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그런데 대체 둘이 어떻게 그렇게 된 거지? 물론 대련 때문에 종종 붙어 다니긴 했지만 그런 느낌이 아니었잖아?”
“헤헤, 그거야 당연히 그때지. 황도에서 위기에 빠졌을 때. 그때 참 듬직했단 말이야. 딱 날 지켜줄 수 있는 남자라는 느낌이 왔거든~”
그날 듀발에게 강한 호감을 느낀 세이라는 그가 항상 자신에게 진지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다른 기사들이 자신을 피할 때도 듀발만은 진지하게 대련에 임해줬으니 말이다.
그런 기억까지 떠오르니 더욱 호감이 불타올랐다는데.
“그래서 사제님이 왔을 때 내가 치료를 자청했어. 그때 듀발 오빠를 처음으로, 후후.”
“야, 그건…….”
이야기는 정말 가관이었다.
듀발이 사경을 헤맬 때 치료 목적으로 그를 덮쳤다는 것.
덮쳤다기에 세이라가 유혹했고 듀발이 거기에 넘어간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다쳐서 저항할 수도 없는 상대를 그야말로 덮친 게 아닌가.
듀발에게 남았던 조금의 앙금까지 모조리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가족들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지 헛기침을 내뱉으며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세이라의 친모 세릴의 표정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오묘했다. 이미 달관의 경지에 오르신 줄 알았는데 이건 그 정도로 극복할 수 없는 충격인 모양이다.
하지만 세이라의 모험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듀발 오빠가 그리 쉬운 남자는 아니지. 하지만 남자는 남자야. 오빠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해서 한 번 더 겟하고 나니 듀발 오빠의 저항이 점점 약해졌어. 나에게 함락됐다고 할까? 다른 건 몰라도 몸 쓰는 건 또 자신 있거든.”
“…너 진짜.”
이 망둥이 녀석, 진짜.
이 정도면 되레 내가 듀발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범죄 수준이잖아?
내가 짠한 눈으로 듀발을 바라보자 그는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로빈도 그런 듀발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같이 고개를 숙였다. 실비아의 성적 취향과 린의 성격을 이어받아 혼종으로 자란 세이라를 듀발에게 떠넘기게 된 것에 대한 심심한 사과였다.
듀발과 세이라의 결혼 소식은 삽시간에 영지로 퍼져 나갔다.
결혼식은 가족끼리 조촐하게 열기로 했지만 일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데다 듀발과 세이라가 머물 신혼집을 만드는 일까지 겹쳐 저택 역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둘의 결혼식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들 대동소이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붙어 다니는 게 예사롭지 않더니 결국 그렇게 됐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조금 색다른 반응을 보이는 건 나의 부인들과 가시단의 동료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역시 아가씨가 덮쳐서 먹었구나. 청출어람인가? 난 결혼 전에 영주님 못 먹었는데.”
“그땐 우리가 기다리기만 해서 그렇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우리도 덮쳤어야 했다니까.”
“그런가? 이번만은 멍청이, 네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네.”
세이라의 성장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여자.
실비아와 린은 제자(?)의 성장에 감탄함과 동시에 어리석었던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했고.
“치료할 때 먹은 건 저도 알았는데, 그 뒤에 후속 작업까지 들어간 건 몰랐네요. 아가씨가 제법이에요.”
치료 때 처음을 차지한 후, 후속 조치로 협박과 동시에 현란한 스킬을 구사해 결국 함락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세이라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는 다이앤까지.
내 아내들도 가만 보면 정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앤은 알고 있었겠네. 치료할 때 세이라가 듀발이랑 했다는 거.”
“네, 그렇죠. 아가씨가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어요.”
“…그래? 그걸 나한테 굳이 비밀로 했단 말이지?”
“어머? 로빈, 화난 거예요? 아니죠? 어머머, 어쩜 좋아? 그럼 오늘은 제가 혼나는 각? 아잉~ 화 풀고 살살 혼내주세요. 호호.”
“…아냐, 그게 화낼 일은 아니지.”
부산스러운 다이앤의 애교를 보니 화가 나다가도 쑥 들어가 버렸다. 어차피 다 지난 일인데 따져봐야 뭐 하겠냐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안 그런 척하다가 갑작스럽게 태세 변환해 혼내주긴 할 생각이었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말이다.
“캬~ 결국 그렇게 됐네. 분위기가 예사롭진 않더라니. 듀발 녀석, 잡혀 사는 거 확정이지?”
“글쎄, 그렇지도 않을걸? 듀발 녀석, 엄청 튼실하거든? 결국 아가씨가 함락되겠지. 밤일로 들어가면 못 당할걸?”
“하긴, 녀석이 생체 병기 수준이긴 하지. 빅 스네이크?”
“아가씨도 보통은 아니지. 몸 쓰는 건 린 단장 수준 아냐? 클리너가 왜 인기 있는 신붓감인데?”
“그야말로 용호상박이군. 뭐,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누가 이겼는지 말이야.”
“말 잘 듣는 쪽이 진 거지. 지켜보자고.”
“야야, 난 아가씨 쪽에 1골드.”
“난 듀발에게 2골드!”
“그럼 난 아가씨에게 3골드!!”
자기들끼리 투덕거리던 기사들은 이내 내기 판까지 벌여 듀발과 세이라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로빈은 기사단의 기강이 이대로 괜찮은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훈련이나 실전에 들어가면 누구보다 열성적인 기사들이라 딱히 뭐라 하기도 애매했지만 말이다.
* * *
세이라의 조촐한 결혼식은 별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
이곳 풍습대로 가족들만 모아놓고 혼인 서약을 나눈 후, 부모님께 덕담을 듣는 정도로 끝마쳤기 때문에 문제 될 만한 일도 없었다.
물론 기사단과 가족들을 모아놓고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긴 했지만 그땐 이미 결혼 당사자와 무관한 그들만의 잔치가 되어있었다. 결혼 당사자 둘이 사람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떠난 후에는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놀았으니 말이다.
듀발과 세이라의 보금자리는 본채 옆에 새로 지은 작은 별채.
로빈의 집과는 본채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세이라의 집에는 따로 수영장까지 준비하진 않았는데 듀발과 세이라 둘 다 굳이 수영장까지 필요하진 않다고 이야기해서였다.
자신들은 그저 집 안에 큰 욕조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나?
세이라의 신혼집에는 세이라와 듀발, 그리고 루지가 같이 머물렀다.
세이라의 목표는 듀발과 함께 리리 여사를 모시고 사는 거였다고 한다. 그래서 리리 여사와 함께 살길 희망했는데 리리 여사 쪽에서 절대 안 된다고 격렬하게 반대해 무산되고 말았다.
어차피 영주 저택 안이라 항상 얼굴을 마주하고 사는데 굳이 같은 집에서 머물 필요는 없다고 거절한 것이다. 아마 신혼부부 사이에서 난감한 일이 있을까, 피한 게 아닐까 싶다.
아니, 이쪽은 그런 걸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 그건 아니려나?
리리 여사는 그렇다 치지만 저 신혼집에 루지가 들어간 건 조금 의외였다. 그래서 대체 루지는 왜 데리고 들어가냐고 물었는데 세이라의 대답이 참 가관이었다.
“응? 당연히 데리고 들어가야지. 듀발 오빠한데 선물하려고 길들인 건데. 듀발 오빠가 한눈팔지 못하게 하려면 색다른 자극이 필요하지 않겠어? 그럴 땐 역시 암캐가 최고지. 다양한 플레이가 가능하거든? 저년이 봉사해야 할 사람도 사실 가장 큰 피해를 본 듀발 오빠고.”
“와, 넌 진짜…….”
“이거 왜 이래? 오빠는 아닌 거 같지? 만약 린 언니가 없었으면 실비아 언니도 따로 길들였을걸? 줄리 선생님의 저서는 제국 윤리 강령, 아니면 봉사의 성서 수준이야. 틀린 말이 없다는 거지.”
“역시 아가씨네요. 제대로 배운 여자다우세요. 저 멍청이가 없었으면 저도 따로 준비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응? 나? 내가 왜?”
그러니까, 줄리에타의 그딴 잡서들이 도덕책이나 성경책 수준이라고? 게다가 린을 암캐 포지션으로 취급한단 말이지?
당당한 세이라와 그에 동조하는 실비아.
그리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고개만 갸웃거리는 린의 모습에 로빈이 허탈한 한숨을 내쉬는데 세이라가 쏘아대듯 몰아붙였다.
“왜? 아니야? 가슴에 손을 얹고 아니라고 말해보시죠, 오빠님. 그래서 그게 싫었어? 오빠도 엄청 즐기는 거 같던데.”
“아니, 그건……. 됐다, 말을 말자.”
제길, 졌다. 이건 반박할 수 없어.
린의 낮이밤져형 소프트 M 성향이 어떻게 싫을 수 있어? 그게 싫으면 남자도 아니라고.
망둥이 세이라에게 논리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로빈.
로빈은 세이라의 궤변에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스스로가 너무 야속하기만 했다. 자신도 마음속으로는 세이라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세이라가 결혼하는 동시에 묶은 퀘스트를 하나 해결할 수 있었다.
[완료!]
세이라에게 가장 어울리는 남편감을 찾아주시오.
보상은 두 사람 궁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차등 지급됩니다.
평가:
세이라 그레이츠와 듀발 그레이츠의 궁합도
90%+속궁합 UP 30%=120%. 목표 초과 달성
엉뚱하지만, 속정 깊은 순정파 세이라와 은은한 밤의 카리스마 듀발
언뜻 보면 활발한 세이라가 이끌어가는 듯 보이지만 결국 모든 일은 듀발의 뜻대로 흘러가게 됩니다. 하지만 누가 이끌어가느냐와는 상관없이 모두에게 행복한 결혼 생활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완벽한 커플 매칭에 성공하였습니다.
보상: 조기 은퇴 가능성 30% 증가
페널티: 없음
기한: 없음
와, 이게 이렇게 된다고?
의외네, 듀발 녀석. 안 그래 보였는데 은은한 밤의 카리스마라니.
퀘스트의 평가 란을 확인한 로빈은 결혼에 성공해 의기양양해하는 세이라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신나하는 망둥이가 앞으로 듀발에게 잡혀 산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궁합도를 봐도 둘이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임은 확실했다.
“게다가 저 보상은……. 세상에, 내가 뭔가 착각하고 있었네. 그래, 기사라고 영주 대리가 될 수 없는 건 아니지. 어차피 일은 지온이나 관리들, 그리고 백랑 같은 무장들이 알아서 하는 거고, 영주는 사인만 잘하면 되는 거잖아? 영지의 특색을 생각하면 오히려 기사 출신이 훨씬 나아.”
퀘스트 보상 부분에서 영감을 얻은 로빈은 그동안 자신의 생각이 너무 편협했다는 걸 인정하고 듀발에게 행정 업무를 가르치기로 했다. 저 30%를 100%로 만들 생각으로 달려든 것이다.
그렇게 신혼도 없이 기사단으로 출근한 듀발은 로빈의 호출을 받고 집무실로 끌려왔다.
무슨 지시라도 있을 줄 알고 달려온 듀발은 자신을 앉혀놓고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로빈의 기행에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대체 왜 자신이 여기 와서 이러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저, 영주님? 제가 왜 여기에…….”
“듀발, 넌 앞으로 날 따라다니며 행정 업무를 배우도록 해.”
“네? 제가요? 제가 왜 굳이…….”
“응, 굳이 배워야 할 거 같아. 너도 이제 영주 일가잖아? 만약 내가 자리를 비우거나 하면 듀발 네가 대신 업무를 봐야 한단 말이지?”
“하지만 마님도 계시는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있지. 내가 은퇴하면 당연히 다이앤도 같이 내뺄 거거든.
하지만 듀발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할 순 없었다.
“만약이란 게 있잖아. 저번 황도행처럼 나랑 다이앤이 둘 다 없는 경우도 있으니까.”
“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보니 듀발도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나도 너에게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큐브 클리어나 기본적인 훈련은 꾸준히 받는 게 좋겠지. 하지만 하루에 두세 시간씩은 꼭 관저에 나와 행정적인 부분을 공부하도록 해.”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못 할 게 뭐야? 하란 남작도 기사 출신의 행정 관료잖아? 배움의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우선 해보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예, 영주님. 영주님의 명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소소하게 작은 일부터 듀발에게 맡겼는데 이 녀석의 일 처리가 생각보다 괜찮았다. 어차피 영주라고 해봤자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고 정말 큰일이 벌어진 게 아니라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시각에서 관료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면 족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야, 괜찮은데? 앞으로 조금만 더 배우면 대리 영주를 맡겨도 괜찮겠어.”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잊고 있었지만, 저 녀석도 처음부터 기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기사가 되기에는 너무 부족해 답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재능이 없었다.
그런데 녀석이 기사가 될 수 있었던 건 스스로를 끊임없이 연마하며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녀석의 특성인 노력도 재능(U)이 그 증거였다.
결국 별다른 재능은 없지만 노력으로 커버해 웬만한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무난한 포지션을 유지하는 데에는 듀발만 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떤 의미로든 로빈으로서는 매우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