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황실의 명예마저 내팽개친데다 지금까지 한 번도 거짓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던 황제였기에 귀족들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거짓이라고 입 모아 주장하던 예전의 신탁 사건도 결국 사실로 판명되었으니 말이다.
* * *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개판인데. 이 새끼는 대체 얼마나 인심을 잃은 거야?”
성벽 근처에서 전황을 주시하던 로빈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드라나 남작령도 엄연히 대수림에 인접한 영지.
그전이라면 몰라도 십수 년 전, 마수가 나타나면서부터는 제법 실전을 거친 병력이었다. 큐브 처리 부분에서는 종종 문제를 일으켰지만 그렇다고 아예 만만한 병력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런 기사들이 100여 명에 병사들은 천을 훌쩍 넘는다.
만약 그들이 결사적으로 항전한다면 제법 피곤할 수도 있었는데 상대는 지나칠 정도로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성문이 단번에 날아가자 기가 질리고 사기가 바닥을 쳤다지만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영주에게 충성하는 게 기사들의 미덕이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성과 형식적인 충성은 질적으로 달랐다.
아마 드라나 남작은 자신의 기사들에게도 그리 좋은 영주는 아니었나 보다. 아무리 폭군이라도 권력의 근본인 기사들만은 잘 대우하는 법인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드라나 남작을 잡았다! 모두 항복하라!!”
성안으로 쳐들어간 전사들이 결국 드라나 남작을 잡아왔다.
남작이 잡혔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병사들은 일제히 무기를 버렸고 일부 기사들만 완강히 저항하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 대다수의 기사는 병사들과 함께 무기를 버렸으니 말이다.
“하하하. 영주님, 내가 잡아왔다니까. 이 새끼가 도망가다가 주민들에게 잡혔는지 실랑이하고 있더라고.”
“이런 젠장, 그깟 무지렁이들 때문에…….”
백랑에게 두들겨 맞고 끌려온 드라나 남작은 이를 바득 갈다 로빈을 발견하고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로빈이 자신의 검을 꺼내들고 다가오니 얼굴이 하얘져 항복을 외치는데.
“하… 항복이다! 그레이츠 후작! 내가 졌다.”
“응, 그래. 잘 가.”
“영지전에서 항복한 영주를 죽이는 법은 없어!”
“알 게 뭐냐? 여기 누가 있다고.”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라 무시하고 검을 치켜든 로빈.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는지 남작의 혀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날 살려주면 정보를 주겠다! 나한테 알고 싶은 게 있을 텐데.”
“무슨 정보? 딱히 알고 싶은 건 없는데. 그 루지란 년이 대충 다 불었거든? 네놈이 딸을 죽인 것부터 해서 다.”
“뭐… 뭣! 그년이 살아있다고? 분명 독을 먹였는데…….”
“그런데 살았더라고. 명줄이 긴 년인가 봐.”
물론 알고 싶은 게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걸 알려달라고 청해봤자 쉽게 말해줄 리는 없고 상대가 알아서 입을 여는 게 최고라 모른 척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할 말 없지? 그럼…….”
“자… 잠깐. 그래도 궁금한 게 있을 텐데? 지금 너의 영지 상태가 어떤지.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그런 게 궁금하지 않나? 지금쯤이면 내 부하가 놈을 잡았을 거다. 그놈과 나의 목숨을 바꾸는 건 어떤가?”
놈을 잡았을 거라고? 퍽이나 그러겠다. 너한테 잡힐 거였으면 진작 황제에게 덜미를 잡혔겠지.
“내 영지에서 몬스터들이 날뛰고 있다더라고. 그래서 빨리 널 죽이고 돌아가야 해.”
그리고 네 부하는 아마 다 죽었을걸? 너보다는 내가 그놈들을 더 잘 알아.
“이제 할 말은 끝?”
“그… 그래도 궁금한 게 있을 텐데, 뭐든 좋으니 다 대답하겠다. 목숨만 살려다오.”
“흠, 그래? 그렇다면 궁금한 게 없는 건 아닌데. 대체 놈은 무슨 수로 대수림에 큐브를 푼 거지?”
“그… 그건, 살려준다고 약속하면 알려주겠다.”
“오호, 알고 있긴 한가 봐? 좋아, 살려주지. 대답해 봐.”
“네놈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맹세해라! 그럼 대답하겠다.”
“뭐, 좋아.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드라나 남작을 살려주겠다. 이제 됐지?”
로빈이 맹세까지 하자 한숨을 내쉰 드라나 남작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설명했다. 영지민을 이끌고 대수림에 들어간 검은 복면의 이야기를 말이다.
“그러니까, 영지민을 납치해 대수림으로 들어갔다고? 겨우 그 정도로 큐브를 만들 순 없을 텐데…….”
“부하들은 놈이 대수림 안에 사람들을 묶어놓고 끊임없이 괴롭힌다고 했다. 고문이나 강간 같은 그런 끔찍한 짓을 계속했다더군. 그렇게 죽은 수만 천 명이야.”
“그런 식으로…….”
로빈은 고문학자들이 예전에 분석했던 죄와 관련된 이야기를 떠올리며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통과 슬픔, 타락이 쌓이면 큐브 문이 검게 물들고 큐브가 생성된다는 그 분석.
황제가 믿지 못하던 그 분석이 사실인 것이다.
그렇게 궁금증이 완전히 풀린 로빈은 다시 검을 들어 그대로 남작을 베어버렸다.
“큭! 부… 분명 살려준다고……. 네놈… 귀족이면서 명예를 그렇게…….”
“덕분에 궁금증은 해결했네. 고마워. 내 명예와 이름은 그런 식으로 쓰는 게 아니거든. 모두 영지로 돌아가요.”
갱생의 여지라도 있으면 조금이나마 찜찜했을 텐데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가 죽는 모습을 보며 가슴 아프지 않은 건 정말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절대 살려둘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영주님, 이곳 영지는 어쩔 생각이야?”
“솔직히 아무 생각 없어요. 기사 중에 대장 격인 기사 하나만 데려오겠어요?”
사실 이곳 영지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해 놓은 바가 없었다. 이 문제를 피해 없이 해결하고, 중간에 끼어든 그림자를 처리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서였다.
그렇게 로빈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자가 로빈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기사단의 부단장 에곱입니다.”
“그래요, 에곱 경. 경이 남은 기사들의 책임자입니까?”
“네, 후작님.”
“좋아요. 그럼 경이 책임지고 영지를 수습하고 계세요. 그럼 영지의 기사단장으로 임명할게요. 혹시 영지를 떠날 생각이세요?”
“아… 아닙니다. 그런데 항복한 저에게 기사단장 직을 맡기신다는…….”
“그래요. 아마 그렇게 되겠죠. 그럼 부탁할게요.”
“네, 영주님.”
에곱 경은 은근히 감투에 관심이 많은 기사인지 멋들어지게 군례를 올리고 성으로 돌아갔다.
사실 이곳 영지야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었고 중요한 건 자신의 영지였기에 그저 짐 덩어리를 떠넘긴 것에 불과했다. 저렇게라도 맡겨놓으면 며칠간은 별다른 문제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 뒤의 일은 차후에 생각해 볼 일이었다.
“좋아요! 서둘러 복귀!!”
“복귀!!”
영지를 향해 말을 몰며 로빈은 지온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전달받았다. 힘이 빠졌다는 핑계로 실속을 챙기는 린을 앞에 태우고 수정구를 쥐여준 채였다.
[폐하께서 동원하신 황실 기사단이 1,000, 황실 근위대가 2,000입니다. 그 밖에 북부 영주들과 기사들의 수가 도합 800여 명, 영주 성에 대기하던 기사단 100여 명에 치안대 500까지. 도합 4,400여 명의 병력이 영주 성 근처까지 진입한 오크들을 격살, 에테 마을 쪽으로 기수를 돌렸습니다.]
“그래요? 각 마을의 상황은요?”
[에테 마을과 우버 마을은 사실상 오크들에게 점령당했습니다. 오크들이 마을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으니 강화 마법진이 새겨진 가옥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고요.]
“그렇겠죠. 원래 시간을 버는 용도밖에 안 되니까요. 서둘러야겠네요.”
[에보니 마을은 오크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답니다. 그래도 천여 마리는 넘는데, 관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관문으로 유인해 상대하고 있다는군요.]
“아……. 집 안에 숨은 사람들보다 집 밖으로 나온 기사들을 노리는 거군요. 기사들이 관문으로 도망가니 속절없이 따라간 거고요.”
[네, 그리고 남쪽 요새 마을이 가장 치열한 격전지인데 오크들의 수가 수천 규모는 넘어선 거 같습니다. 어쩌면 만 이상일 수도 있답니다.]
“그 정도 수면 수를 파악하는 것도 문제겠네요.”
[오크 족장도 그곳에 자리 잡은 거 같은데 다행히 궁수대가 다 남쪽 요새 마을에서 대기 중인데다 워낙 성벽이 높아서 아직은 큰 피해가 없다는군요. 모야족 남자들이 모두 무기를 들고 싸우고 있으니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알겠어요. 황제 폐하께 에테 마을을 부탁하고, 저희는 바로 우버 마을로 출발하겠어요. 거리상으로도 가장 가까우니 그게 낫겠네요. 에테 마을과 우버 마을을 정리하고 바로 남쪽 요새 마을에서 합류하는 걸로 하죠.”
[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후, 가자!”
정말 운이 좋았다. 딱 봐도 블루 큐브인 게 분명한데 튀어나온 게 오크라니.
만약 리아누스 후작령에서 튀어나온 자이언트 웜 같은 게 나타났다면 막아도 막은 게 아니었을 거다. 지금 리아누스 후작령도 반파된 영지를 복구하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크들을 모두 처리한 후의 일이었다.
로빈이 이런저런 상념에 빠진 순간에도 말은 계속 달려 이제 영지 남쪽 관문이 눈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관문을 지키는 치안대가 오크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 * *
관문에 도착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가 오크들을 처리하는 전사들.
오크들의 수는 수백에 이르렀지만, 전사들과 대적하기에는 수가 많이 모자랐다.
그렇게 관문을 수비하던 수비병 100여 명이 전사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애꿎은 병사들만 잃을 뻔했네요. 통신 수정구를 더 늘려야 할까 봐요. 그리 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은 아니라 없어도 괜찮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니 또 문제가 되네요.”
“연락을 못 받아서 고립된 꼴이니 그렇긴 한데…….”
“그건 그렇고, 어때요? 상대할 만하던가요?”
“상대할 만하긴 하지. 예전에 그 리자드맨보다는 확실히 약해. 문제는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건데…….”
“게다가 인간이랑 다르게 웬만해서는 사기가 꺾이진 않는단 거죠.”
“그렇지.”
“예전에는 족장만 처치하면 돼서 억지로 뚫고 들어가 처리했는데 이번엔 그것도 아니니…….”
“그래도 족장을 처리하는 건 최우선으로 해야 할 거야. 저런 놈들은 대개 우두머리를 처리하면 사기가 꺾이거든? 그렇게라도 해야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거고.”
“그렇겠네요. 우버 마을에도 수천은 있을 텐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우버 마을에는 신전도 있잖아? 어떻게든 해보는 거지, 뭘. 죽지만 않으면 장땡인 거고.”
“우버 마을에 대기 중이던 치안대가 대략 500이니 그들이 대응하면 상대해 볼 만하려나요?”
“아아, 맞다. 치안대가 있었지. 할 만하겠네.”
“그래요. 빨리 가요.”
병사들을 추스른 로빈은 다시 전사들을 이끌고 우버 마을로 출발했다.
관문에서 우버 마을까지는 지척이라 벌써 오크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고, 저 멀리 보이는 마을에서는 수많은 오크들이 집을 부수겠다고 달려들어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리 늦지 않았는지 부서진 집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자! 돌격! 저놈들을 때려잡고 주민들을 구하세요!”
로빈의 명령에 전사들이 일제히 마을로 뛰어 들어갔다.
수천 대 수백의 싸움이지만 시가전이라 오히려 상대할 만했다. 장애물도 많은데다 적당히 산개하면 각개 격파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사들의 함성이 마을에 퍼져 나가자 로빈의 명령대로 마을에 대기하던 치안대도 뛰쳐나와 대열에 합류했다.
그렇게 수까지 불어나니 더 할 만한 싸움이 되었다.
* * *
그 시각, 우버 마을.
대수림에서 우버 마을로 숨어든 검은 복면은 진작에 침투시킨 조직의 부하들이 머무는 곳에 오늘 합류했다.
그레이츠에 외지인이 숨어드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정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외지인들 사이에 몸을 숨기는 것.
그레이츠로 도망치는 드라나 남작령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이곳에 함께 자리 잡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같은 영지 사람이라도 서로 얼굴도 모르는 경우는 허다했고, 영지에서 도망친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별다른 의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숨어든 부하들이 그레이츠에서 지낸 지 반년도 넘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놈들을 속였다고 생각되자 검은 복면 역시 이곳에 합류한 것이다.
“하, 제길.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있나?”
기대했던 대로 큐브가 등장하자마자 우버 마을로 이동, 부하들의 대열에 합류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뒤로는 정말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필이면 수만 많고 파괴력이 떨어지는 오크가 튀어나올 게 뭐란 말인가? 게다가 숫자는 더럽게 많아 자신들의 행동에만 제약이 생겼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