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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284화 (284/303)

284화

로빈의 머릿속이 다시금 복잡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노란색에 가까운 그녀의 머리색이 점점 검게 변하더니 검은색에 가까운 갈색으로 변해버렸다. 녹색으로 반짝이던 눈동자 역시 칙칙한 갈색으로 변했고.

아무래도 머리색과 눈동자 색을 변형하는 그런 약을 먹은 거 같았다. 예전에 다이앤이 먹었던 그것과 비슷한 마법 염색약 말이다.

“뭐… 뭐야! 이게 왜 이래?”

지금, 이 순간 가장 놀란 건 아마 지금까지 이 여자와 함께 다녔던 세이라일 것이다. 물론 로빈 역시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재갈을 풀었다.

“넌… 도대체 뭐냐?”

“아버지가… 독을……. 이번 일만 마치면 딸로 삼아주겠다고 했는데…….”

재갈을 풀고 이것저것 좀 물어보려 했는데 이 녀석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분위기만 봐도 대충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어느 정도는 예상이 되었고.

간악한 드라나 남작에게 속아 결국 독까지 먹은 모양인데 눈에 초점이 없는 걸 봐서는 정신을 차리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릴 거 같았다.

이걸 어쩌나. 진짜 애매하네.

세이라에게 해를 끼치려 한 건 분명해 딱히 동정심이 생기진 않지만, 또 한편으로는 배신당해 넋이 나간 여자를 두들겨 패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 황제 폐하의 전령이 왔습니다. 즉시 입궁하시랍니다.”

“음…….”

거기다 황제가 사람을 보내 입궁하라는데 딱 봐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드라나 남작 쪽에서 무슨 제스처를 취한 게 아닐까 싶다.

따지고 보면 이 여자는 드라나 남작의 딸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 가치도 없었다. 이 여자가 무슨 증언을 하든 대세에 영향을 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 사정을 듣는 걸 뒤로 미루고 우선 황제부터 만나보기로 했다. 입궁하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 말이다.

“기사들이 죽은 것만 봐도 대충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상은 되는데, 그 정도로는 딱히 문제도 아니란 말이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로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황궁으로 향했다.

* * *

황제가 기다리고 있던 대전.

그곳에는 황제만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니라 꽤 많은 귀족이 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라나 남작도 같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놈은 가증스럽게도 로빈을 노려보며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자작극을 벌인 주제에 저렇게 리얼하게 화를 내다니, 여기가 저쪽 세상이었으면 아카데미도 한번 노려볼 만한 실감나는 연기력이었다.

“드라나 남작의 고발이 있었네. 드라나 남작 영애와 기사 둘을 그레이츠의 기사가 살해했다는 고발이지. 하지만 증거도, 증인도 없는데다 드라나 남작의 말만 믿고 고위 귀족의 기사를 처벌할 수도 없는 일이라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자네를 청했네.”

“…드라나 남작 영애가 죽었다고요?”

“그렇다네. 머리에 둔탁한 무엇으로 맞은 흔적을 남긴 채 사망했지.”

로빈은 드라나 남작이 자신을 고발할 거란 사실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드라나 남작 영애가 진짜 죽었을 거라 예상하진 못했다. 딸을 숨기고 죽은 척하는 것 정도는 예상했지만 말이다.

“죽은 사람이 진짜 드라나 남작 영애 맞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진짜 영애가 맞냐니? 인상착의를 확인할 때는 분명했네. 아카데미에 수학 중인 귀족 자제들도 드라나 남작 영애가 확실하다고 인정했고.”

아니, 그때 그 여자도 남작 영애가 아니었다니까.

아니지, 설마 아카데미에 다닌 건 남작 영애가 맞고 세이라랑 어울린 것만 남작 영애가 아닌 건가?

그렇다면 죽은 건 대체 누구야? 이래서 그 여자한테 전말을 들으려던 건데.

의문 나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죽은 여자는 진짜 드라나 남작 영애가 맞는가?

그럼 저놈은 이 일을 벌이기 위해 제 딸을 죽였다는 뜻인데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인지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럴 거면 대역이 왜 필요한데?

그리고 증인이 없다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만약 내 쪽에 죄를 덮어씌우려고 했다면 증인 정도는 만들어놔야 했다.

그런데 증거도 없이 나를 고발한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런 게 통할 리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건 그렇게 고발해서 유죄를 받아낸다 한들, 그 일이 내게 그리 큰 피해도 아니었다. 만약 죄가 인정되어 벌을 받게 된다 해도 내가 벌을 받는 게 아니라 남작 영애를 살해한(실제로 살해한 건 아니지만) 듀발이 받게 된다.

물론 듀발은 내 측근이고 개인적인 관계도 각별한 소중한 사람이지만 대외적으로 보면 기사 하나를 잃는 것에 불과하다. 다른 손해가 있다면 수하를 잘못 관리했다는 이유로 명망이 조금 깎여 나가는 정도.

이게 나와 원수가 되면서까지 드라나 남작이 얻으려는 거라면 그는 그냥 머저리에 불과했다.

“그레이츠 측 주장은 간단합니다. 드라나 남작의 기사들이 제 동생 세이라 그레이츠를 공격, 호위 기사인 듀발이 그들을 격퇴했습니다. 드라나 남작 영애는 모르는 일이고요.”

“이……! 그럼 내 딸은 왜 죽었단 말입니까?”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죠. 확실한 건 제 기사는 절대 남작 영애를 공격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로빈이 드라나 남작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자 황제도 고민에 빠져들었다. 로빈이 없는 사이 기사 하나가 실수를 했나 싶었는데 분위기를 보니 그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로빈을 잘 아는 황제로서는 지금 저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최소한 사람을 죽게 하고 저리 뻔뻔하게 나올 수 있는 녀석은 아니었다.

“…진심 어린 사과만 받으면 그렇게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전 이 일을 귀족 재판소에 제소하겠습니다!”

“음……. 알겠네. 그렇게 하도록. 그레이츠 쪽은 따로 할 말 없나?”

사과만 받으면 넘어갈 생각이었다고?

잘도 그러겠다. 그리고 사과는 내가 받아야 하는 거 아냐?

놈들의 정확한 목적이 무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가봐야 할 거 같았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됐으니 말이다.

“따로 할 말은 없습니다.”

“좋네. 그럼 이 사안을 귀족 재판소로 넘기겠네. 심리는 바로 내일 시작하지.”

그렇게 긴급회의가 급하게 마무리되고 로빈은 바로 황제에게 불려갔다. 황제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정확히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로빈 역시 황제에게 궁금한 점이 있어 바로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자네의 기사가 저지른 일이 아니란 말이지?”

“예, 사실은…….”

로빈은 자신이 알고 있는 걸 황제에게 그대로 전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황제의 표정도 시시각각으로 변했고, 마지막에는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 역시 이 일이 단순한 사건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이상하군요. 정말 이상해요.”

옆에서 같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젝트 역시 뭔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마나 독이라……. 그 독을 썼단 말이지. 뭔가 냄새가 나는군.”

“어쨌든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 확실한 거 같습니다.”

“그렇군. 그런 마나 독을 사용하는 건 놈들뿐이지. 예전에 나에게 사용한 것도 놈들에게서 나온 거고. 하지만 대체 왜 이런 짓을…….”

“우선 재판을 진행해 보죠. 놈들이 뭘 더 준비했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어쩌면 증인을 매수했을 수도 있겠군요.”

“매수라…….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드라나 남작이 요청한 증인들은 더 철저하게 살펴보겠네.”

“감사합니다, 폐하.”

아직 뭐가 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라 우선 재판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듀발을 잃는 건 사양하고 싶으니 말이다.

* * *

황제에게 상황을 전하고 저택으로 돌아온 로빈은 바로 루지부터 찾았다. 뭔가 알아낼 만한 게 있나 싶어서였는데, 다행히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렸는지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물론 로빈이 집 안에 들어섰을 때 세이라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던 그 분위기는 좀 묘했지만 말이다.

루지는 드라나 남작령 뒷골목 출신의 고아였다.

그러다 운 좋게 드라나 남작의 눈에 들었고, 남작 영애 레지 드라나의 몸종 겸 하녀로 일하게 되었단다.

“작년부터 일했다라……. 그래, 그래서?”

“아버… 아니, 남작님은 저에게 자상하셨어요. 이런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고요.”

그렇게 몇 달 잘해주며 환심을 산 후, 드라나 남작이 본색을 드러냈다. 남작 영애를 대신해 아카데미에 가서 몇 가지 일만 처리해 주면 루지를 수양딸로 받아주겠다고 유혹한 것이다.

“아가씨는 몸이 많이 약하셨어요. 전 그래서 그런 줄로만 알고 바로 승낙했고요. 어차피 촌구석의 남작 영애에게 관심을 가지는 귀족 자제들도 별로 없고, 제가 나서지만 않으면 들킬 일도 없을 거라 했거든요. 사실 실제로도 그랬고요.”

그러니까 아카데미에 입학한 건 드라나 남작 영애가 아닌 루지가 맞긴 한가 보다. 그렇다면 드라나 남작 영애는 대체 왜 죽었냐는 건데.

“…그건… 남작님이…….”

“뭐?”

드라나 남작의 딸 레지 드라나.

그녀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고, 다른 귀족 자제들, 영애들과 함께 낭만을 즐기는 아카데미 생활을 동경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을 대신해 루지를 아카데미로 보내겠다고 하니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는데.

“아가씨는 유약하고 자기주장이 없으신 분이세요. 하지만 그 일만은 받아들이기 힘드셨나 봐요. 남작님이 좋게 말해도 납득하지 않으셨고요. 그렇게 언성이 점점 높아지고 결국 폭언이 오고 갔어요. 그러다가… 화가 난 남작님이…….”

우발적인 범죄, 아니 사고였다.

화를 이기지 못한 드라나 남작이 손에 잡히는 걸 아무거나 잡아 던졌고, 그것이 남작 영애의 머리에 정확히 명중.

평소에도 몸이 약한 드라나 남작 영애는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만다.

“어쩌면 전 그때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남작님의 실체를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그저 소모품일 뿐이라는 사실까지도요.”

그때 남작은 네가 조금만 더 똑똑하고 말귀를 알아먹었으면 저런 대체품을 찾을 필요도 없지 않았냐며 남작 영애를 몰아붙였다고 한다.

“딱 봐도 널 이용하려고만 한 거였어.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그랬단 말이야?”

“…그냥, 그냥 믿고 싶었어요. 그렇게라도 저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고. 아가씨도 돌아가셨으니… 어쩌면 제 자리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마법 시약을 먹으면 아가씨랑 비슷했으니까요. 비록 대체품이라도…….”

“음…….”

“결과는 이렇지만요. 아가씨가 그렇게 돌아가셨는데 제 욕심만 차린 벌이기도 하고, 저만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친 벌이기도 하겠죠.”

루지는 딱히 미인은 아니었다.

수수한 스타일의 평범한 여자.

물론 세계가 세계이다 보니 평범한 축이라도 제법 예쁘장하지만, 이곳 남자들은 눈이 아주 높은 편이라 저 정도로는 딱히 대우받거나 그러진 못했을 거다. 영주가 개판이라 민심도 각박한 곳이니 고아로서 고생도 많이 했을 테고.

사실 드라나 남작령에서 고아로 살아남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애정 결핍이라.

몇 번 잘해준다고 홀라당 넘어가버린 여자니 확실히 한 번 써먹고 버리기 딱 좋긴 하네.

그 뒤 이야기는 대충 짐작했던 대로였다.

드라나 남작이 맡긴 일은 세이라를 납치하는 일.

물론 세이라에게 들은 바로는 기사들이 결국에는 그녀를 죽이려고 했다는데 루지는 납치하는 거로만 알고 있었단다.

실제로 기사들이 루지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들어봐도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은 거 같았다.

“그러니까……. 남작이 신고한 사체는 드라나 남작 영애 본인이라는 거네. 그 시체를 어떻게 관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놈들과 관련 있는 만큼 그들의 힘을 빌린 게 아닐까 싶다. 마나 독이나 전염병, 심지어 연막탄 같은 것도 만드는 놈들이니 시체의 부패를 막는 뭔가를 사용했다고 가정해도 무리는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뭔가에 맞고 죽는 바람에 방패를 쓰는 듀발이 의심받기 딱 좋은 상황이야. 부검을 통해 사망 예상 시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하긴 그런 게 나온다 쳐도 놈들이 방금 죽은 시체처럼 관리했으면 그것도 의미 없겠지.”

루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건 생각보다 드라나 남작이 이 일을 오래 준비했다는 거다.

그리고 준비가 길었던 만큼 그리 단순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아직도 놈들의 정확한 목적은 파악할 수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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