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하지만 정말 충격받은 건 바로 클리너들이었다. 큐브를 클리어하며 제법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큐브 밖으로 뛰쳐나온 수많은 오크를 마주하니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큐브 내에서는 그나마 상대할 만했던 오크였는데 이 정도로 큰 격차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클리너들은 자신들의 수준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게 되었다.
게다가 로빈이 자신들에게는 어떠한 도움도 요구하지 않은 것 역시 큰 충격이었다. 이런 위기 시에 자신들을 소집하지 않은 건 처음부터 자신들을 전력 외로 판단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충격을 받은 세 부류가 다시 검과 도끼를 들고 맹렬하게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가장 신난 사람은 바로 백랑이었다.
“훈련장을 다시 개방하자고요?”
“응, 영주님. 청년들의 요청이 거세네. 치안대 쪽에서도 은근히 원하는 거 같고.”
“음……. 그래요?”
예전에 치안대가 훈련하던 그 훈련장은 이제 새로운 클리너들을 모집할 때만 훈련장으로 사용하고 평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동안 꽤 많은 클리너가 탄생하면서 요즘은 그 수도 그리 많지 않았고.
그래서 그 훈련장은 비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잘 사용하지 않는 훈련장을 다시 사용하겠다는 건 막을 이유가 없었지만 왜 굳이 그런 고행(?)을 자처하는지는 의문이었다. 백랑이 저리 설치는 걸 보면 그가 훈련을 총괄하는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에이, 영주님은……. 당연한 거 아냐? 자존심에 금이 간 거지. 원래 남자는 자존심 빼면 시체라고.”
백랑은 로빈에게 요즘 분위기가 어떤지 쉽고 자세하게 설명했다.
덕분에 로빈도 병사들이나 마을 청년들, 그리고 클리너들이 무슨 생각으로 훈련을 요청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병사들은 모조리 기사급으로 올라가야겠다는 분위기야. 치안대와 전사단까지 기사 2천이면 그 정도 오크들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다는 거지. 뭐, 황제 나리께서 동원하신 기사가 수천이긴 하지만 그레이트 출신 기사 2천이면 어디 가서 꿀리진 않을 거야.”
“그게 말처럼 쉽겠어요? 그럼 전사 아닌 모야족은 아무도 없겠죠.”
“하하, 그건 그렇네. 그래도 의지가 그런데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잖아?”
“그렇다기에는 백랑 님의 표정이 너무 밝은데요.”
“끙. 뭐, 질질 짜는 부족민을 달래주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고 생각하긴 하지. 하지만 원래 그런 일이 있을수록 불타오르는 게 우리 부족이라, 이 말씀이야. 이게 정상이라고.”
어차피 안 되는 일에 매달리는 건 자존심이 아니라 헛수고라고 생각하는 로빈이었지만 그렇다고 의지에 찬 병사들의 요청을 외면할 순 없었다.
저렇게 훈련하다 병사 몇이라도 기사로 업그레이드되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 거고, 그게 아니라도 이번 난리의 안 좋은 기억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거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좋아요. 훈련은 백랑 님에게 일임할게요. 그런데 대수림 수색은 어떻게 되었어요? 히센 님께 약품 받으셨죠?”
“아, 그렇지. 그거 생각보다 더 괜찮은 놈이던데? 대수림을 수색하기가 한결 편해졌어. 덕분에 그 큐브가 어디서 시작됐는지도 쉽게 찾았지. 근처에 썩은 시체들하고 해골들이 쌓여있는 걸 보니 딱 거기겠더라.”
“그래요?”
“응, 위치는 대충 우리 영지와 드라나 남작령의 중간 정도. 왜 우리 영지 쪽으로만 몰려나왔나 했더니, 거기부터 우리 영지 쪽으로 미묘한 피 냄새가 나더라고. 무슨 약이라도 쓴 모양이야.”
“약이요? 진짜 가지가지 했네요.”
정말 약 만드는 능력 하나만은 비상한 놈이다. 대체 얼마나 많은 걸 만들어놓은 걸까?
어쨌든 그렇게 큐브가 터진 자리를 확인했으니 이제 그곳부터 영지까지 마수들의 생태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확인할 차례였다.
“그래요. 그럼 마수들의 영역은 어떻던가요?”
“물어 뭐 해? 엉망이지. 이번 겨울은 꽤 혹독하겠어.”
“하, 그래요?”
“응, 하지만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히센 님께 들은 바로는 마수 부산물이 꽤 많이 필요하다던데.”
걱정할 거 없다더니 대답은 하지 않고 느닷없이 마수 부산물 이야기를 꺼내는 백랑에게 의아함을 느낀 로빈은 저 양반이 또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네, 그렇긴 해요. 본격적으로 독이랑 해독제를 만들어야 하거든요. 연구할 재료 정도는 충분하지만, 본격적으로 생산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재료가 모자라죠.”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병사들의 훈련을 마치면 대규모 병력으로 대수림을 원정할 계획이거든. 어떻게 생각해?”
“대수림 원정이라……. 수를 미리 줄여놓겠다는 건가요?”
“응, 어차피 겨울에 나올 놈들인데 훈련도 겸해서 경험이나 쌓으려고. 치안대를 두 쪽으로 나눠서 1천 명 정도랑 기사들, 전사들, 거기에 클리너까지 합치면 수가 제법이잖아? 그 정도 병력으로 두 번 출동하면 겨울에 기어 나올 놈들도 별로 없을걸?”
그러니까 어차피 마수 부산물도 필요하니 겸사겸사 들어가서 수나 줄여놓자는 이야기였다. 놈들의 혼란이 다 정리된 겨울보다 서로 싸우고 있는 지금이 토벌하기 좋다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싶었다.
“뜻은 좋은데 말이죠. 그렇게 떼거리로 몰려갔다가 상급이나, 그 이상을 자극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아시잖아요? 괜한 전투로 사람들 다치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 거요.”
“글쎄. 이제 우리가 상급 마수를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까? 솔직히 예전에도 열 명이서 가메라를 잡았지? 지금이면 나랑 린, 그리고 멀쩡한 기사들 서넛만 있으면 잡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음…….”
“그리고 말이야. 영주는 병사들을 너무 과보호해. 물론 그게 나쁜 건 아닌데, 전사들은 싸워야 실력이 는다고. 싸우려면 결국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그건 그렇지만요.”
“병사들의 의지가 하늘 끝까지 올라간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렇게 실전 경험을 쌓아보겠어? 원정을 떠나도 어차피 지원자만 받을 거 아닌가? 지금 같은 시기에 미리미리 경험을 쌓아놔야 또 문제가 생겼을 때 수월하단 말이지.”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내가 병사들을 너무 과보호하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거친 전투는 가장 믿을 만한 전사들만 동원해 싸운 경우가 많았다. 섣불리 병사들을 동원했다가 피해가 늘어날까 두려워서였다.
이번 오크 침공에도 클리너들과 치안대를 모조리 동원해 적극적으로 막았으면 영지 전력만으로도 제법 괜찮은 전투가 벌어졌을 수도 있다. 그랬으면 농지가 망가지고, 상점 거리가 파괴되어 입은 재산 피해 정도는 제법 줄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인적 피해가 예상되었기에 바로 후퇴하는 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경험을 쌓아야 강해지고,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는 백랑의 말은 와닿는 부분이 있었다. 언데드 난리나 마수 범람처럼 피할 수 없는 전투가 벌어진 시기에 전사들이나 기사들이 가장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좋아요, 백랑 님. 두 개의 부대로 나누어서 대수림 원정을 허락하겠어요. 하지만 인명 피해는 최소화하시고, 지원자만 받아가세요. 그리고 웬만하면 상급 마수의 영역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 그 정도는 지켜주실 수 있죠?”
“그럴게, 영주님. 안심하라고. 신전에 부탁해서 사제님들도 많이 모셔갈 테니까.”
“끙, 신전에서 그런 일에 사제님을 보내주실지 모르겠네요. 대수림 원정이라니. 사제님들도 위험하잖아요?”
“에이, 이거이거. 영주님께서 요즘 신전에 안 가보셨군. 요즘 사제님들이 또 다 한가락씩 하시거든. 레아 사제가 롤모델처럼 됐단 말이지. 작년부터 클리너에 지원한 사제들만 해도 그 수가 제법 되는데 영주님은 확인 못 하셨나?”
“…그래요?”
사실 몰랐다.
몇 명이 지원해 몇 명이 추가되었다는 정보는 올라오지만, 그 사람들의 직업과 성별 같은 건 보고서로 올라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인간은 그걸 어떻게…….
아, 그래. 월아 님도 사제지. 요즘도 신전에 자주 들르는 월아였으니 신전 사정에 능통한 건 당연했고, 그 이야기가 백랑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어쩌면 대수림 원정을 계획하며 월아에게 신전의 사정을 물어봤을 수도 있고.
어쨌든 백랑도 대수림 원정을 제법 진지하게 고민한 거 같았다.
다만 사제들이 전투에 합류하기 시작했다는 건 좀 의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투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제들인데 클리너라니. 레아 사제처럼 버프나 치료를 위주로 활동한다고 해도 제법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영지 처녀들이 사제의 길을 걷는 경우가 늘어났다더니, 아무래도 거친 그레이츠의 지역 색이 그렇게 표출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신전에서 허락해야 그런 활동도 할 수 있는 거라 로빈이 막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백랑이 병사들의 훈련을 책임지고, 몇 개월의 훈련 후, 대수림 원정까지 담당하기로 했다.
어차피 백랑 혼자 관리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루이나 르보른, 어쩌면 폴에게까지 협조를 요청하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로빈은 훈련 경과를 지켜보고 수준 미달이라고 판단되면 원정을 허가하지 않으면 충분하기에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사실 농지 문제와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 해도 골치 아픈 일이었으니 말이다.
* * *
연구진은 독약과 해독약의 연구에, 병사들은 훈련에, 관료들과 영주인 로빈은 농지 문제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 게 벌써 한 달.
영지는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아니, 더욱 안정적인 형태로 변해가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망가진 농토를 개간하는 김에 아예 농지 정리를 병행했다. 처음 에테 마을을 건설할 때는 다른 일도 많았고, 상황도 여의치 않아 개간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동선이나 갓길 같은 편의성은 전혀 신경 쓰지 못해 통행이 불편한 면도 많았는데 그 점을 모두 개선한 것이다.
처음에는 농사를 망쳐 망연자실해하던 농민들도 로빈이 넉넉한 일당을 지급하는데다가 올해와 내년까지 면세한다는 사실, 그리고 외부에서 충분히 식량을 구입할 거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자 다시 힘을 되찾았다.
알버스와 실비아를 중심으로 급조된 해독제 연구 팀도 금방 해독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단순히 해독제를 만들어낸 정도가 아니라 기존에 판매되던 해독제에 영지에서 개발한 해독제를 첨가해 여러 방면에서 사용되는 종합 해독제로 업그레이드시킨 건 연구진의 쾌거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개발하던 마수 퇴치제가 무용지물로 돌아가자 이를 갈던 실비아가 이번에는 제법 괜찮은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게 실비아는 상 하나를 킵해놓고 매일 린을 놀려댔다. 그때마다 린이 부들거리면서 억울해했는데 아마 그 모습을 즐기기 위해 상을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다.
첫 주에 바로 해독제를 만들어낸 연구 팀은 이제 양산을 위한 생산 설비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 영지의 병력이 대수림 원정을 다녀오면 바로 대큐브용 독약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독과 해독제가 모두 준비되자 로빈은 바로 황제에게 알렸다.
맹독은 아무래도 취급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황실에서도 우려를 표해 대량 생산을 포기했지만 마비 독은 효과를 인정받아 황실에서도 로열티를 지급하기로 했다.
다만 해독제는 기존 큐브제 해독제를 업그레이드한 거라 로열티가 없었다. 기존의 해독제도 로열티가 없기 때문에 그것에서 파생된 새로운 해독제도 로열티를 지급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황제 역시 마비 독의 유용함을 알아보고 대량 생산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것의 로열티만 해도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심지어 황제는 영지의 사정을 고려해 로열티를 선지급하기로 약속했다.
황제의 영지 복구 지원금과 마비 독 로열티, 그리고 각종 물건을 판 금액까지.
모든 수익을 합치니 그 금액이 상당해서 영지민을 동원해 농지를 개간하고 내년까지 먹을 식량을 구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병사들은 가을 출진을 앞두고 훈련에 한창이었다.
농지 개간 상황을 주시하던 로빈도 가끔 훈련장에 들렀는데 예상했던 대로 루이와 르보른, 폴까지 모조리 훈련장에 나와 병사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렸다.
거기에 실비아에게 시달리던 린까지 교관으로 합류했으니 훈련 강도가 얼마나 가혹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강도 높은 훈련.
심지어 자율 참석이라 빠져도 뭐라 할 사람 없는 그런 훈련이었지만 병사들의 열의는 정말 대단했다.
가을에 대수림 원정이 계획되어 있고, 원정의 대가 역시 두둑하게 지급될 예정이지만 단순히 포상으로 저런 열의를 끌어낸 거로 생각하기는 힘들 정도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