 칭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고스란히 로빈의 몫이었다.

그렇게 승패를 나누어 가지는 대등한 대결 후 레오니스 공작은 로빈에게 따로 요청했다. 그레이츠의 진정한 힘을 확인해 보고 싶다면서 말이다. 레오니스 공작도 지금 나선 전사들이 그레이츠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간파한 것이다.

“그래도 한 번은 제대로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단순한 한마디였지만 그 뜻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사들이 방금 보여준 치졸한 모습을 희석하기 위해서라도 그럴 필요가 있었고.

물론 실전에서는 무조건 이기는 게 장땡이지만 이런 대결에서까지 그런 건 전사들의 실책이었다.

레오니스 공작이 청하자 전사들이 창피한지 얼굴을 붉히고 있던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내보내달라는 뜻이었다.

린의 마음을 이해한 로빈은 선선히 그녀의 출격(?)을 허락했다.

“저희 영지의 기사단장입니다. 레드 큐브 클리어 경험 13회. 영지의 자랑이죠.”

“그렇군. 저 여기사가……. 필립, 네가 나가서 한 수 배워 오거라.”

“네, 아버지.”

린의 이력을 전해 들은 레오니스 공작은 웃으며 자신의 후계자 필립 레오니스를 내보냈다.

“으득. 영지로 돌아가서 봐요, 삼촌들.”

“…단장.”

“그래도 이겨야지. 지는 거보단 낫잖아?”

연무장으로 향하던 린은 결투에서 승리하고 희희낙락 웃고 있는 전사들을 스쳐 지나가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뻔뻔한 전사들은 린의 눈길을 피하면서 못 들은 척하거나 당당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저 전사들은 영지로 돌아가 백랑 혹은 린에게 집중 교육을 받게 될 거 같았다.

연무장 가운데 자리 잡은 린과 필립은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름: 필립 레오니스

성향: 충직. 대범함. 책임감

타이틀: 신검합일(L). 마스터(S). 검의 혈통(S). 놀라운 반사 신경(U)

패시브: 소드 오브 일루션 (랭크 A)

액티브: 더블 스텝 (랭크 B)

소설 속 필립 레오니스는 차기 레오니스 공작이자 황제의 검으로 여러 전장에서 활약한 인물이라 로빈의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있었다. 황제를 따르는 기사 중에서도 수위권을 다투는 기사였으니 말이다.

이미 로빈이 읽은 부분은 거의 다 지나간 상황이라 이제 와서 원작이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어쨌든 저 필립 레오니스는 소설에서 비중 있게 다룰 정도로 능력 있는 인물이었다.

타이틀만 봐도 그의 대단함을 어느 정도 실감할 수 있었다.

황제가 가지고 있던 신검합일도 그렇지만 정말 대단한 건 저 검의 혈통이었는데, 검을 익히는 습득 속도와 검술 구사 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타이틀이라 등급은 스페셜이지만 레전드에 준하는 효율을 보이는 뛰어난 타이틀이었다.

레오니스 공작도 저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걸 보면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유전적인 타이틀인 모양인데, 저런 걸 공짜로 얻었다고 생각하니 조금 배가 아팠다.

이름: 린 그레이츠

성향: 호전적. 도전적. 호색

타이틀: 흉포한 검은 야수(S). 마나의 사랑을 받는 자(L). 붉은 학살자(L). 대검 마이스터(S). 큐브 정복자 - 레드(S)

패시브: 붉은 파괴 전차 (랭크 S)

엑티브: 분노의 포격 (랭크 C)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린나니한테 비빌 정도는 아니었다. 린 역시 그동안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으니까.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역시 패시브 스킬의 랭크와 대검 숙련도였다.

특히 대검 숙련도는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의 결과물인데, 대검의 달인에서 대가를 거쳐 결국 저 경지에까지 오른 것이다.

한자와 영어의 기묘한 조합이 언밸런스했지만, 그 정도는 뭐, 어떤가. 성능만 빵빵하면 장땡이지.

솔직히 다른 건 몰라도 대검 쓰는 거만큼은 제국에서 린을 이길 자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마이스터란 타이틀은 그런 의미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실력 차이는 둘의 대련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현란한 스텝과 허초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필립의 검술은 린의 대검을 뚫어내지 못했다. 대검과 한 몸처럼 움직이는 린은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레오니스 공작 역시 같은 생각인지 린의 유려한 움직임에 연신 감탄을 터트리고 있었다.

“저 정도라니. 정말 대단하군. 다 늙은 내 가슴이 뜨거워질 정도야. 어느 정도 실력 차이가 있을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군. 저 정도면 페리안, 아니 황제 폐하와도 자웅을 겨룰 만하지 않은가.”

아니, 아무리 정정하셔도 노구에 그리 움직이시면 탈이 납니다, 공작님. 진정하세요.

그나저나 황제라. 글쎄, 그게 되려나. 물론 린나니도 발전했지만, 황제 역시 그만큼 발전했던데.

하지만 지금의 린나니라면 황제에게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을 거란 확신 정도는 있었다. 사실 지금도 모든 힘을 끌어낸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린이 정말로 기어를 넣으면, 최소한 붉은 학살자는 켜고 싸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필립의 수준은 린에게 진심을 끌어낼 정도도 못 된다는 의미였다.

레드 큐브를 클리어하고 한 단계 올라선다면 몰라도 지금 당장의 수준은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 저 전투도 아마 그리 오래 이어지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로빈의 예상대로 몇 합을 더 겨룬 후, 필립이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다.

“정말 대단하군요. 역시 그레이츠. 레드 큐브를 클리어하려면 이 정도 수준은 돼야 하는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폐하께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레드 큐브를 클리어하면 수준이 한 단계 올라가요. 필립 경도 큐브를 정복하면 그 의미를 알게 되실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 대련을 복기하는 필립을 바라보며 미소 짓던 레오니스 공작은 로빈에게 이 정도로 마무리 짓자고 이야기했다.

“좋군, 후작. 많이 배웠어. 우리는 이제 레드 큐브를 클리어할 준비를 해야겠군. 처음이니 안전하게 황제 폐하의 지원을 받을 생각이네. 차라리 그게 낫지 않겠나?”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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