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도발하면 그 즉시 응징해 아예 병탄할 생각인지, 아니면 상대가 감히 도발하지 못할 거라 확신하는 건지.
아직까지는 황제의 의도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
“하나 쓸데없이 번거로운 일을 자처할 이유는 없는 바, 해상 왕국에 알려라. 해상 왕국의 왕족은 모두 사망했고, 제국은 그에 관여한 바가 없다. 우리가 받아들인 사람은 해상 왕국의 여왕이 아니라, 루페카스를 버린 히나코라고 말이다.”
황제의 결정은 귀족들이나 관료들도 예상하지 못한 변화구였다.
해상 왕국의 망명자들을 받아들이면서 여왕이 죽어 왕족의 혈통이 끊어졌다고 알리는 것.
그렇게 되면 해상 왕국은 황제의 선언을 부정하며 여왕을 돌려달라고 제국과 충돌하는 것과 황제의 말에 수긍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물론 제3의 선택이 있을 수 있지만 아마 두 번째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들로서도 제국과 충돌하는 건 제법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여왕을 원하는 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명분 때문인데 황제가 그 명분을 세워 줬으니 굳이 왕가의 혈통을 신경 쓸 거 없이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면 족했다.
아마 각 공작이 서로 왕을 자처하면 나라가 두 갈래로 쪼개지지 않을까? 제국에서 황족이 모두 사라지게 되면 제국이 조각조각 갈라지게 되는 것과 비슷한 경우였다.
어쩌면 두 명의 왕이 오랜 싸움으로 지친 심신을 달래며 숨 고르기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오히려 싸움이 줄어들 게 분명했다. 이미 명분을 얻어 왕이 된 이상 비슷한 체급의 상대와 바로 사생결단을 낼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제법 괜찮은 방법이지만 아무도 이렇게 하자고 주장하지 않은 건 이렇게 되면 여왕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제국이 여왕을 받아들였을 때, 그녀는 왕가의 혈통이라는 것 외에 어떠한 가치도 없었다.
훗날 해상 왕국의 왕위에 간섭할 수 있는 자격.
이게 모두가 원하는 그녀의 가치였으니 말이다.
물론 그녀의 외모나 일신상의 능력을 제외한다면 그렇다는 의미였다.
심지어 여왕을 황제의 비로 들인 후, 그 아들에게 군사를 맡겨 해상 왕국을 정벌하는 방법도 있었다.
폭정에 시달리는 해상 왕국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전대 여왕의 아들.
이 얼마나 그럴듯한 명분인가.
그런데 귀족들이 그녀의 망명을 받아들이길 원하면서 이 점을 지적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당연히 그들도 그녀를 차지해 이런 명분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아마 제국의 체면 운운하며 은근히 그녀를 받아들이라는 것 역시 그런 욕심에서가 아닐까 싶다.
그녀를 얻어 해상 왕국을 차지하고 공왕의 자리에 앉는 것.
이 정도면 귀족들이 꿈꿀 만한 제법 괜찮은 자리였다.
하지만 황제는 아예 그녀의 가치를 부정해 버렸다.
그럴 바에는 뭐 하러 여왕을 받아들이냐? 귀찮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귀족들은 지금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여왕의 표정이 떨떠름해 보여 왜 저러나 했더니 황제가 미리 언급한 모양이다.
왕국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혈통을 부정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한 모양인데, 몰래 제국에 숨어들 만큼 생각이 깨어있는 여자라 후자를 선택해 실리라도 챙길 생각인 거 같았다. 그렇게 되면 황제가 그녀를 책임져야 할 테니 말이다.
“이 건은 그렇게 마무리 짓겠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인어족과 몬스터의 습격에 대한 안건이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각자 생각을 말해보라.”
여왕의 망명 문제는 황제가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던 거 같고, 자신과 지방 대영주들을 모조리 부른 건 아무래도 이 안건 때문인 거 같았다. 해상 왕국 해안가 한쪽을 가득 메웠다는 놈들의 규모를 생각하면 제국 단위의 군대가 동원되어야 할 큰 위기였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저 상황에서 권력 다툼 중인 해상 왕국의 두 공작도 참 어지간했다. 물론 해상 왕국 북쪽 해안가는 두 공작의 본거지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지만 말이다.
빨리 왕권을 잡고 상대를 처리한 후 몬스터를 해결할 계획인 거 같은데 나가들이 점점 강해진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이제 왕국도 안정될 터, 굳이 왕국의 몬스터까지 제국에서 처리할 이유는 없을 거 같습니다.”
“그냥 인어들을 돌려보내면 나가들은 제국으로 건너오지 않을 테고, 왕국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입니다.”
대부분 인어를 그냥 돌려보내자는 의견이었다.
황제가 명분을 던져줬으니 왕국도 두 갈래로 나눠 안정화될 가능성이 크니 왕국에서 알아서 처리하길 기다리자는 견해.
물론 그렇게만 되면 최선이지만 과연 그렇게 좋게 흘러갈까?
놈들이 집요하게 인어들을 노린다면 그 이유가 있을 터.
만약 인어들을 먹고 그들이 레벨업이라도 한다면 처리가 더 곤란해진다.
그렇게 강해진 나가들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해상 왕국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당연히 그다음 차례는 제국이었다.
오크나 오우거같이 바다를 건널 수 없는 몬스터라면 신경 쓰지 않겠지만 놈들은 지금도 바다를 건너올 수 있는 놈들이지 않은가.
적들이 레벨업하는 걸 지켜보다 뒤통수를 맞는 일은 게임이나 소설, 어느 곳에서나 빈번했다. 물론 주인공을 내버려두다 악역들이 뒤통수를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굳이 적이 강해지는 걸 그냥 지켜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다. 놈들의 먹이를 면전에 바치면서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걸 떠나서 모든 전략의 기본은 적이 싫어하는 짓만 골라 하는 거였다.
지금 나가들에게 가장 열 받는 일이 뭘까?
그건 인어들을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아예 대피시키는 게 아닐까?
인어들을 쫓아 바다를 건너왔는데 자신들이 찾지 못하는 곳에 숨어버린다면?
아마 기운이 쪽 빠질 것이다.
아니면 인어들을 한곳에 모아 놈들을 유인하는 방법도 있다. 놈들이 강해져 제국 해안가를 산발적으로 들쑤시는 것보다 공격점을 한곳으로 줄이면 상대하기도 훨씬 수월했다.
그렇게 놈들의 주공을 막아내고 뒤에 놈들의 본진을 급습해 족장 격인 대장만 처리하면 잔당의 처리는 해상 왕국에 맡겨도 괜찮을 것이다.
인어들을 내보내자는 귀족들의 의견에 아무 대꾸도 없는 걸 보면 황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지방 대영주들까지 불러 모은 게 아닐까? 강한 군권을 가진 지방 대영주들이 황제의 의견에 힘을 실으면 귀족들을 수월하게 설득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귀족들의 의견을 가만히 듣고 있던 크라우 백작이 먼저 발언권을 얻었다.
“나가들은 바다를 건너 제국을 공격할 수 있는 몬스터인데 해상 왕국에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면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 차라리 세가 더 강해지기 전에 뿌리 뽑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제국의 안위를 해상 왕국에 맡겨놓을 순 없습니다. 차라리 인어들의 협조를 얻어 나가들을 상대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크라우에 이어 작센까지 동의하고 나섰다.
요지는 해상 왕국의 전력을 믿을 수 없다는 것.
아마 해상 왕국을 가장 오래 상대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염려인 거 같았는데 이 점만은 다른 귀족들도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리아넨은 보류하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뜻을 따르도록 하죠.”
내륙 지방에 위치한 리아넨은 판단을 유보했다. 해안선을 끼고 있지 않아 비교적 안전한데다 아직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해 그런 모양이다.
하지만 황제의 뜻대로 움직이겠다는 건 병력을 움직이게 되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의미였으니 그 정도면 사실상 인어들의 망명을 받아들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레오니스는 인어들의 망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도 인간이나 마찬가지인데, 살아있는 인간을 몬스터의 먹이로 던져줄 순 없습니다. 그들이 자력으로 생존할 수 있으면 제국에 망명하지도 않았을 터, 제국이라면 자신의 품에 들어온 자들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배포를 보여야 합니다.”
레오니스는 인어족과 나가를 별개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었다.
뒤에 적이 도사리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망명을 요청한 자들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게 제국의 배포라는 건 조금 인상적이었다. 물론 제국의 체면과 위신을 위해 여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귀족들의 의견과 일맥상통하는 견해였지만 말이다.
“그레이츠는 인어들의 망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인어들을 이용해 놈들의 주력 부대를 한꺼번에 처리하고, 놈들의 본진에 자리 잡은 족장까지 처리하는 게 훗날의 위협에 대비하는 일이 아닐는지요.”
단순히 방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놈들의 본거지를 뿌리 뽑자는 건 병력을 동원해 해상 왕국 쪽으로 진출하자는 의견이라 그런지 다른 귀족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굳이 그럴 거 있습니까? 인어들의 망명을 받아들여도 적들을 막아내기만 하면 족할 텐데요.”
“해상 왕국의 일은 놈들이 처리하는 게 맞습니다. 굳이 우리가 피를 흘릴 이유는 없죠.”
만약 원정이 확정되면 실제로 병력을 동원해야 하는 영주들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지금 영주들은 큐브에 신경 쓰느라 그리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작센과 마찬가지로 해상 왕국의 전력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몬스터들은 인간을 죽일수록 더 강해집니다. 마치 우리들이 스킬 랭크를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런데 적이 강해지는 걸 굳이 기다릴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해상 왕국이 놈들을 막지 못한다는 전제하에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하죠.”
“음…….”
회의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히나코 여왕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 덕분에 회의는 나가들을 처리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지금 해상 왕국은 해안가의 나가들을 상대할 여력이 없습니다. 두 공작의 영지에도 큐브가 터진 곳이 많아 그쪽을 먼저 처리해야 할 테니까요. 두 공작의 영지와 떨어진 북부 해안가를 정리하는 건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일 겁니다.”
해상 왕국은 사방이 난리라 결국 제국에서 나가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제국이 피해를 보는 것보다 해상 왕국이 망하는 게 더 먼저겠지만 불행히도 나가들은 바다를 건너올 수 있는 놈들이었다.
귀족들도 결국 나가들을 상대하는 것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놈들이 더 강해져 제국으로 쳐들어올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나가들을 처리하기로 결정된 순간부터 모든 논의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영주들도 출진 자체는 꺼리고 있지만, 출진이 결정된 이상 빠르게 움직이는 게 유익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정된 격전지는 작센 백작령.
인어들을 작센 백작령에 대기시키고 그곳에서 일차적으로 요격한 후, 놈들의 본거지를 공격하는 거로 확정되었다.
크라우와 작센 모두 남부 해안가의 요지지만 작센의 해안가는 해안가 전역이 방어 기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어 놈들을 상대하기 가장 좋은 장소였다.
사실 인어들이 이곳으로 도망친 것도 삼엄한 방어 체계가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을 거 같아서였다.
황제는 일반 영주들에게 병력을 차출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요구한 건 물자와 보급.
그리고 전투는 대영주들의 병력과 황실의 병력이 전담하는 거로 확정 지었다. 쓸데없이 모여봤자 큰 도움도 안 되면서 지휘 체계만 어수선해질 걸 경계해서였다.
어차피 전리품조차 남지 않는 전투였기에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는 영주들은 없었다.
“아우, 그놈들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놈들만 아니었으면 그냥 얌전히 있는 건데.”
놈들의 근거지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나섰던 로빈은 영지의 특수성 때문에 한 손 거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수림과 마수 산맥만 해도 성가신데 거기에 바다까지 경계하는 건 아무리 그레이츠라도 버거운 일이고, 만약 제국의 서쪽 해안가가 나가들에게 점령당한다면 물자를 운반하는 데 큰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많은 물자를 황도에 의지하고 있는 그레이츠로서는 해안선이 끊기는 걸 특히 경계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도 격전지가 작센 백작령이면 자신도 한 손 보탤 수밖에 없었다. 다이앤의 오빠인 라이언과 다이앤과 가장 친한 친구인 백작 부인이 모두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로빈이 온 힘을 다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