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
듀발은 어떻게든 아가씨를 구해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자, 와라.”
“…역시 그냥은 안 된다는 거군.”
방패를 들고 세이라 앞에 버텨 선 듀발은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하~ 하…….”
“이런 미친… 거북이 같은 새끼가…….”
“흑… 오빠…….”
마나를 쓰는 기사 둘이 거칠게 밀어붙였지만 듀발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비록 마나를 사용하진 못하지만 술도 마시지 않아 정신은 멀쩡했고, 지금까지 단련한 체력과 기술만은 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나를 다 쓰고 체력만으로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도 듀발에게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으니까. 특히 언데드가 난동을 피운 그 시절에는 마나 없이 몇 시간을 버티기도 했었다.
듀발에게도 계획은 있었다.
아무리 황제가 친정을 떠나 기사단을 몰고 갔어도 이곳은 황도.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계속 버티다 보면 황도를 순찰하는 순찰대가 자신들을 발견할 테고, 그러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상대도 알고 있는지 상대의 손속에서 조바심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이대로 시간만 끌면 우리가 위험해. 뒤에 있는 계집을 노려.”
“그래, 그게 좋겠어.”
하지만 이런 팽팽한 대치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기사들이 듀발 뒤에 숨은 세이라를 본격적으로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윽!”
놈들이 세이라 쪽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자 자신과 세이라를 모두 보호해야 하는 듀발도 틈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가까이에서 보호하고 있어도 둘 사이에는 틈이 존재했고, 그 틈을 파고들면 아무리 듀발이라도 안정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마나라도 사용할 수 있으면 몰라도 지금은 그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안전을 도외시한 듀발은 세이라에게 날아드는 칼날을 몸으로라도 막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간신히 놈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도 잠시.
마나를 머금고 세이라를 죽일 듯 파고드는 검격을 막기 위해 무리하게 움직이다 제법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놈들이 세이라를 노리는 척 큰 공격을 쏟아붓다 교묘하게 방향을 바꿔 다시 듀발을 노린 것이다.
“하하, 드디어 쓰러졌군. 이런 질긴 놈.”
“안 돼! 이거 놔!”
“얌전히 있어, 이년아!”
듀발이 큰 상처를 입고 한쪽 무릎을 꿇자 음습하게 웃으며 그를 걷어차 쓰러트린 기사는 듀발 뒤에 숨어있던 세이라를 강제로 끌어냈다. 그리고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상대의 손길을 피하고자 발버둥 치는 그녀의 뼘을 강하게 내리쳤는데.
그런 기사의 난폭한 행동에 어두운 낯빛으로 지켜보던 남작 영애가 놀라 소리쳤다.
“안 돼요! 멀쩡하게 데려간다고 하셨잖아요!”
“닥쳐! 그러고 있으니까 네년이 진짜 남작 영애인 줄 알아?”
“하지만…….”
“큭, 아가씨는 끌고 갈 수 없다!”
그리고 그 틈에 다시 일어선 듀발이 놈을 물고 늘어져 세이라를 끌고 가지 못하게 막았다.
상처만 수십 군데요, 옆구리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는 듀발.
그녀를 막아선 두 다리가 후들거림에도 눈빛만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하, 미치겠네. 죽이고 싶진 않았는데…….”
“정 안 되면 죽이기라도 하라셨으니……. 우리를 원망하지 말아라.”
시간은 없는데 상대가 자꾸 들러붙으니 짜증이 치밀어 오른 기사는 그냥 듀발을 죽이고 세이라마저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때.
“윽! 뭐… 뭐야, 이게……?”
“크…윽……. 도… 독?”
“학!”
기사들, 그리고 드라나 남작 영애까지 모조리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게 아닌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던 듀발은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놈들의 생사를 확인했다.
기사 둘은 절명.
드라나 남작 영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어… 어쩌지?”
“남작 영애는… 살려야 합니다, 아가씨. 아가씨,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으…응.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어떻게든.”
“그럼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죠. 더 이상 이곳에 있는 건 위험할 거 같습니다. 그곳에는 마님이 계시니…….”
죽은 기사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드라나 남작 영애가 살아있어야 난처함을 피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듀발은 어떻게든 남작 영애를 살리기 위해 억지로 들쳐 메고 저택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후, 황도를 순찰하던 순찰대가 기사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치안청에 알렸다.
* * *
그 시각, 리아누스 후작령.
황제의 명으로 출동한 수천의 기사가 게이트를 타고 영지에 도착해 도열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물론 덕분에 황제가 꽤 큰돈을 썼지만, 오히려 게이트가 뚫려있는 리아누스 후작령에서 일이 벌어진 걸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빨리 출동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영지에서 폭발한 블루 큐브에서는 자이언트 웜이라는 지렁이같이 생긴 큰 벌레들이 튀어나왔는데 땅을 파고 들어가 이리저리 헤집으며 영지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자이언트 웜이면……. 대피처도 위험하네. 땅속에 박혀있는 놈이라 상대하기도 까다롭고. 그 책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런대로 상대할 수는 있겠지만…….”
자이언트 웜은 높은 등급에 비해 살생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인간을 통째로 꿀꺽 삼켜 잡아먹지만 한 번에 많은 먹이를 먹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수가 제법 많아 그것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자이언트 웜은 뭔가를 부수는 데 특화된 놈들이라 시간을 끌면 지하에 마련된 대형 피난처도 안전하지 않는데다가 영지가 파괴되어 물적 피해가 가중된다는 점이었다.
황제도 로빈과 같은 생각인지 서둘러 놈들을 공격하라 명했다.
“역시 저렇게 하나?”
로빈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비린내를 잔뜩 풍기는 큰 생선을 막대기에 매달고 자이언트 웜이 지나갔을 거라 생각되는 구멍 앞에서 흔드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큐브에서 드롭한 문서나 서적은 대부분 야설같이 엉뚱한 것들이지만 종종 의미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방랑 오크 라후치의 모험』이라는 서적이었는데, 오크가 세계를 탐험한다는 조금 어이없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소설 속에 나오는 다양한 몬스터와 그것들을 상대하는 라후치의 행동에서 큐브에 나오는 생소한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요령을 알아낼 수 있었다. 몇 번의 실험을 통해 그 소설 속 내용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지금 저 기사들의 엉뚱한 행동 역시 책에 적힌 라후치의 행동을 따라 하는 거였다. 자이언트 웜은 후각이 민감하고, 비린내를 풀풀 풍기는 생선을 특히 좋아한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내용이 사실인 듯 땅이 울리며 자이언트 웜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주인, 어떻게 할까? 가서 족칠까?”
“아니, 우린 대기. 분명 무리하는 기사들이 나올 거야. 우린 전력을 보존하고 있다가 다치거나 뒤로 빠지는 기사를 구해낸다.”
황제는 믿음직한 그레이츠 쪽에 예비대의 임무를 맡겼다.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뒤를 든든히 한 것이다.
공을 세울 기회가 줄어들어 불만스러울 수도 있는 임무였지만 공훈의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템 한 개는 무조건 그레이츠 쪽으로 넘기기로 하면서 그런 불만을 무마시켰다.
로빈도 싸우지 않고 아이템을 얻는 게 더 이득인데다 괜히 이상한 변수가 끼어들까 걱정되어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정신없이 자이언트 웜을 썰어대고, 여러 마리가 쓰러져갔지만, 생각보다 수가 많은지 계속 기어 나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 흘렀을까?
계속 기어 나오는 자이언트 웜을 상대하기 버거워하는 기사들이 점점 늘어갔는데.
“자, 투입. 위치는 좌측, 네 번째 무리. 1대 린과 20인. 우측 두 번째 무리. 2대 흑웅과 20인. 예비대 10인은 대기.”
“투입!”
그리고 기다리던 그레이츠의 전사들을 투입해 밀리는 기사들을 도와 자이언트 웜을 처리했다.
그렇게 꼬박 하루 동안 전투가 벌어졌고, 제법 많은 기사가 다쳤지만 적기에 투입한 예비대 덕분에 사망자는 극히 적었다.
성공적으로 작전이 마무리된 것이다.
“자! 우리가 영지를 지켜냈다! 모두 황도로 돌아가 축제를 즐겨라!!”
“와!!”
예상치 못한 이벤트였지만, 워낙 많은 기사가 투입된데다 등급 대비 전투력이 낮은 자이언트 웜이 상대라 생각보다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혹시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질까 걱정하던 로빈에게도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황도에서는 로빈이 예상하지 못한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다시 게이트를 타고 도착한 황도.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온 로빈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듀발과 얼굴을 들지 못하는 세이라, 그리고 처음 보는 여자가 한쪽에 묶여있는 이상한 상황에 당황해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심지어 사제와 실비아까지 저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로빈, 그러니까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그런 로빈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상황을 지켜본 다이앤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어이없던 로빈도, 감히 드라나 남작 따위가 자신의 여동생을 공격했다는 이야기에는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이 새끼도 지금 황도에 있는 거잖아? 진짜 뒈지고 싶은 건가?”
혼자 열을 올리고 온갖 욕설을 내뱉던 로빈은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드라나 남작이 병신이라도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공격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위나 군사력, 재력.
어떤 거로 덤벼도 상대가 안 되는데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였던 말인가? 그리고 뭔가 껄끄러운 기분이 계속 드는 게 의심스러운 점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마음을 조금 다스린 로빈은 우선 세이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놈의 속셈은 차차 생각해 볼 일이지만 저 망나니부터 어떻게 해야 할 거 같아서였다.
“야, 이게 말이 되냐?”
“…미안해, 오빠.”
“네가 만취할 정도로 술을 먹지만 않았으면 듀발이 저렇게 다치진 않았겠지? 정신 말짱하고 검만 있으면 마나가 없어도 그깟 기사 한둘은 상대할 수 있잖아, 안 그래? 정 안 되면 도망칠 수도 있는 거고.”
“앞으론… 안 그럴게.”
“하~”
뭐라고 더 하고 싶은데 항상 비글처럼 활기찬 녀석이 저리 축 늘어져 있으니 뭐라 하지도 못하겠다. 그래서 그쯤하고 다이앤이 알지 못하는 자세한 사정을 들어보기로 했다. 이 상황 자체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니까… 독? 그것도 마나를 못 쓰게 하는 독이었다고?”
“응. 마나가 안 움직였어. 지금은 실비 언니가 해독약을 만들어줘서 괜찮아졌지만…….”
“아, 그래서 실비아가……. 그런데 갑자기 기사들이 쓰러져 죽었다고? 알고 보니 독에 중독되었고?”
그리고 이 질문에 대답한 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실비아였다.
“맞아요, 영주님. 죽은 기사들은 모르겠는데, 저 아가씨는 독에 중독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지연성 맹독? 복용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독성이 생겨나는 그런 독인데, 저 아가씨는 복용량이 적어서 목숨을 건졌죠.”
“음, 대체 뭐가 뭔지…….”
우선 마나를 못 쓰게 하는 독은 제법 익숙한 물건이었다. 로빈이 이 상황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물건이었고.
예전에 황제를 중독시켰던 그 독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중독된 황제가 영지로 들어와 치료받은 일이 없었다면 실비아가 세이라를 그리 쉽게 해독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최소한 놈들의 입김이 어느 정도는 들어간 일인 거 같았다.
세이라를 납치해 뭔가 일을 벌이려고 했으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이 이뤄지기 전에 놈들이 사망해 버린 건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그러니까 기사들의 입을 막기 위해 독을 미리 먹였고,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히 세이라를 납치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듀발이 너무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예상 시간을 초과했다?
과연 그게 다일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로빈은 입까지 막힌 채 묶여있는 드라나 남작 영애를 확인하고는 허탈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름: 레지 드라나 (루지)
성향: 피학. 애정 결핍. 절망
타이틀: 버림받은 여자(UC). 단검 숙련자(UC)
심지어 이 여자는 드라나 남작 영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