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젝트의 분석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놈들이 진검 승부를 계획하고 있을 거라는 내 생각이 너무 단순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놈들이 군대를 동원하지 않는 이상 드라나 남작령과 그레이츠 영지간의 격차를 메울 순 없었다.
만약 놈들이 그렇게 많은 인원으로 군대를 운영하고 있었으면 그만큼 많은 물자가 필요하다는 의미였으니 황제가 그걸 놓칠 리도 없었다.
결국 놈들은 소수 정예.
그런 놈들이 영지전을 부추겼으니 젝트의 말대로 함정이나 암살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차라리 방어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예? 방어요?”
“네, 어차피 놈들의 목적이 분명한데 굳이 공격을 나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음…….”
놈들의 뜻대로 움직여줄 필요 없다는 젝트의 의견.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에는 몇 가지 맹점이 존재했다.
“크레톤 공작님, 확실히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과연 놈들과 드라나 남작이 한패일까요?”
“네? 그게 무슨…….”
“전 드라나 남작이 히키시 백작처럼 단순히 이용당한 거라고 봐요. 놈들의 행태가 원래 그렇잖아요. 영지전이 벌어진 이상 드라나 남작은 이제 놈들에게 버림받은 패에 불과할 거예요.”
“그건 일리가 있군.”
“놈들이 절 노려서 몇 개월이나 준비했다면 뭔가 거창한 게 나올 가능성이 커요. 단순한 암살 정도는 아닐 거고요. 그래서 전 최대한 빠른 시간에 드라나 남작을 처리하고 영지전 상황을 정리할 생각이에요. 그러면 황제 폐하께서도 절 도우실 수 있겠죠.”
“영지전 상황을 빨리 마무리 짓고 힘을 합쳐 대비하자?”
놈들은 항상 귀족의 욕심을 이용해 왔다. 폐황후와 히키시 백작 모두 자신의 욕심으로 놈들에게 협조하다 결국 버림받고 말았으니까.
로빈은 놈들이 누군가와 진심으로 공조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딱 봐도 답이 없고 이용 가치조차 없어 보이는 드라나 남작은 더욱 그랬다.
결국 드라나 남작도 놈들에게 버린 패에 불과한 것이다.
놈들이 영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이용하긴 할 것이다.
두 영주 모두 살아있거나 누구도 항복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관여할 수 없고, 다른 영지로 도망갈 수도 없다는 영지전의 제한.
그리고 승자가 결정되는 즉시 그 영지를 획득하게 되는 그런 제한 말이다.
놈들이 소수 정예인 만큼 병력은 아닐 거고, 그렇다면 큐브가 아닐까?
만약 드라나 남작령과의 영지전 중에 등급이 높은 큐브를 터트리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상황이 조금 고약해진다. 드라나 남작은 영지를 포기하고 도망갈 수라도 있지만, 나는 그게 아니니까. 심지어 드라나 남작령은 내 영지가 되고, 그 큐브 역시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 상황에 이르면 영지를 포기해도 소용없었다. 그 몬스터들이 남작령의 백성들을 배불리 먹고 그레이츠 쪽으로 올라올 텐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거……. 생각보다 일이 복잡할 수도 있겠는데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로빈도 한숨짓지 않을 수 없었다.
로빈은 황제와 젝트에게 자신이 생각한 시나리오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로빈의 이야기를 듣고 골똘히 생각하던 황제는 고개를 저으며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반박했다.
“물론 놈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드라나 남작이 그런 걸 허락할까?”
“맞습니다, 후작님. 비록 드라나 남작이 욕심에 눈이 멀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자신의 영지를 포기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드라나 남작이 먼저 영지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놈들이 드라나 남작 모르게 사고를 칠 순 있겠지.”
“네, 그것도 걱정이고요.”
“우선 정리를 좀 해보겠습니다. 드라나 남작은 지금 놈들과 협력하고 있을 거라 예상되고 거의 확실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놈들은 드라나 남작을 이용하고 있고요.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이번 영지전을 이용해 뭔가를 벌이려는 상황이죠.”
“그래, 우리는 그걸 모르고 있고.”
문제는 놈들과 드라나 남작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의도와 목적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거였다. 영지전조차 드라나 남작의 욕심인지, 아니면 놈들의 계략인지 불명확했으니 말이다.
“드라나 남작이 이번 일을 계획한 게 대충 1년 전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사이 남작령에 특별한 변화는 없었나요?”
“1년 사이라……. 영지민이 야반도주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사실 그건 어제오늘 일은 아니잖나?”
“그래요? 얼마나요?”
“대충 2천 정도라 알고 있네. 후작의 영지로 도망가기도 했고.”
“네, 저희 영지로 도망 온 게 대략 100여 명 정도죠.”
요 몇 년 사이 삶이 각박해진 드라나 남작령을 떠난 영지민의 수가 제법 된다. 모든 걸 포기하더라도 영지에서 벗어나겠다는 영지민을 막을 권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중 그레이츠로 도망 온 주민들이 대충 100여 명.
아직 외지인을 믿고 들이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우버 마을에 정착시킨 후 적당히 감시하고 있었다. 만약 문제없이 주민들에게 동화된다면 그 후에 기존 주민들과 같은 권리를 부여할 생각이었다.
“2천이면 적은 수가 아니네요.”
“이대로 계속 주민이 빠져 5천이 넘어가면 특별 감사권을 발동할 생각이었네. 아무리 막장이라도 절차는 따라야 하는 법이라. 이럴 때는 황제라는 자리가 좀 번거롭기도 해.”
“그건 그렇죠. 아무 때나 그런 걸 발동하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잖아요.”
주민이 빠진 것 외에 다른 문제가 없다는 황제의 말에 복잡한 상황일수록 단순하게 생각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로빈은 가장 단순하고 직관적인 방법으로 대처하기로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영지전이라는 상황이 저희에게 불리하다는 거네요. 처음 계획대로 밀고 나가야겠어요. 대처는 그 후에.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좋네. 생각해 봤자 정답이 없는 상황이니까. 지금 드라나 남작령에 있는 고급 큐브는……. 블루 큐브 하나뿐이군. 황명으로 영지전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부터 처리하겠네. 그럼 부담을 덜 수 있겠지.”
“네, 다른 건 수십 개가 한 번에 터지지 않는 이상 어떻게 처리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해주십시오.”
변수가 너무 많아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일수록 가장 빛이 나는 건 정공법이라고 생각했다.
영지를 보호하면서 가장 빠른 속도로 드라나 남작부터 처리한다. 그리고 드라나 남작을 처리할 때쯤이 되면 놈들의 속셈도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 * *
양측 모두 빠르게 진행되길 원해서 영지전은 일주일 후 바로 시작하기로 했다.
로빈과 일행 역시 황도를 떠나 영지로 돌아갈 채비를 갖추었다.
“장인어른께서는 그냥 이곳에 계시는 게 나을 거 같아요.”
“흠, 그런가? 영지가 난처한데 내가 도움이 못 되는구만.”
“에이, 그런 말씀 마세요. 부모님들도 아예 이곳으로 보내고 싶은 마음인걸요.”
“하긴 그렇구만. 그분들이 무슨 변수가 될지도 모르니.”
“네, 그러니 이곳에서 황자님과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시면 아마 금방 마무리될 겁니다.”
“알겠네, 사위. 무운을 비네.”
그렇게 장인어른 내외분은 황도에 남았다.
생각 같아서는 부모님들이나 가족들을 싹 황도에 보내고 싶은데 그렇게까지 하면 나중에라도 특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다. 북부 쪽 영주들은 대체로 나에게 우호적이지만 다른 지방의 영지들도 그런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레이츠의 전력이 대단해 말은 못 하지만 우리 영지를 시샘하는 영주가 분명히 존재할 터였다.
“괜히 꼬투리 잡힐 일을 할 이유는 없겠지. 응? 야, 쟤도 데려가는 거야?”
황도로 복귀하는 일행에 루지까지 끼어있었다. 아무런 이용 가치도 없고 딱히 챙겨줄 필요도 없는 여자가 끼어있으니 로빈으로서는 의아할 뿐이었다.
물론 갈 곳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레이츠의 입장에서는 그녀를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온정을 베푼 상황이었다.
“응, 데려갈 거야.”
“굳이? 무슨 이유로? 너 잊었나 본데 쟤 때문……. 그래, 엄밀히 따지면 쟤 때문은 아니지. 어쨌든 알면서도 널 해치려 한 여자야.”
“알아, 그래서 데려가는 거야. 생각 같아서는 죽이고 싶은데 죽이는 건 대가가 너무 싸잖아? 데려가서 죽을 때까지 괴롭힐 생각이거든.”
“…….”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다이앤을 바라보았다.
저걸 그냥 내버려둬도 되냐는 의미였는데 다이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내가 오기 전에 이미 이야기가 마무리된 모양이다.
“세이가 알아서 하신다니 그냥 두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요.”
실비아까지 그렇게 나오자 로빈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야, 책임은 네가 지는 거야. 알아서 잘 관리해.”
마지막 당부를 덧붙이긴 했지만 말이다.
“야! 들었지?”
“네? 네, 아가씨. 명심하겠습니다. 거두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흥, 네가 예뻐서 그런 건 아니거든. 아마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야. 도망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도망가. 쫓아가서 죽여줄 테니까.”
이건 뭐. 도망가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세이라의 말대로 단순한 동정심은 아닌 거 같아 그냥 알아서 하게 내버려뒀다. 사실 저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만큼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렇게 영지로 돌아간 로빈은 영지 방어 체제를 확인하고 영지전을 준비하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 * *
그 시각, 드라나 남작령도 영지전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래. 다 네 말대로 했으니, 내가 그레이츠를 차지할 수 있겠지?”
“난 거짓말은 안 해. 아마 며칠만 버티면 기회가 올 거다. 그 정도도 안 되면 자격조차 없는 거고.”
“흥, 약속은 지켜야 할 거야. 내 영지민을 천여 명이나 가져갔으니까. 심지어 난 이 일 때문에 딸까지 잃었어.”
“말은 바로 해야지. 그녀는 네가 홧김에 죽인 거잖아? 그걸 내 탓으로 돌리면 곤란하지. 내 계획에 영지전을 끼워 넣은 것도 너의 욕심이었고. 결국 그녀가 죽은 건 다 네놈 때문이지.”
“닥쳐! 애당초 네놈이……. 하~ 그래, 됐다. 어차피 자식이야 또 낳으면 되는 거지.”
“그래, 그거야. 각자 자신이 가질 것만 가지면 돼. 그럼 난 이만 가보지.”
검은 복면 사내가 집무실을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드라나 남작은 이제 곧 자신의 손에 그레이츠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절로 입가가 씰룩거렸다.
“큭큭. 꼴좋다, 그레이츠. 영지도 내 것이고, 영지민도 다 내 것인데 사사건건 간섭이나 하더니. 어린놈이 건방지게…….”
자신의 영지를 도와주는 건 나름 고맙지만 그때마다 영지를 제대로 운영하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혀를 차는 모습은 정말 굴욕적이었다.
그 눈빛과 그 태도.
불과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다를 바가 없었던 주제에 운이 좋아 상황이 좋아지자마자 그런 태도라니. 심지어 자신을 황제에게 밀고한 놈도 분명 그레이츠일 것이다.
그레이츠에 대한 증오가 점점 커져갈 무렵 검은 복면이 찾아왔다. 그레이츠에 복수할 방법이 있다며 영지민을 천 명만 내달라고 청한 것이다.
그 내용을 전해 들었을 땐 이거다, 싶었다. 그 시기에 맞춰 영지전을 시작할 수만 있으면 놈의 영지를 빼앗는 것도 가능했으니까.
그리고 검은 복면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영지전을 열 방법까지 알려주었다.
꼴에 영지민을 아낀다니 영지전을 포기하고 황제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을 거고, 그러면 자신은 그걸 빌미로 승리를 인정해 달라 황제에게 요구하면 족했다.
친구만큼 적도 많은 그레이츠고, 딸을 잃어 귀족들의 동정심까지 사고 있으니 귀족들의 뜻이 분열되면 황제 역시 규정대로 자신의 승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다른 건 몰라도 영주 성의 견고함만은 자신 있었다. 그러니 며칠간 버티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며칠만 버티면 자신의 승리가 확실해진다는데 이보다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나 저기나 무지렁이들이 제법 죽어 나가겠지만, 그거야 알 바 아니지. 적당히 풀어놓으면 적당히 살다 적당히 늘어나는 게 무지렁이들이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드라나 남작은 형형한 눈으로 남자가 나간 문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이 마무리되면 너도 사라져야지.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 용도가 다하면 없애는 게 당연한 수순이리라.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