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휴식 (1)
* * *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근데 존나게 넓어진 천장이었다.
“...뭔데?”
익숙한, 내 작은 집의 천장인데 익숙하지가 않았다. 심지어 사방의 끝에 붙여져 있는 부적들이 있다면 더더욱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끄응...”
온몸이 쑤셔서 끙끙대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자, 내가 눕고 있던 침대 역시도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존나 크네.”
내 작은 침대는, 존나 큰 침대가 되어 있었다.
거인용의 침대가 대충 이렇게 생겼을까 싶을 만큼 존나게 큰 침대가.
아니면 내가 존나 작아진 건가?
본래라면 나 혼자 쓰기도 벅찬, 그래서 릴리스와 동거할 적에는 항상 릴리스의 몫이 되었던 침대는 내가 눕고도 세 사람은 더 누울 수 있을 만큼 커져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을 열며 호아란이 들어왔다.
호아란이 나를 보더니 화색이 되어 말했다.
“아, 드디어 일어난 모양이구나.”
“마망?”
앞치마를 하는 호아란이 그런 내 말에 가슴을 쭉 앞으로 피며 말했다.
“그래, 본녀가 한조 너의 마망이니라.”
어...
마망, 하고 먼저 부른 건 난데 저렇게 받아주니까 뭔가 좀 부끄러운데.
아무튼...
“이것들... 호아란 마망이 하신 거예요?”
침대에도 역시나 붙여져 있는 부적들을 보며 그렇게 묻자, 호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무래도 이곳에서 셋이 자기엔 너무 비좁지 않으냐? 그래서 조금 늘려봤느니라.”
그런 호아란의 대답에 문득 잠들기 전에 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셋이라...
눈앞의 호아란이랑 릴리스한테 존나게 쥐어짜였던 것이 떠올라서 그런지, 등골이 오소소 떨려왔다.
다시는 경험하기 싫으면서도, 또 경험하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어, 근데 셋이서요?”
잔다고?
한 침대에서?
“그야 이곳에서 침대는 이거 하나뿐이지 않느냐?”
아니.
그건 맞긴 한데...
침대가 하나라고 다 같이 침대 위에서 자는 건 아니지 않나?
바닥도 넓어졌으니 대충 이불 깔고 드러누워도 될 것 같은데.
뭐, 그건 나중에 정하기로 하고서.
“그보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런 내 물음에 아, 하고 호아란이 말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거라. 네 그것이 가라앉은 뒤로는 본녀 역시 발정기가 끝나버렸으니.”
그건 다행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얼굴을 붉히고 있는 호아란을 보고서, 그냥 다행인 거로 치기로 했다.
발정기가 아닌 호아란은 아무래도 이쪽으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모양이니 좋은 주제도 아닌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때 왜 그딴짓을 저질렀는지 살짝 의아스럽기도하고.
뇌가 자지에 지배받는 것처럼 다소 평소답지 않은 짓을 해 버렸으니까.
내가 개변태 새끼인건 맞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호아란이랑 릴리스에게 발기한 자지를 들이밀면서 이것 좀 어떻게 해 달라고 할 정도로 개 변태 쓰레기 새끼인건 아니었다.
근데 그땐 왜 그랬지?
어쩌면...
내 기프트가 단순히 종족의 능력만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특징 그 자체도 넘겨받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티로스하면 유명한 것은, 대낮에 공공연히 떡치다가 잡혀들어갈 정도로 존나게 강한 성욕도 한 몫 했으니까.
그것도 아니면, 기프트가 발현한 부위가 부위다 보니 폭주한 상태에선 내 성욕이 강해지는 걸지도 모르겠고.
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지금의 내 자지는 존나 얌전하게 있었으니까.
하도 빨려서 그런지, 평소였다면 일어나자마자 보는 게 아침 발기한 자지였을 텐데, 지금은 존나 축 처져 있었다.
허리도 욱신욱신 아프고, 온몸이 쑤셨다.
확실한 건, 오늘은 일단 일하기 그른 것 같았다.
“그런데 어머니... 아니, 그 호아란 마망 말고...”
릴리스는 어디로 갔느냐고 물어 보려다가, 호아란과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릴리스를 그냥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따로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다.
어쨌거나, 둘 다 내 어머니가 되어 버린 이상 호칭은 구분해야 할 테니까.
여우의 숲에서야 임시로 릴리스를 그냥 어머니, 호아란을 마망이라고 불렀지만 계속 그래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런 나를 보며, 호아란이 말했다.
“편하게 불러도 괜찮으니라. 본녀는 신경 쓰지 않으니.”
“어, 그럼. 릴리스 어머니는 어디 갔어요?”
“그 녀석이라면, 밀린 일을 처리한다고 아침에 나갔느니라.”
“이 아침에요?”
그 릴리스가?
아니, 잠깐만.
호아란의 말에 창문을 열어 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저, 얼마나 자고 있었어요?”
그런 내 말에 호아란이 말했다.
“그날이 끝나고서도 하루를 꼬박 자고 있었구나. 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잠에서 깨지 않아 걱정하던 참이었느니라.”
존나 푹 잤구나.
어쩐지.
그런데도 아직도 허리가 뻐근하고, 자지도 이 모양인 거라고.
진짜 존나게 빨렸구나.
“...아.”
문득 떠오른 것에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집에 있던 충전기에 꼽아서 전원을 켰다.
우웅...!
우우웅...!
전원을 켜기 무섭게, 일주일 동안 쌓인 문자며 부재중 전화며 전부 떠오르는 것들이 보였다.
대충 요새 보이지 않는 내 안부들을 묻는 내용이었다.
애당초 이 스마트폰으로 연락해오는 사람들이야 하나 같이 고객들이나, 릴리스 정도뿐이었지만.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연락을 씹은 셈이 되어 버려서 고객들에게 어떻게 사과 문자를 보내면 좋을지 생각하는 내게 호아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한조야.”
“넹?”
“릴리스가 자기가 나가 있는 동안 네가 깨어나면 전해주라는 말이 있었느니라.”
“어... 릴리스 어머니가요?”
뭔데?
내가 의아해하며 묻자, 호아란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본녀가 한 말이 아니니라. 어디까지나, 릴리스, 그 녀석이 전해주란 말이었느니라?”
아니, 불안 하게 왜...
아.
설마...
더듬더듬, 바지 뒷주머니를 확인해봤지만, 그것이 없었다.
그것.
백발 여자에게 습격 당했을 때, 내 목숨을 살려주기도 했던, 내 부적이.
겸사겸사, 여러모로 잘 썼던 릴리스 팬티가 없었다.
아앗, 씨발.
그런 내게 큼, 하고 헛기침하며 호아란이 입을 열었다.
“이 팬티 도둑 새끼야, 똑같은 거로 안 사놓으면 죽을 줄 알아, 라고. 그 녀석이 전해 달라고 했느니라.”
어...
“똑같은 거로 사다만 놓으면 된대요?”
“본녀는 릴리스에게 들은 대로 전해준 것뿐이니라. 아, 그리고 그... 브랜? 브랜디?”
“브랜드요?”
“그래, 그거... 브랜드... 그, 브랜드 이름이... 아라크네틱이 어쩌니 했었느니라.”
호아란이 알려 준, 릴리스 팬티의 브랜드를 들은 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라크네틱, 이름처럼 아라크네 종족이 만든 꽤 유명한 브랜드였으니까.
그리고 이내 해당 브랜드를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봤다.
여성 속옷 전문의 유명 브랜드라 그런지 검색하자마자 바로 주르륵 나오는 속옷들.
하나 같이 엘프니 서큐버스니 하는 모델들의 착샷이 첨부되어 있어서 눈이 호강했지만, 덕분에 내 손은 점점 떨려올 수밖에 없었다.
엘프나 서큐버스들은 하나 같이 뛰어난 미모로 유명한 종족들이었다.
당연히 각종 모델이나, 연예계, 아이돌 등으로 활동하는 이들도 엄청 많은 종족이기도 했다.
그런 종족들만 이루어진 모델을 사용한다는 건, 존나 고급 브랜드라는 소리였다.
떨리는 손으로 더듬듯 스마트폰을 터치해서 그중에서 릴리스의 팬티랑 똑같은 것을 찾다가 마침내 발견한 것을 보고서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뭔 씨발 팬티 가격이...”
어쩐지 존나 부드럽더라.
아라크네의 실로 짜낸 원단을 사용했으니 그런 거였다.
원단 하나하나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다는 아라크네의 원단으로 만든 팬티라서 그렇게 개쩔어줬던거구나.
눈앞이 아찔해지는 팬티 가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내게 호아란이 말했다.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생긴 것이더냐?”
“아, 아뇨...”
하루 꼬박 벌어서 팬티 하나 겨우 사다가 갖다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어질어질한 거지, 릴리스의 팬티를 슬쩍한데다가, 그걸로 딸친 거까지 생각하면 그다지 큰 벌은 아니었다.
그냥 좀 속이 쓰릴 뿐이지.
일주일을 꼬박 쉬어버린데다가, 또 거기서 뻗은 채로 하루를 또 쉬어버렸으니 벌은 건 없는데 돈만 잔뜩 나가게 생겨버렸다.
“...잠깐만요. 저, 하루 동안 내내 자고 있었다고요?”
“그러하느니라. 왜 그러느냐?”
온종일을 잔 것치고는 뭔가 몸이 너무 멀쩡한데.
여러모로, 생리적인 것들이 딱히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톡 까놓고 말해서, 소변 같은 것이 하나도 마렵지 않았다.
“아니... 설마.”
“무슨 일 있느냐?”
“아뇨, 아무것도 아니예요.”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진 아닐 거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내 눈에 띄는 낯선 물건이 보였다.
물통...
비스무리한 무언가가.
우리 집에 저런 게 있었나...?
아니, 있었다 쳐도 왜 저런데 둔 걸까?
방에다가 물통을, 그것도 물이 하나도 안들어있는 물통을 둘 이유가 있는 걸까...?
내 시선에, 호아란이 고개를 돌리더니 나와 같은 물통을 발견했는지 그런 내게 말했다.
“아, 저거 말이더냐? 걱정하지 말거라. 사용한 후에는 항상 깨끗하게 씻어두었느니라.”
“아... 아아... 네...”
차마 저걸 대체 어디다 사용한 건지 물어볼 자신이 내겐 없었다.
이후에, 호아란이 차려 준 밥을 먹고서 멍하니 있었다.
참고로, 수상쩍은 물통은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면서 호아란이 치워 버렸다.
대체 그 물통의 정체는 뭐였을까?
별로 알고 싶지 않으니, 영원히 모르기로 했다.
그 편이 내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잠깐 멘탈이 흔들리는 일이 있었지만, 마냥 멍 때리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나는 다시 스마트폰을 열어서, 그동안 내게 왔던 문자들을 대충 확인해봤다.
요즘 안 보이는데, 혹시 무슨 일 생겼니?
누나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도와줄 테니까 문자 보면...
에일레야로부터 온 문자들을 훑어보고는, 이내 그런 에일레야에게 답장을 보내기로 했다.
“뭐라고 보내지.”
어... 그냥 대충 몸살나서 좀 쉬었다고, 내일이면 다시 출근할 거라고, 그렇게 무난한 내용의 문자를 에일레야에게 보내고서, 또 다른 문자들을 확인했다.
“사티, 얘는 또 왜?”
사티로부터 온 문자도 있어서 확인해 보니, 이상한 것이 적혀져 있었다.
혹시 오빠 무슨 사고라도 친 건 아니지?
그래도 난 오빠 편이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줘.
한 명쯤은... 응, 한 명쯤은 어떻게든 같이 먹고 살 만큼은 벌고 있으니까... 뭣하면 같이 어디 숨어서 지내면 들키지 않을 거야. 생각보다 길거리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고...
“얜 또 왜 이래?”
무슨 내가 지명 수배범이라도 되기라도 한 것처럼, 숨어 지내면 들키지 않느니 뭣하면 같이 도망쳐주겠다느니 뭐니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티의 문자를 보고서, 별일 없으니 걱정 말라는 답장을 보내놨다.
그 외에도, 지명 예약이라든지, 이것저것 잡다한 문자들에 답장을 보내고 나니 다시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일하지 않으니까 진짜 아무것도 할게 없네.”
이렇다 할 취미도 없고.
이럴 땐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차를 타왔느니라.”
그럴 때, 호아란이 그렇게 말하며 방에 들어왔다.
“아니, 이런 건 제가 해도 되는데.”
“본녀가 하고 싶어서 한 것뿐이니라.”
스윽, 하고 그렇게 말하며 내게 찻잔을 건네주는 호아란.
“자, 받거라.”
“아, 네...”
찻잔을 받자 쪼르륵, 하고 차를 따라주는 호아란.
무슨 차인지는 몰라도 은은하게 달콤한 향이 났다.
아니, 이거 어디서 맡아본 건데.
“아리아드의 수액이 있더구나, 그걸로 차를 타면 무척이나 좋은 향이 나느니라.”
“아, 이거 그거예요?”
냉장고에 처박아 놓은 아리아드의 수액들, 종종 마시고는 했는데 차로 타면 이런 향이 나는 구나.
몰랐네.
그냥 과일 쥬스 마시듯이 마시고 말았는데.
그나저나...
“...왜 그렇게 보느냐?”
홀짝, 하고 차를 마시다가 내 시선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호아란.
방금 전에 먹은, 호아란이 차려 준 밥도 그렇고 지금 마시는 차도 그렇고. 하나같이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고아원에서 나와서 혼자 산지 어언 7년이 넘는, 내가 보기에도 나 같은 것보다 호아란이 훨씬 더 고수였다.
어디의 설거지도 제대로 못 하는 누구랑 엄청나게 비교될 지경이었다.
마망 쟁탈전을 이런 거로 했었으면 호아란이 압승하지 않았을까?
“본녀의 얼굴에... 뭐라도 묻어 있는 게냐?”
“아뇨, 그냥요.”
빤히 쳐다보고 있자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묻는 호아란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차를 들이켰다.
그런 나를 보다가, 같이 차를 마시던 호아란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집에 먹을 것이 그리 많지 않더구나. 아리아드의 수액이나, 웬 우유만 잔뜩 있었느니라.”
아, 그거.
아리아드한테 잔뜩 받은 수액이랑, 미노타우로스들한테 짜낸 우유들을 죄다 냉장고에 처박아놔서 그런 거였다.
내가 틈틈이 마시고는 있었는데, 릴리스는 수액이나 우유나 둘 다 싫다고 안 마셔서 나만 마시고 있느라 그것만 냉장고에 가득하긴 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장이라도 봐올까요?”
어차피 할 것도 없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싶어서 그렇게 말하자, 호아란이 그런 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주면 고맙지만, 괜찮겠느냐?”
“어차피 요 앞인걸요. 뭐 사 오면 되나요?”
“음... 차라리 본녀와 같이 다녀오는 것은 어떠하느냐?”
호아란이랑 같이 장을 본다고...?
동네 마트에 갑자기 스물 둘의 영웅 중 하나인 호아란이 등장해 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봤다.
“...그랬다간 난리가 날 것 같은데요. 그냥 저한테 필요하신걸 말해주면 제가 사 올게요.”
“그것도 그렇겠구나. 그럼 부탁하마.”
그렇게 말하며, 사와야 할 것들을 말해주는 호아란.
생각했던 것보다 꽤 많아서, 메모장을 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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