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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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듀발에게 행정 업무를 가르치다 보니 1년 중 가장 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영지는 대수림으로 출정하는 병사들을 배웅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백랑과 함께 훈련하던 병사들이 대수림으로 출정하기로 한 시기는 가을이었지만 훈련 성과가 워낙 좋아 시일을 조금 앞당긴 것이다.
어차피 훈련장에서 훈련받는 것보다 실전에 나서는 게 더욱 효율적인 수준에 오른 이상 출정을 더 미룰 필요는 없었다.
“이제 병사들도 하급 마수 정도는 무난하지. 몇이 모이면 중급 마수도 잡을 수 있을 거야. 거기에 기사들에 전사들까지 합세하면 대수림도 리퉁 줍기(길가에 널리고 널린 리퉁을 줍는 것처럼 쉬운 일이라는 의미. 식은 죽 먹기와 비슷한 용어)나 마찬가지지.”
“그래 보이네요. 기세부터가 남다른데요? 기합이 잔뜩 들어갔달까?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수고는 뭐, 나중에 대수림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좋은 거나 같이 먹자고. 술도 한 병 따고.”
“좋은 거요?”
“응, 좋은 거. 흐흐. 이번 원정에서 반드시 엄청난 걸 얻어올 생각이거든. 혼 래빗 거기 정도는 이름도 못 내밀 엄청난 걸 말이야.”
음……. 이 양반이 또 뭔가 이상한 걸 가져올 생각인가?
하지만 백랑이 가져온 건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모야족 전통주라든지, 혼 래빗, 루터카우 등.
이 모든 것이 백랑의 작품이었다. 사실 그가 뭘 가져오든지 간에 모야족의 향긋한 전통주와 함께라면 실망할 일도 없을 거고.
다만 이번 원정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백랑 님, 이번에 대수림에 들어가면요. 구석구석 좀 살펴봤으면 좋겠어요. 따로 척후를 둬서 말이에요. 그 가루약을 쓰면 좀 더 안전하게 살펴볼 수 있겠죠?”
“응, 그건 그렇지. 그런데 왜?”
“그러니까요…….”
로빈은 클라운이란 놈이 대수림으로 도망쳤다는 점, 베놈이 굳이 마수 부산물만을 이용해 독을 제조한 점, 놈들의 본거지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점, 그리고 굳이 자신의 영지를 노려 공격한 점 등을 지적하며 놈들의 본거지가 대수림이나 마수 산맥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영주님 말은 우리가 대수림이나 마수 산맥을 수색해 자신들의 본거지가 발각될 걸 염려해 우릴 먼저 공격했다?”
“가능성은 있다고 봐요. 생각해 보세요. 예전이라면 우리도 그럴 여유가 없었죠. 하지만 큐브가 안정화되고, 병사들의 실력이 늘면 당연히 그러지 않을까요? 당장 지금만 해도 대수림 원정을 떠나잖아요. 사실 그런 게 아니라면 놈들이 우릴 공격한 이유를 설명하기도 어려워요.”
“다른 건 몰라도 독을 마수 부산물로만 만든 건 좀 그럴듯해. 원래 독이란 게 이것저것 섞었을 때 효과가 가장 좋은 법인데, 한정된 재료로만 만들었다면…….”
“환경이 그런 거죠. 다양한 재료를 얻기 어려운 환경. 그래서 주변에 넘치는 마수를 이용했다, 라는 게 제 추측이에요.”
“그거야 확인해 보면 될 일이긴 하지. 하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도 대수림은 아닐 거 같아. 여긴 워낙 많은 영지가 밀접해 있거든? 그럼 굳이 우리일 이유가 없잖아?”
“음…….”
“정말 놈들이 대수림에 있다면 그나마 가능성 있는 곳은 가장 깊은 곳이라는 건데, 거긴 영주님도 알다시피 재앙급 마수가 자리 잡은 곳이야. 아무리 그런 가루로 몸을 보호한다 쳐도 단순히 지나가는 것도 아니라 아예 거기서 사는 건 좀 무리가 아닐까?”
“그래서 백랑 님은 차라리 마수 산맥이 맞을 거 같다는 거죠?”
“응. 그리고 대수림에서도 마수 산맥으로 통하는 길이 있잖아? 그 클라운이란 놈도 거길 통해 다시 마수 산맥 안으로 도망간 거지.”
사실 그레이츠를 공격한 이유를 따지고 들면 마수 산맥 역시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인접한 영지가 무려 다섯.
그중 굳이 그레이츠를 공격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로빈도 이런 자신의 추측이 그저 억측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빈의 감은 두 곳 중 한 군데에는 놈들이 숨어있을 거라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황제의 이목을 피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전 두 곳 모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수림도 워낙 넓어서 어딘가 숨어있으면 충분히 공간이 날 거 같았거든요.”
로빈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자 백랑도 대수림 수색에 더 신경 쓰겠다고 대답했다.
“좋아, 영주님. 이번에 원정 나갈 때 한번 신중하게 살펴볼게. 그리고 앞으로는 마수 산맥으로도 척후를 보내는 게 어떨까? 주기적으로 말이야. 날랜 놈만 골라 보내고 약까지 쥐여주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거 같은데.”
“음……. 그럴까요? 위험하긴 한데……. 그럼 진짜 날렵하고 감 좋은 전사들로 선발해 주시겠어요?”
“응, 이런 데 특화된 놈이 몇 있지. 내빼는 거 하나만은 황제 폐하도 저리 가라일걸? 물론 상으로 특별한 걸 걸어야 흔쾌히 나서겠지만 말이야.”
아니, 그 양반은 아예 도망칠 일이 없는 사람인데 무슨.
비교할 걸 해야지.
비교 대상은 좀 안 좋았지만, 의미만은 분명히 통했다. 도망치는 데 능해 마수들 사이에서도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라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정도 능력자라면 그 자신이 원하는 걸 요구할 자격이 충분했다.
그렇게 대수림 원정을 떠나는 것과는 별개로 대수림과 마수 산맥 두 곳 모두 따로 정찰 인력을 파견하게 되었다.
“좋아! 모두 출발! 마수들의 씨를 말리자!”
백랑이 호기 있게 외치며 병력을 이끌었다. 출발 인원이 영지 병력의 반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 원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백랑의 뒤에는 린과 제필을 위시한 기사단까지 뒤따르고 있었다.
“물론 출동한 병력만큼은 아니지만 남은 병력도 피곤하겠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야.”
영지 병력이 반 토막 난 상황에서도 큐브는 비슷한 페이스로 생성되기 때문에 남은 병력도 출동 병력 못지않게 고생스러울 것이다.
그런 것까지 다 계산해서 출동 병력을 추렸다지만 평소보다 훨씬 빡빡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가장 한가한 계절인 여름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병력을 출동시키고 병력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리저리 계산하는 로빈을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으니 마수 산맥 수색조로 선발된 모야족 전사들이었다.
“그러니까……. 홍운, 조천, 전지라고 했죠? 백랑과 함께 잔뼈가 굵은 전사들이고요.”
“예, 영주님. 조천입니다.”
“홍운입니다.”
“전지라고 합니다.”
백랑이 소개해 주고 간 전사들은 예전 마수 범람 때 백랑과 함께 대수림을 뒤집어놓은 특공조에 속한 전사들이었다.
그 뒤에도 백랑이 출동한 모든 작전에 동참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
수색과 도주에 능한 자들을 소개해 준다더니 정말 그런 사람들을 남겨놓고 갔다.
“이번 일은 중요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일이에요. 왜 이런 일에 자원한 거죠?”
다만 백랑의 친위대 격인 정예 전사들이면 부족에서도 알아주는 고위급 인사들인데 왜 이런 궂은일을 자청했는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백랑의 강압(?)에 못 이겨 지원한 거라면 좋은 말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하, 아이가 셋인데 이 녀석들이 워낙 찾는 게 많아서요. 봉록이 충분하긴 하지만 부모 욕심이 어디 그런가요?”
“아무래도 수당이죠. 두 번째 부인을 들이려다 보니 목돈이 필요해서요.”
“아……. 그래요?”
전사들과 기사들은 당연히 영지에서 봉록을 지급받는다. 그리고 그 금액 역시 상당히 후한 편이었다. 관례가 있다 보니 남부의 부유한 영지만큼 챙겨주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영주인 자신도 딱히 사치를 즐기지 않는 편이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저 정도 전사들이 수당을 탐내 이런 작전에 지원할 정도면 지금까지 자신이 너무 인색한 게 아니었나 의심될 정도였다.
“혹시 봉록이 모자란가요?”
“네? 아아, 그게 아니라……. 하하. 젊을 때 좀 방탕하게 살다 보니 빚이 좀 있었습니다. 그걸 처리하느라 그랬죠.”
“전 식구가 좀 많은 편이라…….”
“그래요?”
하지만 전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았다.
딸린 입이 많아 그들을 독립시키는 데 많은 돈이 들었다는 조천과 방탕하게 사느라 모아놓은 돈도 없이 부인을 들인 것도 모자라 연달아 아이 셋을 낳아 기르다 보니 목돈이 필요하다는 전지까지.
둘 다 조금 특수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딸린 입을 모두 독립시키느라 돈을 다 썼다는 조천이 두 번째 부인까지 들여 다시 식구를 늘리려는 모습은 조금 인상적이었다. 저러다 다시 아이들이 늘어 또 고생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가정이 있는 30대 중반 전사 둘의 사정이 이렇다면 20대 후반의 전사 홍운의 목적은 좀 엉뚱했다.
“이번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으면 영주님이 부탁 한 가지를 들어준다고 하셔서 지원했습니다.”
“부탁이요? 특별히 부탁할 게 있으신가요?”
“그……. 레이카를, 레이카를 제게 주십시오!”
…뭐야, 이건?
이 녀석은 또 뭔가 싶어 가만 보니 예전 그 레이카 대전에서 승리 직전까지 갔다가 백랑에게 두들겨 맞고 기절했다는 그 전사였다.
그 뒤, 레이카의 실체가 단순한 직업여성이 아니라 전문적인 암살 요원이란 게 밝혀져 많은 손님이 발길을 끊었음에도 아직까지 끈질기게 레이카만 찾는 별종 전사.
드라나 남작을 잡아오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을 때도 레이카를 외치며 돌진했었다.
영주인 자신에게 와서 레이카를 찾는 건 좀 황당했지만 어쨌든 그녀에 대한 사랑만큼은 지고지순했다.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네요. 제가 확답할 수 없는 일이라서요. 아시겠지만 레이카 양은 황제 폐하 쪽 사람이거든요. 제 마음대로 어떻게 하긴 힘들 거 같아요.”
“하지만 영주님이 황제 폐하와 각별한 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탁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음……. 네, 맞아요. 그건 가능하죠. 다만 이런 일에는 당사자의 뜻이 중요할 거 같으니 레이카 양의 말도 들어봐야 할 거 같지만요.”
“전 자신 있습니다. 분명 레이카도 절 따르려 할 겁니다.”
이 녀석을 보고 있자니 왠지 지크의 예전을 보는 듯했다. 지크도 저렇게 자신만만해하다 레아 사제에게 대차게 차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전에 투입되는 전사의 사기를 꺾는 건 좀 그런 거 같아 좋은 말로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복귀하면 레이카의 마음을 확인한 후, 마담 로즈에게 따로 요청해 볼 생각이었다. 말이 황제의 사람이지 레이카 정도면 마담 로즈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좋아요. 마수 산맥 수색 후, 영지로 돌아오면 제가 알아볼게요.”
“가… 감사합니다, 영주님.”
“두 분도 제법 두둑한 보상을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런 위험한 일에 전사들을 투입하는 주제에 제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목숨을 소중히 하셨으면 좋겠네요. 이건 아니다 싶으면 욕심 부리지 말고 무조건 도망치라는 뜻이에요.”
“네, 영주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래도 가정이 있고, 가지고 싶은 게 있는 전사들이니 목숨을 함부로 하진 않을 거 같아 안심이었다. 레이카를 부르짖는 홍운은 저게 은근히 안 좋은 플래그라 걱정스럽긴 했지만 말이다.
* * *
대수림 1차 원정대가 출발한 지 어언 한 달.
처음에는 한 달이나 병력 공백을 메우려면 고생깨나 할 거라 예상했는데 바쁘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복귀 예정일이 다가왔다.
출동 병력의 수만 천에 가깝고 사제들도 수십이나 동원한 원정이니 사상자가 많지 않을 거라 예상되긴 하지만 마음이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린도 참여한 원정이 아닌가. 출발할 때는 분명 의연했는데 이제 와서 이러는 걸 보면 나도 그리 대범한 사람은 못 되었다.
“오늘 멍청이가 돌아오는 날이네요.”
“그러네, 린이 없으니 좀 허전하긴 하더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오늘만은 인정해야겠네요, 언니.”
“호호,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비도 린이 걱정되는 거 아냐?”
“네? 제가요? 전혀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누구나 잘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없어지면 아쉽잖아요? 그냥 그런 거죠. 그리고, 그 멍청이는 지옥에서도 살아 돌아올 거 같은 열혈 바보거든요. 그 멍청이가 다치거나 죽는 그림은 도저히 그려지지 않네요. 예전에는 상급 마수도 혼자 썰어버린 괴물이라서요.”
예전에 린이 빅 테일을 처리하던 모습이 떠오르는지 고개를 저으며 몸을 부르르 떠는 실비아.
하지만 그런 실비아의 반응에 다이앤은 그저 웃음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로빈도 다이앤의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딱 봐도 아니라는 건 말뿐이고 린을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버하듯 몸을 떨던 실비아는 다이앤과 로빈이 계속 자신을 쳐다보며 웃음 짓자 제풀에 지쳐 실토하고 말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