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그렇게 따지면 이것도 마찬가지지. 살아있는 바이브레이터가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 여성용 성인 용품이 왜 필요해?”
다이앤과 같은 논리로 그대로 반박했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항변에는 로빈도 대답할 말이 궁색해졌다.
“그거야 남자는 한 번 찍 싸면 바로 흐물흐물해지잖아요. 물론 로빈은 아니지만 다른 남자들도 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리고 로빈도 그래요. 막대기는 한 개인데 구멍은 아홉 개거든요. 그러니 당연히 이런 물건이 필요하죠.”
…이건 뭐라고 반박하기도 힘드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남자의 생물학적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데 할 말이 있나.
그렇게 논리에서 패배해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있는데 다이앤의 설명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오늘 처음 본 물건인데 얼마나 분석이 빠른지.
확실히 다이앤은 평범한 영주 부인으로 만족하기에는 과분한 인재였다.
“그리고요. 이 물건은 그레이트 A와는 전혀 달라요. 그레이트 A는 불편해서 침실에서밖에 못 쓴다고요. 하지만 이건 아니죠. 부착한 상태로 평소처럼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니까요.”
이건 아까 주노가 설명한 내용이었다. 로빈으로서는 딱히 동의하기 힘든 내용이었고.
“아니, 누가 이런 걸 끼고 생활해? 그리고 그레이트 A도 팬티 안쪽에 넣으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거든. 불룩 튀어나오긴 하지만 그런 걸 뭐라 할 사람도 없잖아?”
어차피 그레이트 A가 불뚝 튀어나와 있어도 그걸 달고 있는 여자를 보고 뭐라 욕할 사람도 없는 세상이라 그 점을 지적했다. 노브라, 노팬티로 다니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세상인데 바이브레이터 정도야.
하지만 다이앤의 이야기는 방향이 전혀 달랐다.
“에이, 로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건 당연한 거죠. 그게 아니라 이걸 고정하려면 팬티가 필수인데, 그러면 끄고 켜는 게 불편하잖아요. 노팬이면 자꾸 빠지고요. 그렇다고 진동하는 걸 그냥 넣고 생활하면 계속 질질 쌀 텐데 어떻게 정상 생활이 가능해요?”
…아니, 정상 생활을 따지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
사실 난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지 지금도 궁금하거든?
“하지만 신제품은, 음……. 그레이트 A의 상위 버전이니 그레이트 B라고 부르면 되겠네요. 그러니까 그레이트 B는 딱 부착해 놓고 스위치로 켜고 끄니까, 언제나 원할 때만 진동시킬 수 있잖아요? 본체에 스위치가 달려있는 그레이트 A보다는 한 단계 진보한 물건이죠.”
“…그건 그렇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 스위치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다는 거예요. 제가 이걸 달고 그 스위치를 로빈에게 맡겨놓으면……. 아흑, 생각만 해도 짜릿하거든요.”
그래, 우리 앤도 은근히 변태였지. 워낙 정상인 코스프레에 능해서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내게 반한 첫날부터 노브라로 대시한 과감한 여자였으니까.
“맞습니다. 마님의 말씀대로 이 물건은 그걸 노리고 만든 겁니다. 스위치가 달린 손잡이와 고리 부분을 연결하는 선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획기적인 부분이고요.”
그러니까, 여성을 위해 만들었다기보다 처음부터 이걸 켜고 끄면서 여자를 농락할 남자들을 타깃으로 만들었다고?
듣고 보니 전생의 AV에서 그런 플레이를 본 것도 같다.
사람 생각은 역시 다 거기서 거기인가? 이쪽에서는 생소한 개념인 거 같은데 그걸 떠올려 이딴 물건까지 만들다니.
“…멋져. 이걸 그 꼬맹이에게 달아놓고 그레이트 V로 뒤를 후비면…….”
…넌 또 왜 이러냐?
지금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린까지 한마디 보태면서 로빈도 이 물건의 상품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뭔가 떠올라 개선책까지 제시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러면 아예 고리 세 개에 작은 구체까지 하나 추가해서 네 개로 하죠. 하나는 애널용으로요. 또, 네 개의 진동 부분이 한꺼번에 진동하는 게 아니라 선별적으로 진동할 수 있으면 더 낫겠네요. 번호대로 1234라고 하면 1번과 2번, 아니면 1번부터 4번까지. 이런 식으로요.”
“오, 그렇군요. 그러면…….”
“어머, 맞아요. 그게 좋겠어요.”
생각나는 대로 떠들었지만 역시 영주님이라는 듯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주노의 눈빛에 아차 싶었다. 이게 또 뭐라고 그렇게 적극적으로…….
오늘은 진짜 이런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없나 보다.
그렇게 주노는 개선책까지 얻어 희희낙락해 물러가고 로빈의 방에는 그와 다이앤, 그리고 린만 남았다.
로빈은 자괴감에 지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때 다이앤이 린을 쓰다듬으며 은근한 어조로 나긋나긋 이야기했다.
“호호, 아까 그 고리 말이야. 은근히 반지랑 닮은 거 같지 않니? 그래서… 실비보다는 우리 린이 먼저일 거 같은데…….”
“…어… 언니?”
뼈 있는 다이앤의 한마디와 그 이야기에 벌벌 떠는 낮이밤져 린.
로빈도 저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기에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애처롭게 쳐다보는 린의 눈빛을 슬쩍 외면했는데.
그러니까 사건은 1년 몇 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도에서 공을 세운 로빈은 영지로 귀환해 황제에게 뜯어낸 아이템을 린에게 선물했었다.
당연히 린은 로빈의 선물에 크게 기뻐했고.
하지만 그 형태가 반지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이 세계에서는 결혼식 때 필수적으로 반지를 교환하는 풍습이 없었다. 그래서 예물은 주고받았지만 다이앤에게 반지를 선물한 적은 없었고.
하지만 이 반지란 물건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는데, 아끼는 부인에게 소유욕을 표현할 때 반지나 초커를 선물하는 경향이 있단다.
문제는 로빈이 그런 시시콜콜한 사실까지는 몰랐다는 거였다.
기본적으로 두 여자에게 자애로운 편인 다이앤이지만 특정 부분에는 예민한 면이 있어 자신도 받지 못한 반지를 린이 먼저 받았다는 사실에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호호, 반지네~ 이건 누가 준 걸까? 혹시~ 로빈일까?”
“…이게 뭐야. 나도 상 받을 자격이 있는데, 이 멍청이만 상을 받았잖아? 이게 말이 돼? 이게 영지냐?”
거기다가 흡연통을 개발해 상을 받을 생각에 흐뭇해하던 실비아까지 가세했으니 그 기세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둘은 로빈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밤새 린을 괴롭히며 로빈에게 시위했을 뿐.
그런 걸 즐기는 린이 도저히 못 버티고 로빈에게 사정사정할 정도였으니 그때 다이앤이 내린 벌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으리라.
만약 린 스스로 자신이 잘못(?)했음을 마음속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면 몇 번이나 붉게 변해 난장판이 벌어졌을 것이다.
나중에 물으니 그녀 자신도 다이앤보다 먼저 반지를 받은 건 잘못임을 마음속 깊이 반성하고 있어서 참을 수 있었단다. 받을 때는 너무 좋아서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때 로빈은 비겁하게도 린의 애원을 외면했었다. 전생에서도 긴급 피난이란 게 있었으니 자신은 무죄라고 애써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따지고 보면 전적으로 린에게만 반지를 준 로빈의 잘못이지만, 그때 그 분위기에서는 도저히 끼어들 자신이 없었다. 그날 살벌했던 다이앤과 실비아의 기세는 로빈이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사건은 다음 날 로빈이 다이앤과 실비아에게 따로 선물을 마련하면서 마무리되었다.
다이앤에게는 예쁜 반지를, 그리고 실비아에게는 투박하지만 자극적인 형태의 초커를.
둘이 원하는 대로 선물을 준비한 것이다.
그렇게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린의 뇌리에는 다이앤이 진심으로 화내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지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니 저렇게 농담조로 이야기를 꺼내는 다이앤의 모습에 흠칫하는 것이다.
“하하, 농담은……. 어쨌든 앤은 그 물건이 제법 괜찮을 거란 말이지?”
“예, 로빈. 제가 그걸 딱 차고 있고 로빈이 원할 때 아무 때나 절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특히 연회장이나 식당같이 사람이 많은 곳에서요. 꼴리지 않으세요?”
“음…….”
뭔가 참 그렇긴 한데, 자극적인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런 류의 AV가 많이 제작되는 거겠지.
그리고 다이앤의 말이 맞는다면 그 물건도 제법 괜찮게 팔려 나갈 거 같았다. 주노의 설명대로 고리 부분을 보석으로 꾸미면 제법 고급품으로도 만들 수 있었으니 말이다.
주노와 면담을 마치고 로빈은 저택에서 하루 더 머물렀다.
그렇다고 마음 편하게 쉰 건 아니었다. 여러 가지 목적으로 귀족들이 저택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큐브와 관련된 군사적인 목적이었는데, 작년 겨울에 사냥한 마수의 가죽을 직거래하거나 자신들이 처리하기 곤란한 상급 큐브의 클리어를 부탁하는 요청이었다.
어떻게 알고 궁에서 나오자마자 이렇게 들이닥치다니. 황제가 있는 궁 안에 남아있으면 뭔가 귀찮은 일만 생길 거 같아 자리를 피했더니 이런 부작용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로빈의 정치적 성향이 이미 황도에 파다한 건지 정치적인 문제로 접근하는 귀족은 없었다는 거다.
이제 그레이츠도 레오니스나 크라우처럼 황제의 측근이지만 중앙에서 한발 물러나 영지가 위치한 지역 일대를 수호하는 거로 그 이미지를 확고히 한 것이다.
그동안 로빈이 돈을 벌기 위해 1년 넘게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얻은 이미지였는데, 그 역시 중앙에서 쓸데없는 일로 심력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그런 이미지가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 *
로빈이 귀족들과 면담하며 일을 다 처리할 때쯤, 드디어 황자 에단 엡솔루트 트와이드의 탄생 축하 연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로빈은 다이앤을 파트너로 삼아 황궁으로 출발했다. 행사가 행사고 거의 모든 귀족이 참여하는 연회라 호위인 린은 동행하지 못했다.
6년 전 황태자의 성인식 연회에서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히 있다가 황태자만 구경하고 돌아왔고, 승작 연회에서는 귀족들의 적대적인 시선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이번 연회에는 로빈에게 호감을 품은 귀족들이 대거 접근해 서로 인사하기 바빴다.
그레이츠의 위명도 그렇지만 로빈에게 구원받은 영지의 영주들이 오랜만에 만난 로빈에게 인사하러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로빈이 가장 처음 구원했던 미네 남작령의 미네 남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 그레이츠 후작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영지 일이 바쁘다 보니 인사도 못 드렸군요. 제가 진작에 찾아뵀어야 하는 건데.”
“아니에요, 미네 남작. 서로 다 바쁜데요, 뭘. 영지는 어때요?”
“하하, 후작님의 말씀대로 영지민들을 위주로 치안대를 꾸리고 그쪽에 큐브를 맡겼더니 점점 상황이 좋아지더군요. 나중에 칙령이 내려온 후에는 그들을 바로 영지 클리너로 삼았습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미네 남작이 영지를 잘 꾸려 나가는 게 저를 도와주는 거예요.”
“하하, 그렇게 되나요? 어떻게든 은혜를 갚고 싶어도 방법이 없군요. 저희가 입은 은혜가 작은 게 아닐진대……. 나중에 저의 힘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네, 말씀만 들어도 든든하네요.”
로빈을 찾아오는 귀족들은 대부분 이런 분위기였다.
로빈에게 영지를 구원받고 은혜 갚을 날을 기다리겠다는 귀족들.
대부분 북부의 영지들이었는데 이미 북부에서는 그레이츠가 그들의 우두머리로 인정받은 지 오래였다.
모든 게 돈을 벌기 위해 발악하며 지낸 인고의 세월 덕분이었다.
몇몇 귀족과 소소한 담화를 나눈 로빈은 잠시 쉬기 위해 연회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아직도 기억에 선한 예전의 그 복도로 들어섰는데.
“여기는……. 기억이 나네.”
상황 룩센 대제의 취향대로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쭉 걸어놓은 복도.
그리고 그 가운데 자리 잡은 고급스러운 소파.
로빈이 저번 승작 연회 때 귀족들을 피해 나온 곳이며, 다이앤과 처음으로 대화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헤~ 그렇네요. 여기서 로빈을 처음 만났었는데…….”
“난 처음이 아니었어. 사실 황제 폐하의 성인식 날에도 널 봤었거든.”
“어머, 그랬어요?”
“응, 솔직히 너무 내 취향이라 당황했었지. 게다가 뭔가 공허한 눈빛으로 멍하니 있는 모습이 참…….”
“에이~ 로빈도 참……. 혹시 그때 반한 건가요? 그때면……. 나도 열네 살이고, 로빈은 겨우 열두 살이었잖아요?”
“사람이 사람에게 반하는 데 있어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지. 물론 그때는 겨우 자작이라 헛된 생각이라고 애써 마음에서 지웠지만…….”
자신이 로빈이라는 존재를 알기 한참 전부터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그의 솔직한 고백에 얼굴이 홧홧해진 다이앤은 수줍게 다가와 로빈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