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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293화 (293/303)

293화

“그리고 이건 정말 의외인데, 혼 래빗 사육장과 루터카우 목장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오크들이 전혀 접근하지 않았다는군요.”

“그러네요. 신기한 일이긴 하네요.”

남쪽 요새 마을과 에테 마을 사이에는 혼 래빗 사육장과 작은 마을이 위치해 있었다.

남쪽 요새 마을에서 올라온 오크들이 에테 마을까지 침입했는데 그 작은 마을에 오크들이 난입하지 않았단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이 전혀 없다면 몰라도 그곳 역시 수는 적지만 버젓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어떻든지 간에 혼 래빗이 건재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영지의 식량 문제도 그렇고, 가죽이나 여러 부산물을 계속 얻을 수 있어서였다.

만약 이곳까지 망가졌으면 다시 혼 래빗을 키우는 일부터 당장 다음 분기에 납품할 가죽까지 문제가 생겨 제법 곤란할 뻔했다. 물론 황제가 지원해 주기로 했지만, 그 돈으로는 농경지를 다시 손보고 식량을 사는 게 더 급했으니 말이다.

“이게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수림에 전사들을 보내 조사해 봤는데 이상한 점이 있더라고.”

“뭐가요?”

“놈들의 수가 어마어마했잖아?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수들의 시체가 전혀 보이지 않았어.”

“마수들의 시체가 없다?”

“수가 많으니 하급 마수들은 덤벼들지 않았다 쳐도 제법 이동 거리가 길어서 중급 마수들의 영역을 몇 군데나 지나쳐왔단 말이지. 상대의 수가 많다고 위축될 놈들이 아닌데 말이야. 놈들이야 죽어도 먼지가 되어버리니 그렇다 치지만 마수들의 시체를 먹어 치운 게 아니라면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거든?”

“그렇겠죠. 그리고 마수를 먹는 놈들이었으면 혼 래빗 사육장을 그렇게 지나치지도 않았겠죠. 가축들은 모조리 먹어 치웠는데요.”

백랑의 첨언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로빈의 표정이 조금 구겨졌다. 한 번이라면 우연이라고 치부하겠지만 그게 반복되면 결국 뭔가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뭔가 있네요. 마수와 몬스터라. 물론 마수 가죽을 입고 큐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부터가 이상한 일이지만……. 그래서, 놈들이 어디에서 온 건지 흔적은 찾았나요?”

“그건 아직. 최소한 영지와 드라나의 경계쯤은 되는 거 같아. 제법 멀리 나갔는데도 흔적이 계속 이어져 있더라고.”

“그래요? 이왕 확인하는 김에 마수들의 영역도 점검해 주시겠어요? 많은 오크가 한꺼번에 지나오면서 영역이 어그러졌을 수도 있으니까요.”

“응, 영주님.”

마수와 몬스터가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신기한 일이긴 하지만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큐브는 인간들이 사는 곳에서만 생겨나고, 그곳에는 마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처럼 의외의 일이 일어날 경우에는 조금 다르지만 천 명이 넘는 영지민을 희생하는 그런 짓을 또다시 할 수 있을 거 같진 않았다. 애당초 그걸 허락할 영주도 없을 거고.

반면 마수의 영역이 엉클어진 건 바로 영지 안전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니 오히려 그쪽을 더 신경 쓰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모야족은 괜찮은 건가요? 마을 앞에서 그 난리가 났으니 분위기가 그리 좋을 거 같진 않은데.”

“우리 마을이야, 뭐. 그래도 희생자가 있다 보니 썩 좋진 않지. 하지만 금방 괜찮아질 거야.”

“당분간은 원정도 없을 테니 주민들을 잘 다독여주세요.”

“끙, 그런 건 내 전문이 아닌데…….”

“정 안 되면 월아 님께 의지하시든지요. 괜히 분위기도 그런데 들쑤시지는 마세요. 아셨죠?”

“응, 그럴게.”

워낙 엉뚱한 인간이라 괜찮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월아한테 따로 전령을 보내 당부하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예전에는 백랑 쪽으로 압도적으로 기울어 있던 저 부부의 역학 관계도 요즘은 그 저울추가 슬슬 월아 쪽으로 넘어가는 분위기였으니 월아가 백랑을 어느 정도는 커버할 수 있을 것이다. 적호도 요즘은 백랑보다 월아랑 다니는 걸 더 즐기는 거 같고.

설마 중년 가장의 애환인가? 혹시 힘이라도 떨어진 건……. 아니, 아직 그럴 때는 아니지. 아직 한창때인데.

엉뚱한 생각을 한쪽으로 치운 로빈은 백랑에게 모야족의 민심을 달래주라고 지시한 후 바로 루이를 찾았다.

“루이 경, 치안대는 어떤가요? 이번에 제법 희생이 있었어요.”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분위기가 그리 좋진 않습니다. 죽은 동료들도 그렇지만 영지 문제를 스스로 해결 못 해서 다른 곳의 힘을 빌렸다는 걸 굴욕적으로 생각하는 병사들이 많아서……. 차라리 치안대가 한곳에 모두 모여있었으면 할 만하지 않았겠냐는 말도 있고요.”

“아, 그래요? 그건 또 생각 못 한 부분이네요.”

단순히 희생자 때문에 사기가 떨어졌겠거니 했는데 이번 일이 병사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입힌 모양이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마음 써봤자 우리만 손해였다.

“괜한 생각 하지 말라고 단속하세요. 어떤 영지도 만 단위의 오크를 단독으로 상대할 순 없어요. 만약 우리 치안대와 기사단, 전사들까지 모조리 남쪽 요새에 대기하고 있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하면 버틸 순 있었겠지만, 이번처럼 오크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 버티는 게 무슨 의미예요?”

“네, 영주님.”

“굳이 따지자면 치안대는 적을 때려잡기 위한 병사라기보다는 영지민을 지키는 병사들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마을 사람들을 신속히 대피시킨 건 정말 훌륭했어요. 조금의 잡음이 있긴 했지만, 덕분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구했죠. 그 점은 확실하게 치하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우버 마을에 잠복해 있다가 불순분자들을 처리한 대원들에게는 따로 상을 내리세요. 월연 님께도 고맙다는 말 꼭 전해주시고요. 월연 님이 제대로 해주시지 않았으면 정말 많은 사람이 다쳤을 거예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 사람에게 꼭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병사들과 모야족의 사기까지 체크한 로빈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영지 복구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아무래도 올해는 토지를 정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겠네요. 지온, 창고는 괜찮은 거죠?”

“예, 다행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식량 비축분이 그리 넉넉한 건 아니라…….”

“요즘은 그쪽에 조금 소홀했었죠? 대충 반년치는 되나요?”

“네, 딱 그 정도일 겁니다.”

다양한 재앙과 남부 지방의 변고를 대비해 만들어놓은 창고였지만 큐브가 생겨난 이후 2년이나 지났음에도 식량 생산은 순탄한 편이라 식량 비축에 조금 소홀했었다. 마을을 강화하는 데 많은 자금이 투입되면서 그런 면도 있고.

그래도 반년치는 있다니 이번 가을에 본격적으로 식량을 사들이면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주노에게 연락해서 당분간은 식량 매입에 집중해 달라고 하세요. 에테 마을과 우버 마을은 올해와 내년까지 세금을 면제하고요. 농지는 빠르게 정리하는 게 유리하니 주민들의 힘을 한번 빌려보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회의를 얼추 마무리한 로빈은 백랑을 따로 불렀다. 상황이 상황이긴 하지만 드라나 남작을 산 채로 잡아와 두 개의 소원권을 획득한 백랑이 아무런 언질도 없어서였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상대가 백랑이다 보니 또 엉뚱한 요구를 할까 걱정돼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아~ 그거? 글쎄…….”

“따로 생각하신 건 없나 보네요?”

“있는데 실현 불가능이라서. 첫 아이는 린에게라든지. 그런 건 현실적으로 무리잖아? 괜히 린만 마님께 미움받는다고.”

“그건 그렇죠. 다른 건 몰라도 다이앤이 그건 양보하지 않을걸요?”

역시 엉뚱하긴 하지만 즉흥적인 전사들보다는 생각이 깊다.

전사 중 누군가가 드라나 남작을 잡아왔으면 70% 정도의 확률로 그걸 요구했겠지? 물론 들어줄 수도 없는 일이라 거절하면서 마무리됐겠지만.

아니, 차라리 그게 나았나? 그럼 완전히 공먹을 수 있었는데.

“뭐가 좋을까……. 아, 그래.”

로빈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백랑은 뭔가 떠올랐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지금은 영지 상황이 좀 그렇지만 살림이 좀 풀리면 풀장에 다양한 놀잇거리가 있으면 좋겠어. 예전에 마님께서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시던데… 그런 거 말이야.”

“아~ 그거요? 음……. 알겠어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게요. 그런데 왜 굳이 그런 걸 원하시는 거예요?”

“하하, 나도 은퇴하면 마을에서 지낼 텐데, 뭔가 마을에서 즐길 게 있으면 좋겠더라고. 뭐,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았지만 말이야.”

터가 좀 안 좋은가? 은근히 빨리 은퇴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은데.

백랑은 은퇴를 언급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이제 갓 40대에 들어선 정도였으니 말이다.

최소한 10년은 더 일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폴 경처럼 골수까지 뽑아 먹고 난 후?

자기는 20대에 은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주제에 남에게만은 가혹한 로빈이었다.

백랑의 은퇴는 턱도 없는 이야기지만 풀장의 확장, 업그레이드라는 안건은 그럴듯했다. 지금 당장은 무리지만 그때보다 기술이 더 발전한 상황이니 불가능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큐브로 인해 강해진 전사들이 늘어나 마수에 대한 위협에서는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으니 남쪽 요새를 그런 식으로 단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이건 조금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야 할 거 같았다.

* * *

이후로 며칠은 영지의 피해를 확인하고 복구를 준비하는 작업으로 바빴다.

그리고 그쯤, 레오니스와 리아넨이 레드 큐브를 무사히 처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앞으로는 중부와 동부 역시 레오니스와 리아넨이 각자 알아서 레드 큐브를 담당하는 체제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덕분에 황제의 부담도 한결 가벼워졌다.

“역시 이런 식으로 진행되네. 레이드 소설의 거대 길드처럼 대영주가 그 일을 담당한다는 거네. 영주가 존재하고, 모든 무력이 영주에게 모이는 시스템이니 이게 당연한 건가?”

그리고 그쯤, 황제가 푸시 캣츠 쪽을 통해 흥미로운 정보 한 가지를 전달해 왔다.

[내가 전대 조셉 공작의 비밀 창고가 발견됐다고 얘기했을 거야. 기억하나?]

“네, 금은보화가 한가득이라고 하셨죠. 꽤 부러웠습니다.”

[그래, 그런데 거기서 재미있는 걸 찾았지. 바로 보낼 테니 한번 확인해 보게. 그리고 나중에 다시 연락하자고.]

“네, 뭐…….”

재미있는 정보라길래 뭔가 하고 살펴봤는데 생각지도 못한 정보였다. 전대 황제인 룩센 대제, 그러니까 장인어른의 재위 초기, 전대 조셉 공작이 계획했던 음모에 대한 정보였으니 말이다.

[흑마법사 원로 아젝스를 포섭, 대규모 언데드 창궐 마법 연구

목적

―황제의 재위 초기 민심을 흔들어 지지 기반 약화

―황제파 귀족들의 영지에 실질적인 피해를 가중함으로써 지지 기반 약화

최종 목적

―황제 룩센을 폐위, 신황제 옹립. 대상은 황제(皇弟) 히로시 대공

프로젝트 폐기 사유

―너무 많은 비용 지출로 효율성 문제 발생, 제고

―마법 효과의 불확실성 때문에 지역을 특정할 수 없어 위험 부담 가중

최종 판단: 폐기

―납치한 아젝스의 가족, 모두 사살 후 은폐

―납치한 아젝스 살해, 폐기 처분

―기타 모든 자료 폐기]

“이거… 뭔가 싸한데. 이런 마법을 연구하고 있었단 말이지.”

이 자료는 룩센 대제 재위 초기, 민심을 이반시켜 신황제를 옹립하기 위하여 선대 조셉 공작이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었다.

룩센 대제의 정치적 성향을 잘 알고 있던 선대 조셉 공작은 그의 재위 초기부터 부단히 대립했던 정적이라고 들었다. 반란만 일으키지 않았다 뿐이지 언제나 날 선 대립이 계속되었고.

그 대립은 히로시 대공이 사망하고 선대 조셉 공작이 은퇴하면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히로시 대공이 자손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른 시기에 요절하면서 마땅히 제위를 이어받을 황족이 남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실의에 빠진 전대 조셉 공작이 낙향하고, 그다음 대 조셉 공작은 방법을 바꿔 자신의 여동생을 룩센 대제의 황비로 만들었다. 그 여자가 바로 훗날 3황자와 함께 반란으로 목숨을 잃은 폐황후였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연구가 마무리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중도에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내용이 너무 공교로웠다.

그리고 황제가 건네준 다음 자료에는 아젝스를 살해해 프로젝트를 은폐하려던 전대 조셉 공작 일당들이 부상당한 아젝스를 놓치고 계속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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