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본 결과 제법 큰 규모의 큐브가 폭발했고, 그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이 정도였으면 큰 문제도 아니었겠지만,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 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해상 왕국의 유일한 왕족이자 여왕인 히나코 루페카스까지 망명을 요청한 것이다.
게다가 히나코는 자신의 세력만 데리고 망명을 요청한 게 아니었다.
제국민들에게는 생소한 인어족까지 망명 대열에 합류.
제국 정계는 더욱더 시끄러워졌다.
황제가 로빈에게 귀족 회의 합류를 요청한 건 여왕과 인어족의 망명을 놓고 정계의 갈등이 격화된 시기였다. 황제 본인조차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해 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확인하고 싶어 요청한 것이었다.
국가의 중대사라 판단했는지 로빈뿐만 아니라 크라우와 작센, 레오니스까지 모조리 황도로 소환한 상황이었다.
황궁에 도착한 로빈은 다이앤을 장인어른께 보내고 바로 회의장을 찾았다.
회의장에는 많은 귀족이 논쟁하고 있었는데 로빈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심각한 표정의 라이언 옆으로 다가가 자리 잡았다.
“형님? 이건 또 뭔가요?”
“하, 정말 환장할 노릇이지. 자네의 말대로 이게 뭔가 싶군 그래.”
출발 전에 대강의 상황을 전해 듣긴 했지만 정확한 내막까지 알진 못해 라이언에게 상황부터 확인했다. 단순히 해상 왕국의 여왕과 인어족이 망명을 요청한 거면 이 정도로 의견이 분분한데다 황제조차 판단을 유보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이언의 설명을 들어보니 짐작했던 대로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두 가지야. 여왕을 노리는 해상 왕국의 세력들, 그리고 인어들을 노리는 몬스터들.”
해상 왕국은 두 명의 공작이 정권을 잡고 세력 다툼이 한창이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여왕은 그저 승자의 전리품에 불과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여왕이 도망갔으니 그들의 눈이 어디로 향하겠는가?
황제 입장에서는 망명을 받아들이면 귀찮아지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체면이 상하는 애매한 입장에 놓인 것이다.
그리고 더 웃긴 건 인어들이었다.
해상 왕국 북부에서 폭발한 큐브는 집단형 블루 큐브로 ‘나가’라는 생소한 놈들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그레이츠도 경험한 일이지만 블루 큐브 집단형에서는 군집을 이루는 몬스터가 튀어나오는데 그놈들이 주변의 주민들을 집어삼키며 세력을 더 불려 이제는 쉽게 건드릴 수조차 없게 되었단다.
나가란 몬스터는 워낙 여러 소설에서 등장하는데다 그 모습도 다양해 어떤 놈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라이언의 설명을 들으니 물고기나 뱀 같은 꼬리에 인간형의 상체와 비늘로 둘러싸인, 게임 쪽에 흔히 등장하는 그런 스타일의 나가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나가란 놈이 가장 좋아하는 게 인어인데 인어들이 모조리 제국으로 도망치면서 나가까지 따라와 남부 해안가를 공격하고 있단다.
인어가 제국으로 도망치기 전에는 놈들이 해안가를 공격한 적이 없으니 높은 확률로 인어들 때문이었고, 이를 어찌할지도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골칫거리 둘이 제국으로 도망친 거네요. 확실히 황제께서 고민하실 만한 문제군요.”
“하, 솔직히 여왕인 줄 알았으면 아예 입항을 허락하지도 않았을 거야. 세상에, 정체도 밝히지 않고 도둑 입항이라니.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너무했다니까.”
“하하, 그랬습니까? 진짜 급하긴 했나 보네요.”
여왕이 몰래 들어와 망명을 요청했다는 구절은 제법 인상적이었다. 상대가 얼마나 급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여간 빨리 결정해야 할 거야. 지금도 영지가 공격당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점점 공격이 거세지는 게, 놈들의 주공이 이제 곧 도착하지 싶어.”
황제가 병력을 준비하라고 한 이유가 저것 때문인가 보다.
황제도 내심으로는 둘의 망명을 받아들이고 싶은 걸까?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왠지 그런 거 같았다.
이미 로빈이 전생에서 읽은 소설과는 흐름이 너무 달라졌고, 시기조차 지나 무슨 힌트를 얻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시기와 개요는 다르지만, 해상 왕국 사람들이 제국으로 도망 온 이벤트는 있었다.
혹시 그때도 여왕이 숨어있었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끝까지 목숨 걸고 싸운 해상 왕국 병력의 움직임도 얼추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도 없었지만 말이다.
로빈이 입장해 라이언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크라우 백작과 레오니스 공작까지 회의장에 도착해 황제를 기다렸다.
그리고 히나코 여왕과 따로 대화를 나눈 듯한 황제가 그녀와 함께 회의장에 들어섰다. 그 뒤에는 제국에서도 생소한 물빛 머릿결의 여성 하나가 뒤따르고 있었다.
“저 뒤에 저 여자가 인어족 족장이야.”
“허, 사람이랑 다른 게 없잖아요?”
“응, 뭍에서는 그렇다네. 물에 들어가면 꼬리가 생기고, 뭐 그런 거야.”
맙소사, 그걸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고?
인어 공주보다 범용성이 뛰어난 변신 능력에 혀를 내두른 로빈은 신기한 기분에 인어족 족장이라는 여자를 살펴봤다.
이름: 아쿠아
성향: 침착. 다정. 희생정신
타이틀: 탁월한 지도력(S). 유려한 몸놀림(U). 창술의 대가(SR)
패시브: 해신의 후예 (랭크 A)
액티브: 해신의 분노 (랭크 C)
인어들이 사는 바다 속에도 큐브가 있는지 스킬까지 각성한 상황.
다만 액티브 스킬의 랭크가 낮은 걸 보니 큐브의 수가 그리 많진 않았나 보다. 아니면 린의 스킬처럼 사용의 제한이 심하다거나.
어쨌든 바다 속에도 큐브가 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장소를 불문하고 인간이 사는 곳에는 무조건 등장하는 모양이니까.
물론 인어까지 인간으로 친다는 건 의외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히나코 여왕.
히나코 여왕은 유나 공주처럼 동양인이었는데 스타일이 딱 전생의 일본풍이었다. 의복도 개량한 기모노 같은 느낌이었고. 물론 유나 공주가 입었던 개량 한복처럼 야한 느낌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기모노였지만 말이다.
기모노 주제에 시스루인 부분이 왜 저렇게 많은 건지, 아예 황제를 유혹하러 온 듯한 느낌이었다.
외모 역시 제법 빼어났다. 유나 공주랑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곳 세상에서 동양 미녀가 버프를 받는다는 걸 고려하면 제국의 귀족들도 제법 군침을 흘릴 만했다.
다만 로빈의 눈에는 그저 귀여운 얼굴일 뿐이었다.
하지만 로빈의 예상대로인지 히나코 여왕이 등장했을 때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더욱 커졌다. 얼핏 들어보니 그녀의 외모에 감탄하는 목소리였다.
웅성거림이 제법 큰 걸 보면 귀족들도 여왕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가 보다.
“상황이 어떤지는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고위 귀족도 아닌 왕족이, 그것도 여왕이 직접 찾아와 망명을 요청한 특별한 사안이다.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이에 대하여 공들의 의견을 듣고자 회의를 열었으니, 가감 없이 자기 뜻을 밝히길 바란다.”
황제의 선언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 시작했다.
관료들은 대부분 망명을 거절하는 게 좋겠다는 쪽이었다. 이제 겨우 제국이 안정되어 가는 상황에서 굳이 문제를 키울 이유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심지어 여왕을 던져주고 그들의 싸움이 격해지길 기다리는 게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두 공작의 세력 다툼이 격한 시기에는 놈들이 남쪽 해안가를 어지럽히지 않았으니 그 시기를 더 늘리자는 견해였다.
저 부분은 어차피 국가 간의 문제라 딱히 생각해 놓은 바가 없던 로빈은 그저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다만 그들의 눈에는 정말 대단한 미인으로 보일 히나코 여왕이 직접 이 자리에 나와있는데도 꿋꿋하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관료들을 보니, 제국을 위하는 그들의 마음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몇 번의 난리로 중앙 귀족들이 제법 물갈이되고, 관료 귀족들이 쫓겨난 자리를 평민 관료들이 채워 나가면서 분위기 자체는 조금 좋아진 거 같았다. 적어도 자기 밥그릇 문제로 사달을 일으키는 경우는 많이 줄었다니 말이다.
그래도 귀족 회의라 평민 관료들보다 귀족인 영주들과 관료가 더 많았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평민 출신 관료와는 시야가 완전 다른 자들.
그들의 의견은 역시 여왕을 받아들이자는 거였다.
“폐하의 말씀대로, 적국의 여왕이 직접 망명을 요청한 사안입니다. 제국의 안위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는 건 제국의 체면과 폐하의 위명에 먹칠을 하는 꼴입니다.”
“우리 제국이 언제부터 해상 왕국의 눈치를 봤단 말입니까?”
“때론 제국의 자존심이, 백성들의 자부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여왕을 왕국으로 돌려보낸다는 건 두 공작을 두려워해 한 수 접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니, 제국의 자존심이 꺾인다는 의견이었다.
막말로 왕국에 쫄아서 알아서 기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의견이었는데, 대부분의 귀족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았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일리는 있었다.
적어도 왕국 측에서 느끼기엔 제국이 자신들을 두려워해 그런 거로 착각하기 딱 좋은 일이었다. 그러면 두 공작은 더 신나서 싸울 테고.
하지만 그렇기에 더 실리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긴 했다. 두 공작이 서로 싸우며 왕국의 힘을 계속 갉아먹을 테니 말이다.
결국 자존심을 꺾고 실리를 택하느냐,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귀찮음을 감수하느냐의 차이였다.
다만 그런 식으로 실리를 찾는 게 지금 상황에서도 바람직한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이번 일은 생각보다 더 복잡한 문제였다.
놈들이 힘을 합쳐 제국에 무력 도발을 해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왕이 해상 왕국으로 돌아가 놈들의 다툼이 길어진다 한들, 제국 입장에서는 딱히 도움 될 게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대규모 교전이 벌어지거나 소모성 국지전이 지속해서 이어지는 것 모두 사람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쌓인 고통이 결국 큐브로 돌아오지 않던가.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당연히 직접적인 대상인 해상 왕국이겠지만 그 여파가 ‘죄’가 되어 제국에 덮쳐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관료들이 놈들의 전쟁이 길어지길 원한 건 아직 학자들의 학설이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였다. 황제 역시 악용을 우려해 사람들의 고통이 큐브를 뽑아낸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제국 입장에서 가장 바람직한 전개는 어떤 방향일까?
그건 놈들의 다툼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어 각자 민생을 돌보든지, 아니면 속전속결로 놈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황제가 해상 왕국까지 지배하는 거였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게 쉬웠으면 놈들이 지금까지 싸우고 있을 이유도 없을 거며, 해상 왕국이라는 국가가 존속하지도 못했을 거다.
진작에 여러 개의 나라로 나뉘었든지, 제국에 병탄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황제가 여왕을 차지하고, 그걸 빌미로 압박해 놈들에게 위기감을 심어주는 게 아닐까 싶다. 외적이 생기면 둘 모두 싸움을 중단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인 게 압박의 정도가 어느 수준이냐에 따라 놈들의 반응도 달라질 텐데, 해상 왕국은 워낙 럭비공 같은 놈들이라 그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는 거다.
때에 따라서는 백성들 따위는 나 몰라라 하고 엄청난 짓거리를 저지르는 게 해상 왕국이었으니 말이다.
정말 딱 저쪽 세상의 왜구스러운 놈들이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여왕을 던져주고 자기들까지 싸우게 내버려두는 게 최선이라는 관료들의 주장도 그런 부분을 고려한 판단인 거 같았다.
어쨌든, 놈들이 계속 전투를 벌이는 건 그거대로 곤란하고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운 놈들을 자극하는 것도 껄끄러운 상황이니 황제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자못 궁금해졌다.
로빈이 생각하기에는 마땅한 해답이 없었으니 말이다.
“공들의 의견 잘 들었다. 다 일장일단이 있는 의견이며, 짐 또한 공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제국이 해상 왕국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쓴다는 건 그야말로 가당치도 않은 일. 히나코 여왕의 망명을 받아들이겠다.”
황제는 그냥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정한 모양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