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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292화 (292/303)

292화

조직에 그렇게나 적대적인 놈이 대체 왜 조직에 몸담고 있는 걸까?

“웃긴 건 놈들의 수장도 마찬가지다. 어떤 단체도 그런 식으로 운영하진 않아. 조직원이 서로 적대하며 제멋대로 행동하게 내버려두다니. 더 이상 단체를 운영할 뜻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야.”

“그건 그렇네요. 흠…….”

“대개 그런 경우는 두 가지 정도로 축약되는데 가장 흔한 건 단체를 운영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장의 건강이 악화하거나 문제가 생긴 경우야.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부하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되지. 제국의 역사를 봐도 흔히 있는 일이고.”

대기업 총수가 중병에 걸려 입원하거나, 황제가 노환으로 앓아누웠을 때 아랫사람들이 각자 자기 살길을 도모하는 건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례였다. 물론 놈들의 경우에는 탈퇴 외에 다른 살길이 있는지조차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는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좀 다른 경우인데, 이미 목적을 달성해 조직을 운영할 이유가 없어진 경우. 이런 경우에는 단체가 와해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지. 아니, 비밀 결사의 경우에는 오히려 구성원을 제거하는 일도 빈번하니까.”

“목적을 달성했다라…….”

놈들의 목적은 사실상 인류의 파멸인데 지금 상황을 봤을 때 딱히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황제의 말대로 놈들의 수장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조직 장악력이 떨어져버린 걸까?

확실히 일리가 있는 분석이지만 뭔가 미진한 부분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답도 없는 문제라 쓸데없이 머리만 복잡해졌다.

“어쨌든 놈들의 본거지라도 알았으면 좋겠군. 대체 어디 처박혀 있는 건지…….”

“그러게요. 제국 내에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어요.”

이미 제국 전역을 뒤진 후였고 국외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나온 상황이라 놈들의 본거지를 찾는 건 요원하기만 했다. 언제까지 끌려 다니기만 할 건지 좀 답답하기도 했고.

정말 황제의 말처럼 국외를 수색해 봐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후작에겐 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 놈들이 이렇게 본격적으로 달려든 건가? 처음 결혼식 때야 치료제 때문에 그렇다 치고, 두 번째는 부황 폐하를 공격한 것이니 후작을 노린 건 아니었지. 그런데 이번에는 영락없이 후작을 노린 공작이었는데, 짚이는 곳은 없나?”

놈들이 공격해 오니 어찌어찌 막긴 했는데 사실 나 자신도 놈들이 풀 발기(?)해 달려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걸 알고 싶어 그 베놈이란 놈을 잡고 싶었지만, 독을 다루는 위험한 녀석이라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

로랑처럼 주절주절 떠들 사이도 없이 즉사한 거라 마땅히 얻은 정보도 없었다.

하지만 놈들이 우리 영지를 목표로 한 것만은 확실했다.

내 쪽에서 놈들을 노리면 몰라도 놈들이 되레 나를 노리다니. 이놈들은 정말 나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지 못할 놈들인 거 같았다.

“글쎄요. 저도 궁금하네요. 황제 폐하라면 몰라도 저를 노리다니. 무슨 악연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군. 하지만 놈들이 그런 제스처를 보였다면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혹시 나중에라도 짚이는 게 있으면 보고하게나.”

“네, 폐하.”

황제의 말대로 놈들의 대장이 오늘내일하는 중이라 통제력을 상실해서 놈이 멋대로 우리 영지를 공격했다고 하기에는 놈과 나 사이엔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

혹시 로랑의 친구인가 싶기도 했지만 만약 그랬으면 나보다 황제를 노렸을 것이다. 내가 로랑을 한눈에 알아봤다는 걸 알고 있는 건 황제와 젝트, 황후뿐이고 로랑을 직접 처리한 건 바로 황제였기 때문이다.

원한이라면 나보다는 황제라는 거다.

황제를 상대하기 벅차서 만만한 나를 건드렸다고 하기에도 뭔가 좀 애매하다. 황제의 최측근은 나라기보다는 젝트와 조단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를 공격하는 거나 그 둘을 공격하는 거나 난이도는 비슷한 수준이었으니 굳이 나를 선택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나를 공격해야 하는 무슨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의미인데.

“그건 그렇고, 자네의 둘째 부인은 정말 대단하더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한다는 게 느껴질 정도야. 저번에 봤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상념에 빠져있던 로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황제가 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였다. 저 황제가 저렇게 감탄하는 모습을 보니 점점 발전하는 린에 대한 뿌듯함이 가슴에 차올라왔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대화의 초점 역시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옮겨졌다. 사실 놈들 문제는 복잡하기만 하고 답도 없어서 더 의논해 봤자 소득도 없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물론 녀석은 황제 폐하께서 족장까지 처리하시는 바람에 심통이 났지만요.”

“하하, 맞아. 그래 보이더군. 대공을 세워 상을 받으려고 했다는데……. 후작은 대체 무슨 상을 주길래 부인이 그렇게 열성적인가? 역시 부인이라면, 그건가?”

“음… 뭐…….”

“내가 레니아에게 듣기로는 후작이 정말 굉장하다더군. 다이앤이 그리 자랑을 할 정도니 아마 대단하긴 하겠지. 호리호리한 체격임에도 그 정도라니, 참 놀라운 일이야. 혹시 유전인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다이앤이 황궁에서 황후와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아줌마들의 주특기인 남편의 정력 자랑 겸 음담패설 쪽으로 자연스레 넘어갔다고 한다.

그때 황후가 1정실 2부인을 거느린 로빈보다 1정실 3첩을 거느린 황제가 산술적으로 봐도 더 뛰어난 게 아니냐고 치고 나오는 바람에 울컥한 다이앤이 로빈의 침대 전적이 어떤지 밝혀 황후의 감탄을 산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론 저 황제가 심심하면 그 이야기를 꺼내며 은근히 나를 놀렸는데.

그래도 유전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나?

우리 아버지야 솔직히 템빨이지. 내 몫으로 들어온 그것까지 모조리 아버지가 드시고 계시니…….

생각하니까 또 은근히 억울하네.

“그러고 보면 자네의 둘째 부인이 은근히 아이리스랑 비슷하군. 그 녀석도 공을 세우면 바로 상부터 달라고 칭얼대다 레니아에게 응징당하곤 하는데……. 이번에도 내가 족장을 처리하는 바람에 공을 놓쳤다고 얼마나 칭얼대던지.”

“…그렇습니까?”

“설마 그쪽도 그런가?”

“네? 네, 뭐. 원래 정실과 다른 부인, 혹은 첩과의 관계가 그런 거니까요. 공에 탐욕스러운 거야 기사들의 전매특허 같은 거고요.”

갑자기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지만 단정한 느낌의 본 투 비 기사 아이리스도 황제 앞에서는 은근히 밝히는 여자인가 보다.

역시 여성용 성인 용품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 그런 세계답다고 할까? 이런 부분에서는 한결같았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아내와 잠자리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뭔가 풀어진 기분?

이러니저러니 해도 놈들 중 하나를 처리한데다 영지로 몰려온 오크들까지 막아낸 날이라 흥이 좀 오른 모양이다. 물론 뒤처리가 남긴 했지만 위기감까지 느껴졌던 것에 비해서는 피해도 미미했고.

황제 역시 그런 기분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리라.

내일의 고난이 자신을 기다릴지언정, 오늘 하루는 푸근하다.

뭐, 이런 마인드 아닐까?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연회가 마무리될 무렵.

황제가 지나가듯 다른 곳의 소식을 전해줬다. 영지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 미처 신경 쓰지 못하던 이야기였다.

“리아넨이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더군. 상황이 여의치 못해 돕지 못했다고 말이야. 그레이츠에 몬스터가 나타난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하여간 황도 소식에 빠른 인간이라니까.”

리아넨과 레오니스는 지금 레드 큐브 공략전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 황제도 내일이면 그쪽으로 출발할 테고.

레오니스 이후에 바로 리아넨이 레드 큐브를 공략하게 될 테니 다른 영지 일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을 거다.

심지어 리아넨 공작은 놈들의 협잡조차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영지전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코웃음을 치며 드라나 남작의 어리석음을 비웃지 않았을까?

“아마 라이언은 큐브가 터졌다는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겠군. 그 녀석은 축제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영지로 돌아갔으니 말이야.”

“그렇네요. 남쪽 바다가 갑자기 어수선하다면서요?”

로빈도 축제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영지로 돌아와 영지전을 준비했지만 라이언은 로빈보다 더 심각한 표정으로 영지로 돌아갔다.

해상 왕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였는데 그런 라이언이 하루 만에 종결된 몬스터 폭주 소식을 전해 들었을 리 만무했다.

제법 친한 영주들이 지원 병력을 보내지 않은 걸 변호해 주는 건가? 딱히 서운함을 느끼거나 그런 건 없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리아누스 때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하루 만에 지원 병력을 보낼 순 없었다. 난리가 며칠간 이어진다면 몰라도 말이다.

북부의 영지들이야 이웃이기도 하고 같은 지역이라 그레이츠의 동향에 많은 영향을 받는 영주들인데다 그들 자신의 영지에 특별한 일이 없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거고.

그나저나 남쪽 바다라.

또 무슨 변고가 일어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게 그레이츠에서 하루를 보낸 황제는 다음 날 바로 병력을 이끌고 황도로 돌아갔다.

아마 오늘이나 내일 중에 레오니스로 출발하고, 그쪽 일이 마무리되면 또 리아넨으로 자리를 옮겨 레드 큐브를 클리어하게 될 거다.

정말 바쁘게 사는 양반이었다.

그리고 로빈은 본연의 일로 돌아가 이제 영지 피해 상황을 살펴보고 복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 * *

황도로 떠나는 황제와 각 영지로 돌아간 북부 영주들을 배웅한 로빈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각 마을의 동향을 보고받았다.

“인명 피해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마을 두 개가 점령당했지만 상대가 오크라 집으로 대피한 주민들이 모두 무사했습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어디 보자……. 에테 마을의 농부 일곱이 실종, 사망으로 추정. 이건 뭔가요?”

“밭일을 나갔던 농부 일곱이 대피 명령을 듣지 못해 마을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말이 실종이지 상황이 상황이라 사망이 확실합니다.”

“밭일이요? 영지전인데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하루는 모두 마을에서 대기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나요?”

“그랬습니다만……. 어르신들이 나가겠다고 우기면 치안대가 저지하기 힘들긴 합니다. 기사단이라면 모르겠지만요.”

“하. 이거야, 원.”

승리가 확실한 영지전이었지만 상황이 애매해 주민들을 통제했었다. 물론 모든 주민이 영주의 뜻대로 정확히 움직여주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지만 조금만 신경 썼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기에 입맛이 씁쓸했다.

“주민들을 통제하지 못한 치안대는 감봉 조치하세요.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주민들에게 확실히 알리시고요.”

“네, 영주님.”

사고라고 할 만한 부분은 그게 전부였다.

나머지는 오크들을 막다 사망한 남쪽 요새 마을의 모야족 청년들이나, 에보니 마을에서 기사들과 함께 오크들을 막다 사망한 클리너, 혹은 마을 청년들 정도였으니까.

거기에 로빈과 함께 출정했던 전사들, 그리고 남쪽 관문에서 예고 없이 쏟아진 오크들을 상대하다 사망한 치안대원까지 모두 합치니 언데드 대란 이후 가장 많은 인명 피해였다.

물론 사고의 규모에 비하면 미미한 피해라고 평가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에테 마을의 농경지는……. 완전 망했네요. 싹이 막 올라오는 시기에 그렇게 분탕질을 쳐놨으니…….”

“네, 올해 수확은 포기하고 밭을 다시 손봐야 할 거 같습니다.”

“식량이라……. 이건 따로 알아봐야 할 문제네요.”

“그리고 에테 마을과 우버 마을의 상점가와 노점 거리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렇겠죠. 밖에 내놓은 물건까지 챙겨 들어갈 여유가 있었겠어요?”

인명 피해보다 더 심각한 건 역시 물질적 피해였다.

가장 큰 문제는 올해 농사가 완전히 망했다는 것.

막 싹이 올라올 시기에 밭이 엉망이 되면서 올해 수확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게다가 내년에라도 농사를 지으려면 밭을 다시 손봐야 하니 일도 많이 늘었고.

두 마을의 상점 거리가 엉망이 된 것도 큰 피해지만 영지 식량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에테 마을의 농경지가 상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황도에 판매할 제품들이 멀쩡하다는 거네요. 에보니 마을 공방 거리는 피해가 거의 없어서요.”

“네, 기사들이 오크들을 끌고 관문까지 도망친 게 주효했습니다. 피해가 전혀 없는 건 아닌데 중요한 물건은 들고 도망칠 시간을 벌었으니까요. 남쪽 요새 마을과 에보니 마을 간의 거리도 있어 물건을 옮길 시간이 충분했습니다.”

공방 거리에서는 황도에 팔 물건들이 많이 만들어진다. 로빈이 질색했던 그레이트 A, B. 그리고 지금도 군부에 납품하는 혼 래빗 가죽까지.

만약 그것들이 다 상했으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보았을 수도 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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