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루지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그녀를 내보낸 로빈은 가족들만 남은 자리에서 오늘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세이라가 쌍심지를 켜고 눈을 부라린 건 당연하고 루지의 이야기를 같이 들은 실비아와 다이앤 그리고 린도 뻔뻔한 드라나 남작의 작태에 분노를 터트렸다.
“우선 재판은 문제가 아닐 거 같아. 서로 주장이 너무 다른데 딱히 증거는 없거든. 놈들이 증거를 조작했을 수도 있는데, 폐하께서 날 믿고 계시기 때문에 웬만한 거로는 통하지 않을 거야.”
“만약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면 절 버리시면 됩니다, 영주님. 그럼 아가씨께서는 괜찮으실 겁니다. 사실 모든 일은 제가 벌인 거니 틀린 말도 아니죠.”
“됐어, 듀발 오빠. 지금 오빠가 그런 말 할 입장은 아닐 텐데? 오빠가 죽으면 난 어쩌라고?”
“…그건…….”
“듀발 경이 생명의 은인인데 그렇게 죽으면 아가씨의 마음이 아주 아프다, 뭐 이런 거예요. 그렇죠, 아가씨?”
“아… 아아. 응. 그렇지. 맞아, 오빠. 그거야.”
뭐야, 이 분위기?
듀발과 세이라의 대화가 뭔가 이상해 인상을 쓰자 다이앤이 끼어들어 물을 흐려버린다.
하지만 그래서 뭔가 더 이상하달까?
다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대책 회의가 중요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상황에서 최악은 역시 듀발이 처벌을 받는 거겠지. 그렇게 되면 세이라의 이미지 역시 바닥을 치겠고.”
“그런 이미지 따위 필요 없어. 어차피 다른 데로 시집갈 것도 아닌데. 다른 건 다 상관없으니 어떻게든 듀발 오빠가 처벌받는 것만 막아줘.”
“끙, 그래. 어쨌든 최선을 다할게.”
그래도 당당하게 시집가지 않겠다니.
그건 좀 너무하지 않냐?
다음 날 바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고작 하루에 불과했지만 황도 귀족 재판소의 법무관은 생각보다 많은 걸 조사해 왔다.
평소 세이라와 레지 드라나의 평판.
둘이 같이 큐브를 클리어한 전적.
그날 같이 술을 마실 때의 분위기 등등.
그리고 어떻게 찾아냈는지 듀발이 두 기사를 상대로 분투할 때 그 장면을 목격하고 도망친 주민의 증언까지 확보해 놨다.
세이라가 귀족 자제들과 결투를 즐겼다는 점.
귀족 영애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건 로빈 측에 조금 불리한 증거였지만, 드라나 남작 영애로 위장한 루지 역시 다른 귀족 영애들과의 접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날 술집에서 두 집단 간의 관계가 좋아 보였다는 술집 주인의 증언과 기사들이 서로 살벌하게 검을(물론 듀발은 방패였지만) 휘두르고 있길래 무서워 도망쳤다는 주민의 증언은 사건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다만 안타까운 건 듀발이 루지를 업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걸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였다.
그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듀발과 세이라가 인적이 드문 곳으로만,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돌아왔기 때문인데, 놈들의 2차 습격을 피하기 위한 당연한 판단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그걸 본 사람이 있다면 드라나 남작이 남작 영애의 사체를 보관하고 있는 것에 논리적 모순을 제기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지금은 상대가 드라나 남작 영애의 사체를 신고하면서 아예 죽은 사람으로 확정되어 버린데다 루지를 법정에 세워도 그녀가 드라나 남작 영애로 가장해 아카데미에서 지냈다는 걸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재판은 별다른 진전 없이 지지부진.
그리고 드라나 남작은 억울하다는 듯 열연하고 있었다. 로빈은 상대가 아무런 증거도, 증인도 준비하지 않은 것에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렇게 판결을 앞둔 법무관은 의문 나는 점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드라나 남작님, 남작 영애의 시신은 남작가에서 회수했지만, 기사들의 시신은 그 자리에 남아있었습니다. 사건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게 남작가의 사람이라면, 영애의 시신만 회수하고 기사들의 시신은 버려둔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딸을 지키지도 못한 기사들의 시신을 내가 왜 수거해 간단 말입니까? 대체 뭘 잘했다고?”
…다른 건 몰라도 짜증만은 진심이군. 세이라를 납치하거나 죽이지 못한 게 그렇게 억울했나?
“좋습니다. 그럼 그레이츠 후작님, 후작님은 그레이츠의 기사가 아니라 드라나 남작의 기사가 먼저 공격했고, 그레이츠의 기사는 자신과 세이라 그레이츠를 지킨 것에 불과하다고 하셨는데, 상식적으로 드라나 남작령의 기사가 그레이츠의 영애를 선제공격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이건 할 말이 없었다. 누가 봐도 그렇게 느껴질 게 뻔했으니 말이다. 로빈이 가장 궁금한 것도 그거였고.
여기서 제국을 위협하는 정체불명의 세력이 존재하며, 저 드라나 남작은 그들의 끄나풀이라고 외쳐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렇게 로빈이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자 법무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판결을 준비했다.
“그럼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본 법무관이 판단할 때, 세이라 그레이츠와 레지 드라나 둘 사이는 예전부터 돈독했고, 그날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법무관이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날 서로가 서로에게 검을 휘둘렀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 레지 드라나와 드라나 남작가의 기사 둘이 사망하고, 세이라 그레이츠의 호위가 큰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뿐입니다. 둘에게는 평소 상대를 해칠 원한이나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고, 그날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므로 이 사건은 쌍방 과실에 의한 우발적인 전투로 판단. 양쪽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결하겠습니다. 하지만 피해는 드라나 남작가가 일방적으로 본 상황이니, 그레이츠 쪽은 그에 대한 보상금을 준비해 주십시오.”
결국 이런 식으로 진행되나?
만약 아무런 증거도 없이 재판이 마무리되면 이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법무관의 판결을 쉽게 풀이하면, 술에 취해 홧김에 싸움이 일어난 거 같으니 누구의 일방적인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그레이츠의 힘이 더 셌는지 상대만 일방적으로 맞아서 많이 다쳤다. 그러니 그에 대한 보상은 그레이츠가 해라. 정도였다.
사실과는 많이 다르지만 어쨌든 듀발이 처벌받지 않게 되어 로빈으로서는 꽤 만족스러운 판결이었는데 드라나 남작은 아니었는지 거칠게 떨며 벌떡 일어섰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딸이 죽었는데 보상금이라니! 그레이츠에 영지전을 신청하겠습니다!”
“뭐라고? 그럴 수가…….”
“영지전이라니…….”
“그래, 딸이 죽었으니 불가능은 아니야. 하지만 굳이 그레이츠와…….”
“쯧쯧, 딱하구만.”
드라나 남작의 선언에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장내의 분위기 역시 드라나 남작을 동정하는 쪽으로 흘러갔고.
얼마나 억울하면 감히 그레이츠에 영지전을 신청하겠냐는 분위기였는데, 사실 누가 봐도 맞는 말이라 로빈도 딱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영지전이라…….
이거였나, 놈들이 노리는 게? 재판은 듀발이 드라나 남작 영애를 살해한 게 사실이라는 확인만 받으면 족했던 거고?
영지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시기.
특히 지금 같은 시기에 황제가 영지전을 쉽게 허락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친족이 살해되는 억울한 일을 겪었음에도 재판소에서 그 억울함을 해결할 수 없었으니 황제도 영지전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니까 놈들은 합법적으로 황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영지전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놈들의 목적이 영지전이라는 걸 알게 되자 왜 이런 어이없는 짓을 계획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듀발이 제대로 처벌받게 되면 영지전의 명분이 사라지니 놈들이 증거를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거고.
처음부터 목적이 영지전이었는지, 아니면 드라나 남작 영애가 죽자 계획을 선회했는지, 혹은 루지의 시체를 드라나 남작 영애인 것처럼 위장할 수 있는 건지 등의 의문이 남긴 했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영지전이 인정되면 그 어떤 영주도, 심지어 황제마저도 영지전 결과에 간섭할 수 없게 된다. 영지전 과정에 관여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고.
드라나 남작이 영지전을 신청하고 영지전의 특성을 떠올리자 놈들의 계략 역시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다. 정확히 무슨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역량을 모아 드라나 남작 쪽에 합류해 나와 진검 승부를 벌이겠다는 의미.
그리고 그 대결에 황제가 끼어드는 걸 막겠다는 의미였다.
아니면 내 영지로 세작과 암살자를 투입하는 게 불가능하니, 어떻게든 밖으로 끌어내 처리할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놈들의 목적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명료했다.
영지의 전력을 총동원해 놈들의 계략을 분쇄하고 숨어있는 그림자를 잡아 족친다. 만약 놈이 나를 노리고 있다면 반드시 적진에 포함되어 있을 테니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붙여 놈을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하~ 좋습니다, 드라나 남작. 황실의 공증을 받고 날짜를 잡죠.”
그렇게 드라나 남작령과 그레이츠 후작령의 영지전이 결정되었다.
* * *
영지전이 결정되고 로빈은 다시 황제를 찾았다. 황제와 젝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얻을 게 없는 영지전인데 굳이 그 자리에서 승낙하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글쎄요. 그건 그런데, 어차피 이 상황에서 막을 수도 없잖아요? 이건 황제 폐하께서 무조건 승낙할 수밖에 없는 영지전 아닙니까?”
“그건 후작의 말이 맞아. 상황이 고약해서 영지전을 승낙할 수밖에 없어.”
영지전에서 이긴다 한들, 내 명망에는 흠집만 생길 것이다. 약한 영지를 자극해 영지전을 야기한 파렴치한 영주로 인식될지도 모르고.
젝트가 지적한 건 그런 점이었다.
하지만 명망이라. 나한테 그런 게 의미가 있나? 내 가족을 대놓고 건드렸는데?
사실 영지전과 상관없이 드라나 남작을 그냥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 가족을 건드렸으니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영지전으로 판을 깔아준 게 고맙다고 할까?
“아마 절 노리는 모양인데, 남의 목숨을 노리면 자신도 같은 걸 걸어야 할 겁니다.”
“문제는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는 거군.”
“우선, 놈들이 원한 최고의 그림은 대충 이랬을 겁니다. 그레이츠 영애를 납치, 혹은 살해한 후 독을 먹고 죽은 기사들의 시체로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현장을 만든다. 그곳에 남작 영애의 시신까지 가져다놓는 거죠.”
“음…….”
“겨우 달아난 기사는 후작님께 상황을 전할 테고 후작님은 당연히 드라나 남작을 신고했겠죠. 이게 영지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바로 칼을 꺼낼 수도 있지만, 황도라 그것도 안 되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황도에서 상대 귀족을 향해 대놓고 칼을 휘두른다?
아무리 나라도 그럴 순 없었다. 차라리 암살자를 고용한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래서 재판이 벌어진다면 결국 오늘 나온 판결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증거도, 증인도 없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요. 만약 그런 판결이 내려진다면 후작님은 어쩌시겠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아마 영지전을 신청할 가능성이 크겠네요. 가장 직관적이고 파괴적인 방법이 그거니까요.”
“그겁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어차피 어떤 식으로 흘러가도 영지전으로 귀결되는 건데.”
황제의 말이 맞았다.
놈들이 마나 독을 먹이고 세이라를 공격한데다 드라나 남작 영애의 시체를 이용하는 한 어떤 식으로 흘러가도 결과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애매한 판결 후 영지전으로 흘러가는 그런 흐름 말이다.
“모든 변수가 한 가지 결론을 만든다는 건 제법 괜찮은 계략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가장 원했던 그림을 떠올려보면 상대의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죠.”
“상대가 가장 원했던 그림이라…….”
“상대가 가장 원한 건 후작님이 흥분해 영지전을 신청하고 영지의 전 병력을 이끌고 드라나 남작을 공격하는 겁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군.”
“그럼 드라나 남작령에 무슨 준비를 해놓고 기다릴 수도 있겠네요. 절 그곳으로 끌어들이려는 거니까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드라나 남작령과 그레이츠 후작령은 외길로 이어져 있습니다. 전투력 자체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 두 영지의 영지전. 지금까지 놈들의 움직임을 봤을 때 많은 병력을 지원하지도 못할 겁니다. 만약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에 그렇게 했겠죠.”
“음…….”
“결국 함정이나 암살. 놈들이 노리는 건 이 정도일 텐데, 후작님의 영지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지 영지로 숨어드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네, 뭐. 좀 그래요.”
“그렇다면 함정을 파도 드라나 남작령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후작님을 흥분시키려 했던 거죠.”
“날 흥분시켜서 끌어들인다라…….”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