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 * *
한편, 드라나 남작령을 나선 남자는 그 길로 곧장 대수림에 들어섰다.
“영지전이라, 나쁘지 않군. 미끼로 마나 독까지 풀어놨으니 대체 왜 영지전인지 쓸데없이 고민하고 있겠지? 확실히 나쁘지 않아. 만약 드라나 남작이 승리해 영지를 달라고 요청하면 귀족들이 분열되어 제법 멋진 그림이 나오겠어. 뭐, 아니면 말고. 큭큭.”
영지전의 승패와 상관없이 자신의 계획은 모두 완성되었다. 영지전을 끼워 놓는 게 승률을 조금 높일 수 있는 일이라 적극적으로 협조했을 뿐.
영지전이 이미 시작된 이상 그 승패는 딱히 상관없는 것이다.
“욕심만큼 능력이 있다면 그레이츠를 차지할 수도 있겠지. 뭐, 이미 엉망이 된 그레이츠라도 가지고 싶다면 말이야.”
그렇게 대수림 깊숙이까지 유유자적 들어온 남자는 그레이츠와 드라나의 경계 부분에 있는 애매한 지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경계라지만 그레이츠에 가까운 곳이었고, 모야족 전사들이 순찰하기 어려운 사각지대 교묘한 곳이었다.
숲을 타고 이렇게 빨리 이동할 수 있는 것도 놀랍지만 그동안 한 마리의 마수도 달려들지 않은 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남자가 도착한 그곳에서는 온갖 잔혹한 일들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었다.
단순한 폭행이나 강간은 기본이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누군가를 잔인하게 살해하거나 누군가의 목숨을 걸고 서로 죽이게 만들기까지.
뭔가 독이라도 먹은 듯 무기력한 주민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놈들의 지시를 따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참상.
그리고 주변에는 이미 그렇게 죽은 시체들이 즐비했는데.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합니까?”
“왜? 처음에는 즐기더니. 이제는 질렸나?”
“아니, 그거야…….”
중독되어 기절한 영지민을 수십 명씩 몰래 데려와 잔혹하게 살해하는 일.
처음에는 명령이라는 허울 아래 자행되는 폭력이 달콤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
이제는 그런 감각마저 무뎌져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제 금방 끝나. 오, 이제 끝이군.”
남자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공간이 일렁이더니 큐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 파란색.”
“흠, 역시 천 명 정도로는 이게 한계군. 하긴,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겠지. 뭐가 튀어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영지 전력이 온전할 리는 없으니……. 적당히 몇 놈 집어넣고, 놈들이 들어가면 나머지는 모두 죽여. 방법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네, 일부러 가족 단위로 살려놓았습니다. 하지만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바로 터지기라도 하면…….”
“글쎄, 그거야 운에 맡겨야지. 하지만 들어간 놈도 생각이 있다면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시간을 끌 거야. 대기 시간도 제법 될 테니 그사이에 빠지면 돼.”
그의 지시대로 살아남은 영지민 중 몇을 큐브에 넣은 남자들은 자기네들끼리 눈짓으로 신호하며 몰래 무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 순간.
검은 복면에게 다가가던 남자 하나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데.
“시간이 되었으니 너희들도 퇴장해야지. 제법 좋은 시간이었잖아? 안 그래?”
“큭, 도… 독이라니. 대체 언제…….”
“요 며칠 조심하긴 하던데, 이거 어쩌나.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었어. 난 원래 인간을 믿지 않거든.”
그리고 검은 복면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영지민을 살해하며 킥킥대던 남자들 역시 모조리 목숨을 잃었다.
“자, 내가 할 일은 이걸로 끝이군. 그레이츠에 몬스터만 풀고 돌아오라니, 그건 너무 싱겁잖아? 최소한 로빈 그레이츠 정도는 처리해야지.”
요요하게 빛나는 큐브를 바라보며 중얼거린 남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레이츠 후작령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그 시각, 로빈은 영지전에 출전할 병력을 추리고 있었다.
“영지전은 전사들만 동원해 상대 영주를 노리고 속전속결로 진행합니다. 치안대는 외부인에 주의해 주시고요. 특히 큐브에 신경 써주세요. 우버 마을 역시 마찬가지. 저번처럼 이상한 놈들이 숨어들 수 있어요.”
“네, 영주님. 확실히 지키겠습니다.”
“그나마 봄이라 다행이네. 적어도 마수까지 설치진 않을 거 아냐?”
“그러네요. 겨울이었으면 더 짜증 날 뻔했어요.”
“저 같으면 겨울을 노렸을 텐데 왜 이렇게 서둘렀을까요?”
지온의 지적에 로빈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진작 죽은 시체를 이용해 영지전을 강제할 거면 그 시기는 놈들이 임의대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겨울이 아니라 봄이라니.
만약 겨울이었으면 우리 쪽에서 많은 전사들을 동원하기 힘들어지고 조금이나마 드라나 남작에게 유리해진다.
그렇다면 이 시기로 결정한 건 드라나 남작이 아니라 놈들인 걸까? 드라나 남작이었으면 당연히 겨울을 선택했을 테니 말이다.
“하, 없는 머리 굴리느라 돌아가시겠네. 요새에 남는 전사들에게 대수림 쪽도 주시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북쪽 방벽 역시 마찬가지예요.”
놈들의 생각을 짐작하기 힘드니 어쩔 수 없이 많은 곳을 살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로빈은 일점 돌파로 드라나 남작만 처리할 생각으로 최정예 전사 400명만 추렸다.
그리고 다음 날, 황실에서 약속한 그날이 밝아와 영지전이 시작되었다.
* * *
그레이츠의 전사 400이 로빈 앞에 도열하고 있었다.
린과 백랑을 포함한 정예 전사들.
기사단이나 궁병대는 공격보다는 수성에 능한 자들이라 출전 멤버에서 제외되었다.
전사들 역시 이번 영지전의 배경과 원인을 모두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구원해 줬던 상대가 자신들의 영지를 노리고 있다는 배신감.
어렸을 때 몇 년이나 모야족 마을에서 살았던 딸 같은 세이라가 공격당했다는 사실에 전사들도 분개하고 있었으니 사기 역시 드높았다.
로빈의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출동해 드라나 남작을 오체분시할 기세였다.
로빈 역시 일주일간 놀고 있지 않았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대비할 수 있는 모든 걸 준비한 것이다.
특히 적지로 들어가는 만큼 독에 대한 대비가 철저했는데 상대가 마나독을 쓴 이력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해독제를 준비하기도 했다.
이 부분은 실비아와 알버스 원로, 그리고 흑마법사들이 수고해 줬는데 그들은 일주일 내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해독제를 준비해야 했다.
그나마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상당한 샘플을 구비해 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마땅한 해독제도 준비하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며 돌진했을 것이다.
“다들 알 거라 믿어요. 지금 영지가 어떤 상황인지. 영지전이 시작되면 바로 드라나 남작부터 처리합니다. 우리가 빨리 드라나 남작을 처리할수록 변수를 줄일 수 있어요.”
“예! 영주님!!”
“지온과 흑웅, 그리고 르보른 경은 영지를 부탁할게요. 루이 경은 치안대를 운용해서 영지 상황을 잘 살펴주세요.”
“네, 영주님.”
“그리고 지온. 알죠, 우버 마을? 제가 지시한 대로 처리해 주세요. 어쩌면 영지전보다 더 중요한 일일 수도 있어요.”
“네, 존을 통해 완벽하게 대비해 놓았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출진하는 로빈을 배웅하러 나온 가족들은 애써 밝은 얼굴로 건승을 응원했다. 가족들이 원하면 뒷말을 듣더라도 황도로 피신시키려 했는데 가족들은 한목소리로 영지에 남길 원했다.
“어떤 영지전도 영주 가족이 도망가는 경우는 없다, 로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너라. 이럴 때일수록 영주 일가가 굳건히 버티고 있어야 민심이 흔들리지 않는 거야.”
상대는 드라나 남작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무언가였기에 꼭 그렇다고 하긴 애매했지만, 어느 정도는 옳은 소리라 로빈도 가족들의 행동을 강제하지는 않았다. 위급 시에는 게이트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었으니 말이다.
이미 저택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급할 땐 기절시켜서라도 황도로 도망가라고 명령해 둔 후였다.
“힝! 나 때문에 시작된 싸움인데, 왜 난…….”
“얌전히 있어라. 마수나 몬스터면 몰라도 인간이랑 싸우기에는 너무 어려.”
“그래, 세이. 네가 따라가면 로빈이 전투에 집중할 수 없잖니?”
우리 집 망둥이 2호, 세이라는 본인도 전투에 참여하길 원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라 거절했는데 이 녀석이 마지막까지 투덜대고 있다.
어떻게 얌전한 게 일주일도 못 가는지 참 어지간하다 싶어 한숨이 절로 났다.
이제 명망도 바닥이요, 온갖 악소문에 다른 가문으로 시집가는 건 완전히 글러 먹은 상황.
결국 영지 내에서 해결하든지 아니면 독신으로 살아야 했는데, 그건 앞으로도 저 모습을 옆에서 계속 지켜봐야 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럴 거 같다는 것과 조그만 가능성조차 없는 건 제법 차이가 큰지 작은어머니 세릴조차 이제는 무념무상이신 듯했다.
저 녀석을 완전히 휘어잡을 용자가 ‘짠’ 하고 나타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좋아요. 출동!”
그렇게 로빈과 400인의 전사들은 시간에 맞춰 우버 마을 아래 관문에 도착해 정오가 되길 기다렸다. 영지전이 시작되는 시간이 오늘 정오부터였기 때문이다.
긴장감이 감도는 남쪽 관문.
로빈은 시간이 다 되었는데 남작의 군대가 나타나지 않는 걸 보고 방어에 전념하겠다는 상대의 의도를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뭐야, 진짜 없네. 자기가 영지전을 신청했으면 당연히 공격해야 하는 거 아냐?”
“원래라면 그렇죠. 하지만 바보도 아닌데 우리 군대라 정면으로 맞붙겠어요?”
“결국 우리가 공격해 들어가야 하는 거네. 빨리 가자, 주인! 그 뻔뻔한 낯짝을 갈아버리겠어!”
“후… 좋아. 전군! 출진! 목표는 영주 성이다! 최단 거리로 영주 성을 친다! 마을은 모두 지나치고 영주 성으로!”
“와!!”
시간이 되자마자 로빈이 출진 명령을 내렸다.
전사들이 함성을 내지르고 드라나 남작령을 향해 출동하자 백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빈에게 물었다.
“왜 영주 성이야? 그 사이에 요지가 될 만한 마을도 있잖아?”
“드라나 남작이 있는 곳이 영주 성이니까요. 전에 보니 다른 곳은 좀 애매하지만 그래도 영주 성은 튼튼해 보이더라고요. 놈이 지킨다면 그곳이겠죠.”
“그래? 그건 너무 뻔한데. 혹시 다른 마을에 숨지 않았을까? 허허실실, 뭐 이런 거 말이야. 어차피 영주가 항복하거나 죽어야 끝난다면서? 놈이 엉뚱한 데 숨어있으면 우리만 피곤해지는 거고.”
“글쎄요. 다른 영주라면 몰라도 놈은 다른 곳에 갈 수 없을걸요? 영지민들도 영지전 소식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놈이 어지간했어야죠.”
“영지민이 영주를 돕지 않을 거다?”
“네, 엉뚱한 곳에 숨어있다가 영주민이 밀고하면 바로 새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 영주 성에서 방어하고 있겠죠. 무슨 변화를 기다리면서요.”
“좋아! 주인, 빨리 가자!!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와서 어떻게든 풀어야 할 거 같아!”
“…그래 보이긴 하네.”
린의 말처럼 그녀는 이미 전투 모드에 들어가 서서히 붉은 기류를 내뿜고 있었다.
그야말로 폭발 직전?
황도에서부터 쌓인 울분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 이럴 땐 린을 혼자 적진에 보내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분노에 차있는 린을 보니 생각보다 공성이 수월할 거 같았다.
“와, 진짜 아무도 없네. 다 민간인뿐이지?”
“역시 그렇네요. 병사란 병사는 모조리 영주 성으로 모아간 거 같고요. 뭔가 수작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무방비하다니…….”
그레이츠의 병사가 영주 성으로 돌진하는데도 마을에서 방어하는 병사나 기사는 전혀 없었다. 다들 집 안에 숨어 눈치만 보고 있을 뿐 별다른 함정이나 그런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길게 끌 수 있는 전투가 아니라 약탈이고 뭐고 의미도 없는데 불안에 떠는 모양새가 왠지 씁쓸하기까지 했다.
“바로 지나친다. 다시 이동!!”
그렇게 무주공산을 지나 드디어 드라나 남작령의 영주 성에 도착했다. 로빈이 말했던 대로 제법 튼튼한 성벽 위에는 기사들이 무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궁병을 따로 육성하지는 않는 모양이에요. 스킬을 익힌 궁병이면 그래도 제법 위협적일 텐데.”
“그걸 따로 키우는 영지는 거의 없던데. 전에 다른 영지를 도우러 갔을 때도 궁병은 없었거든? 원래 기사들한테는 궁병이 아무 의미도 없잖아?”
“예전엔 그렇죠. 중급 마수만 돼도 그렇고요. 하지만 스킬이 있으면 조금 다르죠. 하긴 그런 정신머리가 있으면…….”
로빈은 몇 시간이나 말을 몰고 달려 지친 전사들을 잠시 쉬게 하고 한 번에 몰아칠 준비를 갖추었다. 오늘 무조건 저 성벽을 넘어 드라나 남작을 처리할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 로빈의 수정구가 정신없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영지를 지키던 지온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