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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설 속 로빈-297화 (297/303)

297화

백랑의 말대로 더 강해지겠다는 열망과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그들의 의욕을 고취한 거 같았다. 남자는 자존심이라더니, 그 자존심의 가치가 생각보다 무거운 모양이다.

드라나 남작령에는 베이스 하란 남작이 새로운 영주로 부임했다.

하란 남작은 기사 출신의 관료 귀족이었는데 재무부 쪽에서 일하던 재원이었다.

오랫동안 착취당했던 영지라 행정적으로도 처리할 일도 많고, 지리상으로는 대수림과 맞닿아 있어 전투에 대한 소양도 적잖이 필요한 자리였기에 황제가 엄정하게 선발해 임명한 인사라고 한다.

하란 남작은 드라나 남작령, 이제 하란 남작령이 된 자신의 영지로 갈 때 그레이츠에 들러 따로 인사를 올리고 출발했는데 내가 보기에도 제법 능력 있어 보이는 영주였다.

문무겸전의 이도류라고나 할까?

이제 앞으로 옆 동네가 시끄러워 피곤할 일은 없을 거 같았다.

하란 남작이 영지에 들렀을 때 드라나 남작령에서 도망쳐온 100여 명의 주민들도 영지로 돌아가길 원했다. 나를 힐끔힐끔 보며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그때 놈을 처리할 때 보여준 그 모습이 제법 충격적이었나 보다.

전사들이야 내막을 다 알지만, 그때 놈들 주변에 있던 저 주민들은 전혀 이유를 모르는 상황에서 이웃이 영주에게 처단당한 거니 두려움에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애당초 내가 어떤 영주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동안 처리할 일이 많아 그들을 따로 설득할 여유가 없어 잠시 잊고 있었는데 영지에서 마음이 떠난 주민들을 굳이 붙잡고 있을 이유는 없을 거 같아 좋은 마음으로 승낙했다.

그리고 하란 남작이 떠날 때 드라나 남작령을 맡겨놓은 기사에게 단장 직을 수여하기로 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 기사가 아예 개차반이었으면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드라나 남작의 폭정에 가장 반대했던 기사가 부단장이던 그 기사였다기에 그럭저럭 괜찮아 보여 추천한 것이다.

원래 가장 효과적으로 잘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은 그때 그 기사처럼 능력 적당하고 욕심도 적당한 그런 인재였기에 좋은 마음으로 추천할 수 있었다.

내 말을 유심히 듣던 하란 남작은 영지에 도착해 알아본 후, 큰 흠이 없다면 당분간이라도 기사단장 직을 맡겨보겠다고 답해 내 체면을 세워 주었다.

그리고 우리 망둥이 세이라는 결국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말았다.

원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일신상에 문제가 생긴 경우 아카데미에서 자퇴를 권유하는데, 자퇴를 선택하는 건 오로지 본인과 가문의 자유였다.

아무래도 세이라의 사건이 재판까지 가면서 제법 회자된데다 영지전에서 하루 만에 승리해 남작을 없애버린 게 황도에 알려지며 분위기가 뒤숭숭하기 때문에 아카데미 측에서 그렇게 결정한 거 같았다.

다만 귀족 가문에서는 이 자퇴 권유를 매우 치욕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카데미에서도 쉽게 권유하지 못하는데, 이번 아카데미 학장이 제법 꼬장꼬장한 사람이라더니 한창 기세가 오른 그레이츠에 대뜸 자퇴 권유를 하며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과연 그레이츠가 반발 없이 자퇴 권유를 받아들일지 그 반응이 궁금해서 그런 거였다.

세간의 시선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세이라는 신이 나서 자퇴 권유를 받아들이려고 했다. 제법 큰일을 겪어 차라리 집에 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가족들도 선선히 자퇴 권유를 받아들이자는 쪽이었고.

“뭐, 괜히 가서 사고 치는 것보다는 그냥 집에 있는 게 낫지. 어차피 세이라가 그쪽에서 귀족 영식과 만날 것도 아니라지 않느냐?”

“그래, 로빈. 그냥 받아들이는 게 좋을 듯싶구나.”

할아버지 카인과 어머니 마리아나는 그렇다 치지만 작은어머니 세릴까지 자퇴에 찬성한 건 조금 의외였다.

다만 자퇴를 승낙한 그녀의 담담한 눈빛에서 이미 무념무상의 경지에 올랐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세이라에 대해서는 고민하길 포기한 거 같았다. 워낙 럭비공 같은 녀석이라 그런 모양이다.

어쨌든 그렇게 자퇴하고 집에서 자숙하는 세이라는 한동안 얌전히 지냈다.

이렇게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상황.

모든 게 순조롭게 돌아가는 상황이라 당분간은 별일 없이 순탄하게 흘러갈 줄 알았다. 자숙하던 세이라가 갑자기 찾아와 폭탄선언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뜬금없이 로빈을 찾아온 세이라의 표정은 조금 굳어있었다.

무서운 것 없이 천방지축이던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

하지만 정말 심각한 건 녀석과 동행한 듀발의 표정이었다. 이건 마치 저승사자를 눈앞에 둔 거 같은 얼굴이지 않은가.

“뭐야? 무슨 일로 날 찾은 거야? 그것도 둘이 함께.”

의아함이 가득한 로빈의 물음에 잠시 움찔한 세이라는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더니 당당하게 외쳤다.

“오빠, 나 결혼할 거야.”

“결혼? 무슨 결혼? 누구랑?”

“누구긴, 듀발 오빠지.”

“…듀발이랑?”

결혼 따위 안 할 거처럼 굴던 녀석이 결혼하겠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듀발이라는 건 조금 의외였다.

게다가 듀발의 표정은 결혼하겠다고 찾아온 사람 같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온 소 같은 그런 표정이었으니 말이다.

“…듀발이랑 이야기는 된 거냐? 결혼을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듀발의 표정을 보니 억지로 끌려온 분위기인데?”

“응? 아이씨. 오빠, 뭐 해?”

“아, 아……. 예, 영주님. 아가씨랑 겨…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뭐야, 이건 대체.

듀발 녀석, 무슨 협박이라도 당한 건가?

“음, 듀발. 조금 신중하게 생각하는 건 어떨까? 여자란 게 껍데기만 예쁘다고 다가 아니거든. 외모는 네가 질색하는 린도 참 예쁘잖아? 사실 성품으로 따지면 린이나 세이나 거기서 거기지.”

“그게 오빠가 할 소리야?! 내가 오빠 여동생이거든?”

내 입장에서야 세이라의 오빠로서 당연히 세이라를 아까워해야 정상이지만 객관적으로 따지면 저 녀석이 그리 좋은 신붓감은 아니었다. 듀발 역시 내겐 형제 같은 부하였기에 그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은 당연했고.

이혼이 드문 세계이긴 하지만 세이라의 억지로 결혼했다가 나중에 파탄이라도 나는 날에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래서 신중하게 선택하길 부탁했는데 듀발의 반응을 보니.

“영주님, 부디……. 제게 아가씨를 허락해 주십시오. 많이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 억지로 끌려온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대체 왜 그런 표정으로 끌려온 거야? 누가 보면 팔려가는 줄 알겠네.

어쨌든 둘의 마음이 그런 대로 맞았단 말이지?

듀발이라.

분명 내가 원하던 문관형 매부는 아니었다. 하지만 성품도 건실하고 항상 성실한 스타일이라 세이라를 속 썩이진 않을 남자였다.

영주 저택에 거주하는 기사였기에 다른 곳으로 시집가지 않는다는 것과 데릴사위로 들일 수 있다는 점 역시 매력적이었다. 저 천방지축이 먼 영지로 시집가는 건 역시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아니면 아예 나처럼 저택 안에 신방을 꾸리고 한 가족처럼 사는 것도 좋은 방법이리라.

듀발이 모시고 사는 그의 할머니 리리 여사 역시 저택에 거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별로 달라질 것도 없었다.

린을 혐오하다시피 하는 듀발이었기에 린과 비슷한 성향의 세이라와 이어질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다. 물론 듀발과 세이라가 서로에게 진심이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둘이 서로에게 진심이라면 허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로빈.

이 정도에서 좋게 흘러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한번 잘 만나보라고 이야기하려던 로빈은 세이라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어… 어차피 듀발 오빠 아니면 안 되는 몸이야! 오빠가 반대해도 이제는 늦었다고!”

딴에는 고민하는 로빈의 모습이 불안했는지 폭탄을 터트려버린 세이라.

이게 뭔가 싶어 잠시 멍하니 있던 로빈은 순간 냉정을 잃고 말았다.

“…그 말은……. 너 설마… 벌써 했냐?”

“다… 당연하지. 누가 대보지도 않고 결혼하겠다고 하겠어? 안 맞으면 어떡하라고? 나랑 듀발 오빠는 찰떡궁합이거든. 쫀쫀하고 짝짝 달라붙는다고! 굵직굵직하고 얼마나 단단한데!”

맙소사, 이건 또 무슨…….

세이라의 입에서 차진 의성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로빈의 눈은 자연스레 듀발 쪽으로 넘어갔다.

아까보다 더 경직된 상태로 나와 눈도 못 마주치는 듀발.

그래, 아무리 연애가 자유로운 세상이고, 연애는 즉, 섹스라는 노골적인 분위기지만 영주의 여동생을 허락도 없이 후루룩 짭짭하셨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짐승을 키웠어, 짐승을.

이건 대체 무슨 감정일까?

어차피 결혼을 허락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당연히 둘이 물고 빨고 나로선 상상하기도 민망한 별의별 짓을 다 하면서 그렇게 살 것이다. 세상이 세상이니만큼 단순한 섹스 그 이상의 무언가를 즐길 것이고.

마치 내가 부인들과 즐기듯이 그렇게 말이다.

하지만 허락도 없이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는 세이라의 말에는 울분이 끓어올랐다.

물론 냉정하게 따지면 허락받고 자시고 할 일도 아니었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게다가 로빈은 이곳 사람들보다 다소 퓨어하고 보수적인 편이었다.

“야! 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허락도 없이……. 벌써 그랬다고?!”

“죄… 죄송합니다, 영주님. 그러니까 그게…….”

“왜 듀발 오빠한테 뭐라 그래? 내가 덮친 거거든?”

“네가 덮쳤다고? 아니, 대체 넌…….”

“뭐가, 어때서? 내가 먹고 싶어서 그랬다, 왜?! 뻐근하게 들어차는 게 아주 좋아서 날아갈 거 같더라. 결혼식까지 먹지도 않고 버틴 오빠가 이상한 거거든? 내가 정상이라고!”

“이 녀석이! 뭘 잘했다고?!”

“내가 잘못한 건 또 뭔데?”

결혼을 허락받으러 온 자리는 순식간에 현실 남매의 싸움판으로 변했다. 둘 가운데에서 듀발만 어찌할 바를 몰라 곤란해했고.

그런 둘의 말다툼은 주변에서 동정을 살피던 로빈의 가족들과 듀발의 할머니 리리 여사가 등장할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이고, 영주님. 죄송합니다. 감히 제 손자 놈이… 허락도 없이…….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다 제가 잘못 키운 탓입니다.”

“흠흠, 로빈. 이제 그만하는 게 어떻겠니. 물론 영주의 여동생을 가주인 영주의 허락도 없이 취한 건 명백한 잘못이지만 세이라가 저리 원하지 않니.”

“그래, 로빈. 듀발이면 괜찮은 거 같아. 데릴사위로 들일 수도 있고. 속궁합도 잘 맞는다지 않니, 호호.”

가족들이 나서서 말리는 순간에도 아차 싶었지만 리리 여사까지 저러고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리리 여사는 듀발의 할머니로 따지고 보면 고용인 같은 입장이지만 로빈에겐 그리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저택에서 일한 지 10년도 훨씬 넘어 저택의 터줏대감 격인 분이기도 하지만 매운 음식의 선구자로 로빈에게는 은인과 같은 사람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사실 그녀는 도리아 여사와는 또 다른 의미로 할머니 같은 분이었다.

그런 분이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게다가 가족들은 이 사태를 다 듀발의 잘못으로 몰고 가는 분위기였다.

아니, 덮친 건 세이라인데 왜 책임은 듀발의 것이란 말인가? 세이라의 유혹을 이겨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항상 듀발의 방패에 막혀 제대로 된 공격을 넣지 못하던 세이라였는데 이번만은 정말 치명적으로 파고들었다.

세이라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한 죄로 좌불안석인 듀발을 보니 뭔가 딱한 기분이 들어 화가 싹 식어버렸다. 저 둘이 어떤 식으로 커플이 됐을지 눈에 선해서였다.

세이라와 주변 사람들의 태도 덕분에 듀발에 대한 울분은 모두 세이라에게 옮겨간 상황.

로빈은 애써 냉정을 되찾고 가족들에게 물었다.

“어쨌든 가족들은 다 둘의 결혼에 찬성한다는 거네요?”

“그럼. 어차피 데릴사위를 들일 거면 듀발만 한 녀석도 드물지.”

“우리 세이는 귀족 자제랑은 인연이 없는 아이니까요.”

“그냥 저택에서 계속 사는 것만으로도 만족이야. 세이가 다른 곳으로 떠나면 쓸쓸할 거 같거든.”

“그럼 좋습니다. 더 사고 치기 전에 식부터 올려요. 듀발 너……. 세이랑 잘 지내라?”

“예, 영주님.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들 모두 만족하는 상대.

평민이지만 기사고, 성품도 원만한 남자.

데릴사위로 들여도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다 시댁 식구도 단출해 딱히 모실 사람도 없는 그런 괜찮은 결혼 상대가 듀발이었다.

물론 혼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후릅후릅했다는 건 조금 어이없지만 사실 그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마 사귄다는 그런 징조조차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당한 일이라 내가 많이 당황한 게 아닌가 싶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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