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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족 전용 남창이 되었다-50화 (50/523)

〈 50화 〉 반 세계 정부 주의자 (5)

* * *

불현듯 느낀 불길함에 릴리스는 뒤를 돌아봤다.

뭐지 이거...?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맥주. 마트에 한 세트만 덜렁 남은 맥주를 발견하고서 걸음을 옮기던 중에 그 맥주를 향해 다가가는 또 다른 사람을 발견한 것 같은, 그런 꺼림칙함이었다.

비유가 좀 이상한데, 아무튼 그런 느낌의 불길함이 느껴졌다.

“뭔데...?”

뭔지 모르겠지만 꺼림칙했다. 꺼림칙한데, 돌아갈 수 없었다. 아직 납치된 디스펜서나 그 디스펜서를 납치했다던 대가리가 돌아버린 라미아년을 찾지 못했으니까.

“씹...”

근데 돌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직감과 의무.

둘 사이에서 고민하던 릴리스는 이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기감을 더욱 넓게 퍼트렸다. 그만큼 정밀한 정도는 낮아졌지만 감지 범위만큼은, 열도지역의 절반 가까이를 느낄 수 있을 만큼 퍼트린 기감에, 수백이 넘는 라미아 종족들의 기운들이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늦게 돌아가면, 후회할 일이 생겨버릴 것 같다는, 그런 막연한 불안감에 릴리스는 새롭게 찾아낸 라미아의 기척에 날개를 움직였다.

내가 던진 거라고는 생각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하게 백발 여자한테 날아가는 가로등을 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각지도 못한 힘이 생겨났지만, 덕분에 저 썅년한테 한 방 먹였으니까.

하지만...

“정말이지, 릴리스랑 똑같이 교양 없는 짓거리를 다 하는구나.”

꽈드득,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찌그러지듯이 접혀버리는 가로등이 보였다. 구깃구깃, 허공에서 구겨져서 그대로 바닥으로 쿵, 떨어져버리는 가로등이.

“하지만, 그래. 인정해줄게. 내 인형들로는 널 잡긴 힘들겠네.”

스으윽, 그렇게 말하며 사뿐히 땅에 내려앉은 백발 여자가 양산을 빙그르르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 보니까... 생각보다 괜찮게 생긴 것도 같고.”

아니.

갑자기 뭐라는 거야, 이 미친년이?

“그러니까, 피를 전부 뽑아서... 특별히 내 시종으로 삼아줄게.”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백발 여자.

그때, 느꼈다.

오싹한다기보단, 그건 끔찍하게도 두려운 것에 가까웠다.

공포.

절망.

압도적인... 무력감.

도망쳐야 하는데.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과는 달리,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자아, 네 피는 무슨 맛일까... 릴리스의 아이를, 내 종으로 삼는다니, 생각해보니 마음에 드는 것들이 잔뜩인걸. 그년이 네가 내 발을 핥는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생각만 해도 짜릿해서...♡”

하아, 한숨을 토하면서,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는 백발 여자인데도.

그런 백발 여자의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릴리스랑 같지만, 다른 붉은 눈동자.

나를 먹이로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듯한 포식자의 눈동자.

“애, 애미 씨발...”

환상이나 매혹, 그 밖에 어떤 능력이 아니었다.

그냥 존나게 쫄려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 거였다.

딱딱, 이빨이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쪽팔려서라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몸이 제멋대로 이빨을 부딪혀댔다.

거대한 육식동물의 앞에 선 쥐새끼마냥, 몸이 굳어서 움직이질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키득거리며 백발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움직여.

다리가 후들거렸다.

움직여.

다리가 풀렸다.

풀썩, 주저앉자 그런 나를.

땅으로 내려와서도 내려다보는 백발 여자가 손을 뻗어서, 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차암, 그래. 네 새 이름은 뭐가 좋을지 말해보렴. 기왕이면 귀엽고, 품위 있는 이름으로...”

차다.

피가 흐르지 않는 것처럼.

마치 시체처럼, 백발 여자의 손은 차가웠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저년한테서 피냄새가 나는 이유도.

딱히 오늘이 저년의 그날이라 그런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몸에 피냄새가 잔뜩 배었을 뿐이었다.

백발 여자가 가까이온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비릿하고, 수많은 피냄새가 뒤섞인... 구역질이 치어오를만큼, 지독한 피냄새를.

짙은 향수에 가리려 했지만, 그럼에도 가려지지 못한 피냄새를.

저년이 피를 빠니 뭐니하는 소리도, 대체 왜 그딴 소리를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등 뒤에 있는 저 박쥐를 닮은 날개가, 단순히 웨어비스트, 박쥐 수인같은게 아니란 것도 알 수 있었다.

전부.

알 수 있었다.

이년의 정체를.

흡혈귀.

피를 빨고, 피를 빤 대상을 종으로 부리는, 밤의 귀족.

그렇게 불리는 종족.

“어때? 생각 좀 했니? 네 새 이름.”

속삭이듯이 말하는 백발 여자의 말에 내가 딱딱, 이를 부딪히며 말했다.

“니미 보지.”

“...좋아, 네 새 이름은 개새끼가 좋겠는걸. 너한테 딱 어울리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콱, 하고 내 목을 붙들어 쥔 백발 여자가 그대로 나를 들어올렸다.

“끄으읍...”

“멍멍 짖으면서 헥헥대는 네 모습을 릴리스에게 보여줘야 하니까 얼굴에 상처를 내는 건 좀 그렇겠지. 어쩔 수 없으니 이번에는 특별히 봐줄게.”

감사히 여기렴, 그렇게 말하며 내 목덜미에 다가오는 백발 여자의 입이 보였다.

쩌억, 벌어지는 입과, 소름 돋을 만큼 길고 뾰족한 송곳니가 보였다.

“끄, 으, 읍...”

발버둥을 쳐봐도, 아직 내 힘이 어디 간 것도 아닌데도 꿈쩍도 하질 않았다. 가로등을 맨 손으로 잡아뽑을 정도의 힘이, 아직 사라진 것도 아닌데 백발 여자의 한 손을 두 팔로도 떼어낼 수 없었다.

존나.

대체 얼마나 센거야...

이대로 피를 빨려서 저 썅년의 노예가 된다고?

흡혈귀.

피를 빨아서, 노예를 만들어버리는 밤의 귀족.

그렇기에, 흡혈귀들은 세계 정부가 내건 평등이니 뭐니하는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흡혈귀가 피를 빨아서 만든 노예들은, 흡혈귀조차 되지도 못하는, 반쪽짜리 흡혈귀가 되어서 영원히 자신들의 주인을 위해 살아가야 했으니까.

그런 수많은 노예를 부리던 흡혈귀들이, 스스로를 밤의 귀족이라 칭하던 오만한 족속들이 세계 정부가 말하는 평등같은 소리를 들어먹었을 리가 없었다.

덕분에 스물둘의 영웅들이 그런 흡혈귀들을 평등하게 만들어버렸지만, 그래도 많은 흡혈귀들이 그런 스물둘의 영웅을 피해서, 세계 정부에서 벗어나 세상 곳곳에 숨어들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년도 그런 흡혈귀 중에서 하나겠지.

세계 정부에 반하는, 반 세계 정부 주의자네 뭐네 하는 것들.

릴리스의 적.

물려버리면.

그래서 피를 전부 빨려서, 이 년의 노예가 되어버린다면...

나 역시도, 그런 릴리스의 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지를 잃고, 자아를 잃어서, 이 썅년의 노예가 되어 릴리스와 적대하게 된다.

“끄, 윽...!”

몸부림친다.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부림쳤다.

“잠깐만, 그렇게 자꾸 움직이면 물기 힘들거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좀 얌전하게 있어 줄래? 내 시종이 되면, 그래도 제법 귀여워해줄테...”

프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민해진 청각을 통해서, 또렷하게.

“니...?”

스으윽, 백발 여자의 몸 위로, 사선으로 그어지는 선이 보였다.

스르륵, 하고.

그렇게 백발 여자의 몸이 무너지려다가, 우뚝 멈추어 섰다.

즈즈즈...!

그리고 그대로 무너지려던 몸이 순식간에 붙어버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과연 저게 회복력이 뛰어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 싶을 만큼, 초현실적인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대체 어떤ㅡ”

핏발이 곤두선 눈으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며 공격이 날아든 곳을 향해 몸을 돌리는 백말 마녀의 목에, 다시 한번 선이 그어졌다.

“카프흡...!”

또 다시 한번. 이번에는 다리를.

“흣...!”

또, 다시 한번. 이번에는 허리를.

“크흡...!”

잘리기 무섭게 재생되는 신체를, 다시 한번 잘라내는, 무수한 공격들이 백발 여자에게 쏟아부어졌다.

“이잇...! 어디야?! 대체 어디서... 어떤 새끼가ㅡ!”

이번에는 손목.

자신을 공격해오는, 도대체 어떤 방식의 공격인지도 모를 공격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백발 여자의 손목이 잘려 나갔다.

나를 붙들고 있던 손목이.

“아차...!”

한순간, 단 한 순간에 잘려 나갔던 손이 날 놓친 순간에.

쑤욱, 하고 당겨지듯이. 내 몸이 땅 밑으로 파고들어 버렸다.

“...뎃?”

아니, 땅 밑으로 파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별안간 이상한 곳으로 튀어나왔다.

“으악, 씹...!”

철푸덕, 하고서 바닥에 떨어지고서 보이는 광경에 기겁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여긴...

빌딩 위였다.

이종족간지원센터라는, 존나 긴 이름을 가진 내 직장인 그 빌딩의 꼭대기.

아니, 씨발.

왜 난 또 여기에 있는 거야?

아득하게 높은 빌딩 꼭대기에 덩그러니 놓여버린 내가 저 밑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백발 마녀와 눈이 마주쳤다.

이게 보이네, 싶기도 하고.

이걸 보네, 싶기도 하고.

이상한 감각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선 밑에 있는 백발 여자랑 시선이 마주친다는 것 같은 게 가능할 리도 없었는데.

아무래도 시각도 극대화되어있었던 모양인지, 백발 여자와 이 거리에서 눈이 마주친다는 기이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붉은 두 눈동자가 나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이내 안그래도 새하얗던 안색이 더욱 새하얗게 질리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 보면 안되는 걸 봤다는 듯이 공포에 질린 얼굴이 되어버리는 것이 보였다.

“...괜찮느냐? 한조야.”

그리고 그런 내 귓가에,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진짜.

존나 반가운 얼굴이.

치렁거리는 금발 머리카락, 흔들거리는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호아란의 얼굴이 보였다.

“호아란...!”

그리고, 밑에서부터 괴성인지, 고함인지 모를 외침과 함께, 빌딩의 주위로 수많은 붉은 창들이 생겨나는 것이 보였다.

이제까지, 나한테 한 짓들은 전부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아니, 오히려 발악과도 같이.

주변을 빼곡하게 메운 붉은 창들에도 불구하고, 호아란은 내 이마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잘 버텼구나, 과연 본녀의 제자이니라.”

아니, 저 제자한다고 한 적 없는데.

아니, 그보다...

지금 위험한 거 아냐?

그렇게 생각했는데.

스으윽, 그런 내 몸을 감싸오는 무척이나 폭신폭신한 호아란의 꼬리들에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졌다.

폭신폭신한레후...

“그러니, 조금 쉬고 있거라.”

뿅, 뿅, 뿅하고.

주위에서 튀어나오는, 호아란을 꼭 닮은 인형들이 손을 마주쳤다.

그러자, 무수하게 많은 붉은 창을 가릴만큼, 수많은 부적들이 주위를 둘러왔다.

잇고, 잇고, 이어서.

부적들이 서로서로 이어붙어가면서 거대한 장벽을 세우는 것들이 보였다.

그런 부적들이 둘러오기 무섭게 쏟아지는 붉은 창들.

하지만 그 무엇 하나도 부적이 둘러쳐낸 결계를 뚫지 못하는 것이 보였다.

날아들던 붉은 창들은, 그에 맞서듯 부적에서 튀어나오는 불길과 얼음에 불타고, 얼어붙어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살랑, 하고 그런 내 머리 위에 호아란의 꼬리가 얹어졌다.

덕분에 위아래로 존나게 폭신해졌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너를 괴롭힌 모기년은, 본녀가 혼쭐을 내줄 터이니.”

그렇게 말하는 호아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스으으으...

호아란의 눈 밑과 이마에 떠오르는 붉은 선들.

기이한 문양들이 보였다.

“감히 본녀의 제자를 건드린 대가를, 저 모기년이 잔뜩 치르게 해주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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