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수고했어요, 흑웅. 모야족이 이곳에서 굳건히 버텨준 덕분에 영지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어요.”
“아닙니다, 영주님. 놈들이 요새를 지나쳐가는 걸 막지도 못했는걸요.”
“하하, 놈들의 수가 만 단위인데 그걸 어떻게 막아요? 그건 지나친 욕심이죠. 상황은 어때요?”
“놈들이 거칠게 몰아치는 바람에 대부분 지쳐있습니다. 자칫하면 하루도 버티지 못할 뻔했는데 지원군이 제때 도착해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요, 정말 수고 많았어요.”
전사들은 대부분 로빈이 차출한데다 놈들이 침투하기 가장 어려운 곳이 이곳이라 상대적으로 병력의 수는 적었다. 그나마 멀쩡한 전력은 궁수대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주민들까지 모두 합심해 저 많은 수의 오크를 상대로 지금까지 요새를 지켜낸 건 정말 대단한 공이었다.
그렇게 흑웅을 통해 요새가 건재하다는 걸 확인한 로빈은 바로 지온에게 연락해 사제들부터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네, 영주님. 줄리에타 성녀님이 준비하고 계십니다. 바로 사제단을 이끌고 출발하실 겁니다.]
큐브 포털이 터진 지 2년 여.
많은 사제를 북부 각 영지로 파견했지만, 다시 사제를 육성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워낙 신전의 인기가 대단했기에 사제로 지원하는 여성들의 수도 제법 많았고.
로빈으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마인드였지만 신성력으로 점점 아름다워지는데다가 온갖 스킬(?)을 습득하고, 여러모로 봉사하는 사제는 영지에서 제법 인기 있는 위치였다.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원하는 사람도 많은 그런 자리랄까?
그래서 충원된 사제의 수도 기백은 되었다.
“사제님들이 오시면 봉사 치료를 주로 하게 될 테니 그 점도 꼭 주지시키세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네, 하지만 괜찮을 겁니다. 이미 줄리에타 성녀님이 철저히 준비하셨으니까요. 한동안 사제님들이 대거 활약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의욕이…….]
“…네, 뭐. 그렇죠. 원래 그런 분들이니…….”
영주인 자신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저 사제들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어쨌든 대규모 교전에서 부상자는 필연적이니 애꿎은 목숨을 구해내려면 사제들의 지원은 필수였다. 이곳 마을에도 신전은 존재하지만, 그들이 모두를 감당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사제들을 요청한 로빈은 다시 성벽에 올라 전장을 살폈다.
성벽을 기어오르며 요새를 공격하던 오크들은 갑자기 나타난 수천의 병력을 상대하느라 잠시 물러난 상황.
그럼에도 성벽 위에 자리 잡은 수백의 궁수들은 꾸준히 시위를 당겨 적들의 수를 줄여가고 있었다.
“와, 저건 뭐…….”
워프 게이트를 타고 등장하느라 대부분의 기사는 말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나마 말을 타고 이동한 건 황제와 귀족 일부에 불과했고.
물론 이쪽 세계의 기사들은 말을 타고 돌진할 때보다 두 발로 뛰어다닐 때 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는 묘한 족속들이지만 거의 종일 뛰어다니며 전투를 치르느라 제법 지쳤을 법도 한데 엄청난 파괴력으로 놈들을 분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황제와 아이리스 그리고 린이 있었다.
로빈도 황제의 무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건 처음이었다. 지난번 자이언트 웜을 상대할 때는 황제 역시 전투보다 지휘에 집중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들판에서 다수의 적과 대치해 힘 대 힘으로 맞붙는 전장에서는 굳이 황제가 병력을 지휘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저렇게 앞장서 적을 상대하는 게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되었으니 말이다.
황제의 검은 놀랍도록 간결하고 효율적이었다. 투박하고 거친 린의 검과는 또 다른 느낌이랄까?
하지만 황제의 검이 지나간 자리는 먼지만 휘날릴 뿐이었다. 모든 오크가 일격에 목숨을 잃고 먼지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칠게 설치는 린과 대담하게 움직이는 아이리스의 허점을 커버하듯 움직이는 황제는 로빈이 상상했던 기사의 이상향 그 자체였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적을 격살하는 저 효율적인 몸놀림을 보고도 경탄하지 않는다면 그건 아마 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진짜 대단하네. 아이리스라면 몰라도 린과 호흡을 맞춘 건 처음인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로빈은 이곳이 전장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황제와 린, 그리고 아이리스의 앙상블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선두에 선 세 사람이 지나가는 길에는 끊임없이 먼지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렇게 덩어리로 뭉친 오크의 대열을 뚫고 들어간 황제는 바로 오크 족장을 향해 몸을 날려 단 일 합에 놈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애당초 오크 족장 따위는 업그레이드된 황제의 상대가 아닌 것이다.
지도자를 잃은 오크는 그때부터 조금씩 지리멸렬해 갔다. 하지만 도망가는 오크는 없었는데 아무래도 두려움이나 공포가 인간에 대한 증오나 탐욕을 이겨내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산발적으로 저항하던 오크들은 서서히 먼지가 되어 결국 무로 돌아가게 되었다.
* * *
전투가 마무리된 건 거의 한밤중이었다.
온종일 전투에 지친 기사들은 모두 남쪽 요새로 들어와 휴식을 취하게 되었고.
로빈은 요새에 비축된 고기와 술을 대량으로 풀어 기사들을 대접했다. 백랑이 자신하던 루터카우 역시 황제의 술상에 올라 그 탐스러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 대단하군. 이런 맛은 처음이야.”
황제 역시 루터카우의 놀라운 풍미에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후작은 매일 이런 걸 먹는 건 아니겠지? 아니, 예전에 왔을 때는 이런 걸 대접받지 못했는데…….”
“그때는 저도 못 먹었습니다, 폐하. 이게 워낙 귀한 거라서 말이죠.”
“…나중에 황실로 진상하도록 하게. 내 값은 후하게 치르지.”
끙, 왠지 그럴 거 같더라. 내가 먹을 것도 없는데 황실에까지 진상해야 한다니.
하지만 오늘 같은 날 이걸 대접하지 않으면 양심에 찔릴 거 같아 황제에게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덕분에 영지의 위기를 넘긴 것이 아닌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값이라도 넉넉하게 받아야 할 거 같았다.
“영지가 난장판이 됐는데, 이제 어쩔 생각인가? 후작의 영지에는 무슨 보물 창고 같은 것도 없으니 말이야.”
“보물 창고요? 무슨 보물 창고요?”
“하하, 리아누스 후작령에서는 보물 창고가 발견됐거든. 덕분에 후작이 부담을 많이 덜었지.”
자이언트 웜이 온 사방을 갈아엎는 바람에 큰 피해를 당한 리아누스 후작령.
하지만 그 덕분에 조셉 공작이 꽁꽁 숨겨놓은 보물 창고를 발견할 수 있었단다. 조셉 공작이 가졌던 모든 것이 리아누스 후작에게 넘어갔기에 그 창고 역시 후작의 것이었다.
“금괴도 잔뜩이고 보석도 많더군. 기사들이 많이 상한 것도 아니라 영지를 재건하는 건 문제 없겠어.”
“…그건 참 부럽군요.”
하다못해 그레이츠도 저택 지하에 비밀 창고가 있는데 조셉 공작에게 그런 게 없을 리가. 모두 다 그 존재를 짐작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상당한 물적 손해를 입은 로빈 역시 그런 리아누스 후작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뭐, 보물 말고도 제법 많은 자료가 남아있는 모양이야. 3황자파 귀족들의 비리나 전대 조셉 공작의 치부 같은 것? 하지만 이미 멸문한 가문인데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군.”
“그렇네요. 그때 반란에 동참했던 가문들은 대부분 멸문당했으니까요.”
“그래도 뭔가 있나 싶어 살펴보려는 찰나에 사건이 터져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네. 내가 살펴보고 특별한 게 있으면 귀띔이라도 해주지.”
“네, 알겠습니다.”
로빈도 딱히 기대하는 건 없었다. 황제의 말대로 이미 멸문한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폐하. 드라나 남작령을 황실에 바치고 지원금을 얻을 수는 없을까요?”
“응? 드라나 남작령을? 음……. 이거이거, 그건 너무 고약한 거 아닌가? 어차피 돈 들어갈 데밖에 없는 영지인데 그걸로 지원금이라니…….”
“어차피 제가 가지고 있어봤자 답이 안 나옵니다. 제 영지 간수하기도 벅찬 상황인데 그 영지를 그냥 버려둘 순 없잖습니까? 폐하의 말씀대로 손볼 곳이 많은 영지인데요.”
“흠, 그건 그렇군.”
어차피 여유가 있어도 드라나 남작령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영지가 두 개가 되면 일거리도 두 배요, 스트레스는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로빈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던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뭐, 좋아. 제법 빡빡한 영지니 괜찮은 놈을 내려보내지. 후작도 협조해 달라고.”
“그래야죠. 물론 누가 와도 그놈보다는 낫겠지만요.”
“하긴 그건 그렇군.”
바로 구두로 대강의 거래를 마무리 지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마 젝트와 지온이 따로 의논하겠지만 방향만은 잡아놓은 것이다.
덕분에 로빈도 영지를 추스를 자금을 융통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후작이 큐브를 허투루 관리했을 리는 없는데 뜬금없이 블루 큐브라니. 게다가 놈은 어떻게 잡은 거고?”
황제의 질문에 로빈은 드라나 남작에게 들은 것, 그리고 우버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은 간략하게 설명했다.
드라나 남작이 자신의 영지민 천여 명을 놈들에게 바쳤다는 이야기에는 황제도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하, 그런 개새끼를 봤나. 어떻게 영주란 놈이 영지민을…….”
“…개는 또 무슨 죕니까?”
솔직히 드라나 남작을 개에 비유하는 건 개가 너무 불쌍했다. 홧김이라지만 딸을 죽이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며 그걸 이용하고, 영지민의 목숨도 파리 목숨처럼 생각했으니 말이다.
허례허식이 판치고 권위적인데다 다소 이기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 귀한 줄은 알고 명예롭지 못한 일을 꺼리는 영주들이 주류인 세계에서 그런 이단아(?)가 튀어나온 걸 보면 어떤 세상이라도 병신력 보존의 법칙은 유효한 게 분명했다.
“그러면 큐브는 놈이 만든 거란 말이군. 천 명 정도 쥐어짜니 큐브가 나왔다라…….”
“학자들의 가설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폭정이나 학정을 일삼으면 큐브가 늘어난다는 가설 말이죠. 물론 그것과 상관없이 늘어나는 큐브를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
“어쨌든 백성들이 괴로워하면 큐브 생성 속도도 빨라진다는 거군.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말이야.”
“예,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니면 세계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거라 제국 외의 다른 곳에서 인간들이 고통에 시름하고 있을 수도 있겠군요. 그리고 그건 아마 해상 왕국일 가능성이 크죠. 남부 연합국은 비교적 온건한 땅이니까요.”
“음, 그곳이 답이 없긴 하지. 요즘은 왕실을 가운데 두고 공작 둘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모양이야. 세작의 보고에 따르면 새로 즉위한 여왕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라는군. 여왕이 열여섯 살이라던가?”
“난장판이겠군요.”
“물론 그 정도로 큐브가 늘어난다는 건 납득하기 힘든 일이지만 영향이 전혀 없진 않겠지.”
그리고 황제는 내가 놈을 확인하자마자 화살로 사살한 걸 신기해하고 있었다. 하긴 누가 들어도 신기하긴 할 것이다. 놈의 정체를 마주치자마자 눈치챘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로랑까지 치면 무려 두 번째였다.
“후작의 눈에는 놈들을 구별하는 마법 센서라도 달려있는 건가?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음…….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그저 느낌적인 느낌 같은 부분이라…….”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표현이 좀 이상했는지 어디서 개소리냐는 듯이 쳐다보는 황제.
대답할 말이 없어 적당히 얼버무린 거라지만 황제의 반응이 정말 가관이었다.
뚱한 표정의 황제에게 개에게는 죄가 없다는 듯 무해한 얼굴로 응수하자 할 말이 없어진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직감적인 부분에 의존하고 있다는 거군. 대부분 맞아 들어가니 이걸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부디 신중해 주길 당부하겠네. 죄 없는 사람이 희생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야.”
사실 황제의 회귀 전에도 사람을 보는 눈만은 정확해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던 로빈이기에 이 부분만큼은 그냥 믿어보기로 한 황제는 다시 술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혼자 생각을 정리한 그는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는데.
“뭐가 좀 이상하지 않나? 놈들의 행태가 말이야.”
“어떤 점이 그런가요?”
“놈들이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건 대충 알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정보 교환조차 안 된다는 건 말도 안 돼. 자네 결혼식 날 클라운이란 놈이 덜미를 잡혔다지? 그 사실만 알았어도 놈들이 후작 앞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을 거야.”
사실 그랬다. 나부터도 이게 뭔가 싶었으니까.
처음에는 따로 파벌이라도 있나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 클라운이란 놈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거 같았다. 어디에나 미친놈이 있다지만 이 정도면 거의 팀 킬 수준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