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그러고 보니, 그때 다이앤은 참 까칠했는데 말이야. 아카데미에서 만났을 때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그렇게 까칠하던 여자가 갑자기 사근사근하니…….”
“어머~ 처음부터 알고 계셨어요? 먼저 알아챈 사람은 없었는데…….”
“그 정도 변장으로 내 눈을 속일 순 없지. 특히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일 경우에는 더 그렇고.”
“히힛, 로빈도 참…….”
물론 당시에는 긴가민가해 정보 창에 의존하긴 했지만 그건 그녀가 아카데미에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그랬던 거고 첫눈에 알아본 건 맞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대체 그때는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랬던 거야? 내가 다이앤을 못 알아본다 생각했어도 그렇게 적극적일 이유는 없었잖아? 혹시 그때 보고 새삼 반했다든지?”
다이앤도 그때가 생각났는지 얼굴을 더욱 붉혔다. 아마 속옷도 입지 않고 자신을 유혹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그런 거 같았다.
“음……. 사실 로빈을 처음 봤을 때는요. 뭐 이런 사람이 있나 그랬거든요. 이젠 희멀끔한 놈을 데려와 미남계라도 쓰나 싶어 예민했지만 그건 아니었으니까요. 날 예술 작품 보듯 그렇게 보고 있는데 미남계는 무슨…….”
“내 눈빛이 그랬나?”
“그랬어요. 나중에 생각하니 좀 서운하기도 했고……. 어쨌든 그랬는데 본격적으로 관심이 생긴 건 그때 그 티타임 때문이었죠.”
그 티타임이란 황제가 황태자 시절 3황자파 귀족들을 자극하기 위해 두 황녀와 티타임을 가지게 한 그 사건을 의미했다.
그때 뚱한 2황녀와 아무 말도 없는 1황녀를 앉혀놓고 차만 마신 후 바로 내뺐는데 그 모습이 제법 인상적이었나 보다.
“히힛, 우에나를 앉혀놓고 그렇게 무덤덤한 남자는 처음 봤어요. 적어도 3황제에게 빌붙어 뭔가 얻으려는 귀족은 아니라는 걸 그때 확신할 수 있었죠. 그러니까 뭔가 더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아…….”
“그런데 그 남자를 아카데미에서 딱 마주친 거 있죠? 게다가 그렇게 아슬아슬한 순간이라니. 딱 이 남자다, 싶더라고요.”
“그랬군.”
“사실 저도 무슨 다른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결혼까지 갈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고요. 다만……. 팔려가듯 시집가기 전에 뜨거운 연애라도 한번 해보자는 가벼운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그래?”
“네! 지금은 모든 게 완벽해요. 맛있는 남편과 귀여운 동생들, 자상하고 아기자기한 시부모님, 자유로운 영지 분위기. 게다가 아버님, 어머님께서도 근처에 자리 잡으시고. 이보다 좋을 순 없죠.”
멋있는 남편이 아니라 맛있는 남편이냐? 한 끗 차이인데 느낌이 좀.
하지만 그녀가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남편으로서 뿌듯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고.
사실 장인어른 내외가 영지에 자리 잡은 건 신전과 성물 덕분이지만 그 신전을 영지로 초청한 게 자신이니 자신의 공이라 해도 무방했다.
즐거워하는 다이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는데 연회장에서 황제의 입장을 알리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행사가 시작될 시간이 된 것이다.
“어머, 시작하나 봐요.”
“그래, 가자.”
* * *
로빈과 다이앤이 옛 기억을 떠올리며 즐겁게 이야기하다 돌아온 연회장에는 황제가 입장한 후 본격적으로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지루한 행사 중에서도 황제의 아들, 황자 에단 트와이드의 귀여운 용모는 빛이 날 지경이었다.
“와……. 진짜 귀엽네요, 우리 조카님.”
“…그러게. 저건 정말…….”
단상 위 비스듬히 기대놓은 요람에 걸터앉은 에단은 수많은 사람의 눈이 자신에게 향해있음에도 울기는커녕 두리번거리며 방긋방긋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인성은 좀 글러 먹었지만 외모로 따지면 전국구인 황제와, 은근히 음흉한 면이 있지만 제국에서도 손가락 안에 든다는 황후의 아름다움을 꼭 빼닮은 황자는 웬만한 인형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귀여웠는데, 황실 특유의 영롱한 푸른빛이 감도는 눈동자와 이제 막 고개 들기 시작한 금빛 머리카락이 황제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아마 저들 중 황제의 탄생 연회를 지켜봤던 귀족들은 황자를 보며 예전 황제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고 있을 것이다.
단상 옆에 위치한 귀빈석에 자리 잡은 장인어른 역시 감회가 새로운지 촉촉이 젖는 눈으로 황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눈빛이 애틋한지, 아마 당분간은 두 분 모두 이곳에서 지내실 거 같았다.
아니, 저렇게 귀여운 손자를 두고 쉽게 돌아갈 수 있는 할아버지는 아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아이도 저렇게 귀여울까요?”
“글쎄, 나랑 다이앤의 아이면 무조건 귀여울 거 같긴 한데…….”
“아이를 가지는 걸 생각해 봐야겠어요. 좀 더 빨리요.”
“음, 아이라…….”
둘의 가족계획은 스무 살 이후로 미뤄 놨고, 다이앤도 동의한 일이지만 귀여운 아이를 보니 마음이 움직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로빈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로빈은 본능적으로 아이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본인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런 거부감이었다.
물론 세상이 아직 위험하다는 이유로 합리화하고 있지만 그런 것보다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아이를 자꾸 미루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생각해 보면 전생에서도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로빈의 가정 환경 탓이 컸는데, 이쪽 세계로 와 안정적이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며 그런 마음이 많이 희석되었는데도 아이를 피하고 있다니.
로빈은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모든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그런 부류의 페널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자신은 불임 상태일 가능성이 컸다. 혹시 정말 그럴까 싶어 불안한 마음에 차마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 흔한 전개 방식이지. 만약 그렇다면……. 최후 퀘스트 보상은… 아이일 가능성이 크겠군. 뭐,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혼자 작게 중얼거린 로빈은 다이앤의 손을 꼭 잡고 깊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지금 당장은 다이앤에게 대답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행성 파괴 병기급 귀여움을 자랑하는 황자 덕분에 연회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로빈은 왠지 이 화기애애함이 조금 불안했다.
“원래, 이런 분위기에서 큰일이 터지곤 하는데 말이야.”
“네?”
“아니, 이상하게 좀 불안하네.”
그러고 보면 황제의 즉위식 날 큐브가 나타나 난리가 났었다.
무릇 주인공이란 사건을 몰고 다니는 존재.
주인공의 아이가 세상에 소개되는 이 중요한 날 아무런 사건도 터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그리고 로빈의 불안은 여지없이 맞아 들어갔다.
“폐하!! 리아누스에서…….”
연회장의 분위기를 단번에 망치는 비보가 전해졌다.
리아누스 후작령에서 큐브가 폭발해 영지가 위험하다는 안 좋은 소식.
단순한 큐브도 아니고 블루 큐브가 폭발한 거라 영지 자체 전력으로는 막을 수도 없단다.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영지의 주인인 리아누스 후작은 황망함과 곤혹스러움으로 몸을 떨었다.
“그래,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냥 얌전히 넘어갈 리가 없지. 저 양반은 자리를 옮겨도 이런 식으로 사고를 치네. 물론 전적으로 저 양반의 잘못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소설 속에서는 후사가 없었던 작센 백작령을 맡았던 리아누스 후작.
작센 백작령을 맡은 리아누스 후작은 항복하고 망명하길 원하는 해상 왕국 세력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격해 그들을 모조리 수장시킨다.
물론 시국이 시국이고 적군이 영지로 들어섰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잡음을 염려한다면 잘못된 판단이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문제는 그 과정.
갑작스럽게 공격당해 궁지에 몰린 해상 왕국의 병력은 죽을힘들 다해 저항했고, 결국 그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제법 많은 수의 병력이 상한데다가 자신 역시 큰 상처를 입고 만다.
사실 그건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었다. 정작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으니까.
다친 리아누스 후작은 황실에 누를 끼칠 수 없다며 자신의 부상 사실을 황실에 알리지 않고 큐브 클리어를 강행.
결국 본인도 사망하고 큐브마저 폭발해 남부 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물론 그 당시 제국은 지금의 제국보다 상황이 훨씬 안 좋았고, 황제 역시 큐브 클리어에 곤혹을 치르고 있었지만, 근성과 정신력으로 큐브를 극복하려 한 후작의 태도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일이 또 있을까, 걱정되어 라이언을 작센 백작으로 밀었던 건데, 여기서 이런 식으로 일이 터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이번에 터진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황도에는 전국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기사들이 모조리 모여있었으니 말이다.
어떤 놈이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귀족들을 호위하기 위해 모여든 기사들만 동원해도 원만한 놈은 바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연회는 중지되고 바로 토벌대가 꾸려졌다.
대장은 황제 본인, 부장은 레오니스 공작과 로빈, 그 외 대부분의 영주가 토벌대에 참가했다.
이곳에 모여있는 기사들의 수만 수천이라 대부분의 기사가 참여한 이 토벌대의 규모는 그야말로 역대급이었다.
“바로 토벌하고 돌아와 연회를 계속한다! 그리고 이번 토벌에서 큰 공을 세운 기사에게는 특별한 상을 내리겠다! 모두 출진하라!”
황제가 상으로 내건 건 다름 아닌 아이템이었다.
지금도 특별한 능력이 있는 큐브제 완제품은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고, 무려 여덟 점의 아이템을 부상으로 내걸자 토벌대의 사기 역시 하늘을 찔렀다.
아이템이라니, 로빈도 솔깃할 정도였다.
* * *
토벌대가 출발해 기사들이 빠져나간 황도.
남부 지방에서 큰일이 벌어졌지만, 황도는 아직 축제 분위기였다. 민심이 어지러워지는 걸 염려한 황제가 황도의 백성들에게는 아직 소식을 알리지 않은 것이다.
만약 황제가 바로 처리하고 돌아온다면 아마 황도의 백성들은 남부에서 난리가 났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냥 지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황도의 한 술집에서 오늘도 큐브를 클리어한 세이라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같이 큐브를 클리어한 듀발과 드라나 남작 영애 레지, 그리고 드라나 남작령의 기사 둘이 함께였다.
“캬~ 이 맛이야! 역시 큐브를 클리어하고 마시는 술이 최고라니까!”
“아가씨, 적당히 마시시죠. 자꾸 이러시면 영주님께 보고 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좀 봐줘, 듀발 오빠.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언제 마시겠어?”
“하~ 오늘 하루가 아니니 그렇죠. 어제도 만취할 정도로 드시지 않았습니까?”
“하하, 듀발 경. 황도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겠습니까?”
“그래요, 듀발 경.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뭐…….”
웃는 낯으로 술잔을 권하는 드라나 남작 영애와 기사들에게 차마 뭐라 하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는 듀발.
하지만 저렇게 퍼붓듯이 마시는 세이라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물론 이곳에서 저택까지 그리 먼 거리도 아니고 황도는 치안이 좋은 편이라 크게 걱정할 일은 없지만 모든 사고는 그런 방심에서부터 출발하니 말이다.
그래서 듀발은 술도 마시지 않고 애꿎은 안주만 뒤적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드라나 남작 영애와 헤어져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
술집 근처 골목에 들어섰을 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먼저 깨달은 건 술에 만취해 비틀거리며 걷던 세이라였다. 평소처럼 마나를 이용해 술기운을 줄이려고 했으나 그게 되지 않았으니까.
“오빠, 마나가 이상해.”
“응? 그러고 보니…….”
마나의 축복을 받은 세이라는 자신의 마나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빠르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뭔가 이상하다고 듀발에게 이야기했고, 그 역시 자신의 마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에게 접근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조금 전까지 웃으며 술잔을 나누던 드라나 남작의 기사 둘과 남작 영애였다.
“마나도 못 쓰는데 그냥 얌전히 항복해. 나도 이런 일에 검을 쓰고 싶진 않으니까. 여자만 넘겨주면 넌 그냥 보내주겠다.”
“역시 네놈들이었나? 도대체 언제 이런 독을 쓴 거지? 마나를 못 쓰게 만드는 독이라니…….”
“네놈이 술을 먹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음식에도 독을 쓸 수밖에 없었지. 방패를 버려라.”
“하, 음식인가…….”
술에 취해 세이라를 간수하지 못할 것만 걱정했지, 설마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라 음식까지 신경 쓰지 않은 건 듀발 자신의 불찰이었다.
다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일을 벌이면 어떻게 수습할 생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