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그렇죠. 한 번만 지원을 받으시면 다음부터는 자력으로 클리어하실 수 있을 거예요.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니까요.”
역시 레오니스 공작은 처음부터 모든 걸 혼자 해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확실히 어른의 연륜이 느껴지는 태도랄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겠다는 의지가 느껴졌으니 말이다.
“여기들 계셨군요.”
그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되려는 찰나, 저쪽에서 익숙한 인물이 다가왔다.
바로 리아넨 공작.
무슨 생각인지 처음 보는 갑옷까지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사뭇 범상치 않은 게 제법 대단한 무구를 얻은 거 같았다.
“리아넨이군. 선대 리아넨 공작은 잘 지내고 있는가?”
“하하, 아버님이야 잘 지내고 계십니다. 제가 자주 영지를 비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영지를 돌보고 계시는데, 다 늙은 노구를 부려 먹는다고 항상 성화시죠.”
“저런, 그 친구도 아직 한창때이거늘.”
“그러게 말입니다. 말은 그리하셔도 일이 없으면 서운해하실 분이시니…….”
“그렇겠군. 그래, 여긴 어쩐 일인가?”
“레오니스가 레드 큐브 진입 테스트를 받는다기에 왔는데, 제가 한발 늦었습니다. 좋은 구경거리를 놓쳤군요.”
“아, 그러고 보니 이제 리아넨도 슬슬 준비 중이겠군. 준비는 잘 돼가시나?”
“저희 중부야, 동부나 남부처럼 압도적인 모습을 보일 수 없으니 요령을 부리는 수밖에요. 그래서 장비 마련 쪽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오, 혹시 지금 입고 있는 게…….”
“네, 이번에 저희 영지에서 개발한 보호 갑주 온두라스입니다. 이놈 때문에 요즘 허리가 휠 지경입니다.”
[온두라스] [랭크 B]
마법 공학과 큐브 공학, 연금술의 총아가 결합된 전신 보호 갑주
방어 능력이 탁월하고, 큐브 내에서는 신체 능력 강화 효과를 추가로 얻는다.
와……. 저건 또 어떻게 만든 거야? 벌써 저렇게까지 발전했다고?
무려 제작템을 만들었다는 리아넨 공작의 이야기에 로빈도 혀를 내두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그런 식으로 흐르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그 흐름이 빨랐으니 말이다.
저렇게 큐브에서 추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제작 아이템의 장점은 기록된 추가 효과 외에 기본적인 마법 효과까지 모두 얻을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저 갑옷에 기존의 마수 갑옷처럼 마법을 걸면 세 가지 마법에 신체 능력 강화 효과까지 모두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방어 능력이 탁월하다는 걸 보면 내구성도 대단한 모양인데, 리아넨이 정말 대단한 물건을 만들었다.
“보기에도 대단해 보이는군 그래. 자네가 그렇게 입고 있는 걸 보면 그 물건을 팔 생각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공개적으로 입고 다니진 않을 테니……. 그리고 그 대상은 우리 레오니스인가?”
그러니까 이 양반이 자신을 걸어 다니는 광고판으로 사용하는 건가? 하긴, 저 정도 되는 양반이 저런 갑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순 있겠어.
“하하, 역시 공작님을 당해낼 순 없군요. 맞습니다. 만들긴 했지만, 아직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일종의 시제품인데다 효과 역시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고요. 블루 큐브에서 실험했을 때는 유효했지만 그게 레드 큐브에까지 먹힌다는 의미는 아니라…….”
“일종의 테스트라는 거군. 하지만 확실히 물건은 괜찮아 보여. 상황이 상황이라 욕심이 나긴 하는군.”
“공작님, 물건이 괜찮아 보이는데 그냥 구입하시는 게 어떨까요? 시제품이고 테스트라니 리아넨도 제값을 다 받진 않을 테고, 저런 물건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으면 지금이 오히려 구매할 적기인 거 같네요.”
“그런가?”
“오, 자네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가? 확실히 물건이 제대로 만들어진 모양이군. 이거 안심인데. 한두 푼 들어간 물건이 아니라서 말이야.”
솔직히 돈만 있으면 내가 먼저 사고 싶은 물건이었다. 물론 직접 사용해 봐야 정확하게 알겠지만, 생각보다 더 괜찮은 물건 같았으니 말이다.
갑옷의 재질과 느낌을 확인하던 필립도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레오니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좋네. 내가 한번 사용해 보지. 이따 저택으로 사람을 보내주게.”
“네. 감사합니다, 공작님.”
그렇게 레오니스 공작이 단번에 구매를 결정했고 그와 거래에 대하여 약속한 리아넨 공작은 밝은 얼굴로 로빈에게 다가왔다.
“후작이 여기 있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운 좋게 물건까지 팔았군. 역시 후작이 나에게는 복덩이인 모양이야.”
“물건이 괜찮으니까요. 진짜 대단하네요. 저런 물건이라니. 마법 공학자를 긁어가셨다더니 공학자들이 제 몫을 톡톡히 한 모양이에요.”
리아넨이 나와 거래하며 이런저런 이득을 많이 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복덩이라니.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오히려 다른 영주들이 리아넨에게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저런 물건이 널리 보급되면 더욱 안전하게 큐브를 클리어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리아넨 역시 많은 돈을 벌겠지만, 제국은 요즘 돈보다는 안전을 중요시하는 추세였다.
“이번에 레오니스 쪽에서 물건을 사용해 레드 큐브에서도 그 유용함이 인정되면 바로 군납부터 들어갈 생각이야. 역시 황실로 들어가야 돈이 되니까. 황실과 거래하기 시작하면 재료 수급도 양호해지니 더 많은 물건을 만들 수 있겠지.”
“그래요? 이런 걸 양산할 수 있는 건가요?”
“아직은 그 정도는 아니야. 재료가 워낙 많이 들어가야지. 우선 만든 건 열 벌인데, 반을 레오니스 쪽에 넘기고 분위기를 볼 생각이야. 역시 문제는 재료라서 말이야. 알다시피 제국에서 가장 많은 소재를 취급하는 곳이 황실이잖아?”
“그건 그렇죠. 황실과 거래해서 많은 물량을 확보하겠다는 건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요. 저 정도 물건이면 황제 폐하께서도 동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런데 가격은 얼마예요?”
“제작비는 당연히 비밀이고, 판매가는 5만 골드 정도로 생각 중이야. 사실 남는 것도 별로 없어. 지금 노리는 건 기술의 축적이니까.”
가격 미쳤네. 저거 한 벌에 바이브레이터가 대체 몇 개야? 금으로 처발라도 저거보다는 싸겠다.
지금 기술력으로는 저 정도가 한계인 모양인데, 그래도 너무 비쌌다. 욕심나긴 해도 당분간은 상황을 지켜봐야 할 거 같았다.
“그래도 후작이 구입하겠다면……. 한 벌당 혼 래빗 거시기 500개로 퉁 칠 수 있다네. 어떤가?”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이 양반이 대체 뭘 하려고 그걸 500개씩이나……. 미처 다 쓰기 전에도 거시기가 헐겠다, 이 양반아.
하지만 1:500이라면 은근히 끌리는 제안이긴 했다. 요즘 그게 개당 80골드 정도에 팔려 나가니 손해도 아니었고. 딴에는 지인 세일인 모양인데 레오니스 쪽에서 사용해 보고 레드 큐브에서도 건재하다고 확인되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거 같았다.
영지 기사들을 철저하게 훈련한 레오니스 공작가와 새로운 무구를 개발한 리아넨 공작가.
또한 내 눈길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다른 영주들까지.
그동안 내가 그랬듯 다른 영주들도 생존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큐브가 완전히 사라지는 그날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 * *
리아넨 쪽에서 제작한 마법 갑주에 혹한 로빈은 다음날 바로 주노를 불러 상단의 상황이 어떤지부터 점검했다. 영지에서 생산한 물건이 얼마나 팔리는지, 그리고 새로운 물건의 개발은 어떻게 되어가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주노는 기다렸다는 듯 로빈에게 몇 가지 물건을 내밀었다.
처음 보는 생소한 물건부터 왠지 익숙한 물건까지.
이것들이 영지 상단에서 밀고 있는 신제품인 모양이다.
“음… 이건…….”
“어머~ 이건 그거네요~”
“예, 맞습니다. 예전에 영주님이 검스라고 부른 그 물건입니다.”
“이걸 양산할 수 있게 된 건가요?”
대수림 안에서만 자생하는 식물이 주원료라 대량 생산할 수 없었던 검은 스타킹.
하지만 주노는 이걸 발견하자마자 무슨 냄새를 맡은 건지 자신이 만들어보겠다고 요청했었다. 물건 자체도 보온성이 좋은데다가 검스가 널리 퍼지는 건 언제나 옳은 일이라 가능하면 해보라고 로빈 역시 흔쾌히 허락했고.
그런데 벌써 그 결과물이 나온 모양이다.
하지만 기껏해야 영지민들에게나 팔 거로 생각했는데 이걸 황도에까지 가져오다니. 이게 상품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우선 튼튼한 것보다 찢어지는 것 위주로 생산할 생각입니다. 생산 원가도 줄일 수 있는데다 더 많이 팔 수 있으니까요. 어차피 성인 용품으로 팔 생각이라 최대한 헐겁게, 그리고 투명하게 만든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영지민들에게 시험적으로 배포했을 때는 찢어지는 얇은 재질이 가장 호평이었다고 이야기하는데, 할 말은 많았지만 굳이 따지지 않고 그냥 해보라고 했다.
안 팔리면 그냥 나만 사용하든, 아니면 영지민들에게 나눠 주면 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생산 원가가 많이 드는 것도 아니었고.
“좋아요. 그건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이건 뭔가요?”
신제품 검스는 그렇게 처리하기로 하고 다음 물건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게 모양으로 된 금속 재질 고리 세 개가 줄로 연결되어 있고, 그 끝에는 막대기와 버튼이 달린 물건.
로빈은 이게 뭔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노의 설명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 말았는데.
위~잉~
“그러니까 저 고리를 유두와 클리토리스에 걸어놓고 이 스위치를 누르면 저렇게 진동한다는 거네요.”
“어머~ 이렇게 경쾌한 진동이라니…….”
주노가 선보인 물건은 결국 부착형 바이브레이터.
막대형 바이브레이터인 그레이트 A보다 소지가 간편하고 부피가 작아 일상생활 중에도 부착해 즐길 수 있는데다, 그레이트 A와 달리 재질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고급 재료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가격까지 올릴 수 있다며 사업성을 어필했지만 로빈으로서는 이게 뭔가 싶을 뿐이었다.
“정말 대단한 기술력이네요.”
기술의 발달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마나석이 늘어나며 마나석 가공 기술 역시 발달했고, 그렇게 발달한 기술로 작게 자른 마나석을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저런 물건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그 대단한 기술력으로 저런 것이나 만들고 있다니, 어찌 애석하지 않을까?
“다 좋은데, 왜 우리 영지는 이런 것만 만드는 걸까요? 이걸 개발한 사람이 누구라고요?”
“영지의 마법 공학자 분들이 소일거리로 만든 걸 공방 거리의 공학자들이 개량한 겁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지요?”
“공방 거리의 공학자들이면……. 예전에 그레이트 A를 처음 개발한 그 사람들이죠?”
“예, 그렇습니다.”
“애당초 만드는 사람부터 글러 먹어서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하, 어떻게든 그때 제대로 된 공학자들을 충원했어야 했는데.”
영지의 마법 공학자들이면 히센의 그 친구들을 의미했다.
여자를 밝혀 지금도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그 공학자들.
모야족 풀장을 개량해 겨울에도 늘씬한 미녀들을 볼 수 있게 사비를 털기도 하고,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엉뚱한 남자들.
그리고 공방 거리의 공학자들은 그레이트 A를 개발한 남자들이니 더 말해 뭐 하겠나.
변태 마법 공학자와 변태 연금술사, 그리고 은근히 변태적인 영지민들까지.
그런 자들이 즐비하니 결국 만들어지는 것 역시 바이브레이터나 섹스 보조제, 그리고 성인 용품 버전의 검스처럼 므흣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전에도 초강력 정력제인 혼 래빗 거시기가 우리 영지의 주력 상품이었으니.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의 나는 이런 거나 팔아먹고 살 팔자인가 보다.
이런 게 생각보다 돈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오늘 리아넨 공작이 가져온 온두라스를 봐서인지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어쨌든 만든 물건이니 이 물건의 사업성을 검토해 봐야 했다. 이건 검스와 달리 제법 많은 생산 비용이 필요한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좋아요. 그런데 이게 무슨 메리트가 있어요? 이것과 비슷한 용도의 그레이트 A가 있잖아요. 이건 그레이트 A보다 더 비쌀 수밖에 없는데 과연 이걸 살까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남성용 오나홀을 만드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왠지 영지의 기술력이면 막대기를 밀어 넣었을 때 윙~ 하고 옥죄여주는 오나홀도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푸념조로 타박했는데, 주노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다이앤이 반박하고 나섰다.
“남성용 오나홀이 왜 필요해요? 그런 오나홀보다 훨씬 느낌 좋고 맛있는 생체 오나홀이 주변에 쌔고 쌨는데요. 그럴 여유가 있으면 차라리 여자를 찾아 질싸 하는 게 훨씬 좋죠.”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