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종족 전용 남창이 되었다-152화 (152/523)

〈 152화 〉 외전) 파라오, 카르미나 나르메르 (2)

* * *

이미 한 번 오른 천상을 오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인을 잃은 짐승을 만났다.

커다란 짐승.

엎드린 채, 천상으로 올라온 여를 내려다보는 짐승을.

“암무트.”

그 짐승의 이름을 부르자, 그것은 여를 지친듯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의 주인을 죽인 자여, 이 세상의 마지막 남은 왕이여, 죽음을 거역한 파라오여. 어찌하여 주인을 잃은 땅에 다시 찾아왔는가. 혹, 나의 목숨을 거두러 왔는가.』

낮게 그르렁거리며, 지친 듯이 그렇게 말하는 짐승의 말에 여가 대답했다.

“이 세상의 안식을 찾으러 왔다.”

『신을 잃고 무너져가는 세상에 그 어떠한 안식이 있을까. 이 세상의 마지막 남은 영웅이여, 마지막 파라오여. 그대를 존중하며 권하니, 너희에게 주어진 종말을 받아들여라. 이는, 이 세상에 속한 존재라면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종말일진저.』

신으로 태어나, 더 강한 신에게 패배하고 종속된 나조차도 이 종말을 벗어날 길이 없노라고 말하는 암무트에게 여가 말했다.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여는 이 세상의 종말을 막고자 온 것이 아니다. 여에게 그만한 힘이 없음을, 여가 가장 잘 알고 있음이니. 말 그대로, 망해가는 이 세상일지라도... 남은 여의 신민들의 마지막의 안식을 위해 온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

그르릉, 낮게 울리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암무트가 여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우물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길게 가지는 못 하리라. 설령, 나의 주인을 죽이고 그 일부를 취한 그대라고 할지라도 수백 년이 되지 못 하리라. 허나, 그대의 영혼은 분명 영원토록 고통받을 테지. 신들조차 두려워하는, 영원한 소멸만이 그대를 기다릴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의지는 변함이 없는가? 마지막 파라오여.』

“수백 년이라, 여가 예상한 것보다 길구나. 그 정도라면, 여의 마지막 신민의 마지막까지는 편히 보내줄 수 있을 것이니.”

가장 최근에 태어난 아이, 한때 자신과 함께 신을 죽이기 위해 노력했던 친우이자, 영웅들이 남긴 아이...

“카루라, 그 아이가 늙어 죽을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테니 천만다행이구나.”

여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런 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암무트가 낮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나의 경배를 받으라, 마땅히 그러할 자격이 있는 파라오여. 그대의 고귀한 혼은 내 경배를 받을 자격이 있노라.』

“여는 그대의 주인을 죽였건만, 그런 여에게 경배를 보낸단 말이냐?”

『‘비탄을 노래하는 죽음의 짐승’이 나에게서 승리하고, 나의 주인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나의 경배받을 자격이 없는 자였지. 나, 죽음으로 심판하는 자 암무트.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보이며, 그것을 이겨내는 자를 숭앙하는 자. 힘을 불리기만을 지상의 과제로 삼고, 자신이 패배할 곳에는 결코 이빨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따위에게 패배해 종이 되었지만, 그에게 충성을 다한 것은 아니였다. 허나, 그대는 다르다.』

스윽, 하고.

암무트가, 한때 이 세상을 지배하던 신이 거느리던 아흔아홉의 짐승 중 하나이자, ‘비탄을 노래하는 죽음의 짐승’에게 패배하기 전에는, 그 또한 신 중의 하나였던 자가 더욱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대는 자신의 영원한 고통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가 지키고자하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구나. 고귀한 혼을 지닌 파라오여. 그대에게 청하건데 나, 죽음에서 심판하는 자, 암무트의 주인이 되어다오. 그리한다면, 그대가 짊어져야 할 대가의 절반을 내가 대신 지겠노라.』

“...그대에게 그럴 이유가 있는가?”

『나 또한 이 세상에서 태어난 신의 일좌이노라. 영락하기 전, 한때 이 세상에는 그런 나를 신앙하던 자들도 있었지. 많은 영웅들이 나의 시험을 받으러 나를 찾아왔었던 때가. 세상의 종말이 오고 있는 지금, 주인을 잃고 비어버린 신좌를 차지할 힘조차 잃어 한낱 거대한 짐승이 되었을 뿐인 지금은 그저 순리에 따르려 하였지만, 필멸자에 불과한 그대조차도 자신의 신민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려하는 모습을 보고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대조차 그러하거늘, 이 내가 가만히 있어서야 그 무슨 추태인가.』

“네 뜻이 그렇다면, 그대가 굳이 여의 종을 자처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암무트가 협력하고자한다면, 굳이 자신을 주인으로 모실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여가 그리 말하자 암무트가 낮게 그르릉거리며 말했다.

『이미 나는 포기했던 자다. 이 세상의 유일한 주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패한 끝에 보다 강한 자의 밑에서 복종한 세월만 해도 수없이 길었지. 나의 주인이었던 ‘비탄을 노래하는 죽음의 짐승’이 그보다 더한 신을 두려워하며 한 때 나의 신자들이었던 이들의 후손들을 잡아먹으며 힘을 기를 적에도, 이빨조차 드러내지 못한 패배자. 그것이 나였다. 그런 내게, 아무리 무너져가는 신좌라고한들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은 없다.』

한때 신이었던 자도 후회를 하는가.

후회와 비탄, 그리고 절망을 품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암무트를 보며 쓴웃음을 지으려다가, 이내 한껏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좋다. 그대를 여의 종으로 삼으마. 네 생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여의 귀여운 짐승으로서 살거라.”

『나, 죽음에서 심판하는 자 암무트가 여기서 맹세한다. 고귀한 혼을 지닌 파라오여, 이 세상이 다하여 나의 불멸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나는 그대를 주인으로 삼겠다.』

한때 신이었던 짐승을 부리고, 한때 신이 있었던 자리에 오른 내가, 한때 신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윽...”

몸을 옭아매오는 것은, 너무나도 끈적이는 원망의 덩어리였다.

오랜 세월을, 죽음을 지배한 신이 차지했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무수한 자들을 잡아먹었던 신의 자리였기 때문일까.

몸을 타고 올라오는, 짙은 사기는 영혼에 녹슬게하는 기분이 들게만 했다.

『나의 주인이여, 그대가 취한 힘을 다루어라. 내가 이를 도울 터이니, 마땅한 주인이 자리에 앉았음을 선언하라.』

“선언이라. 아하하하, 좋군. 여가 아비의 뒤를 이어 파라오가 되었을 적에 했던 선언이 기억이 나는구나!”

눈을 감고서, 그때를 떠올렸다.

한때 이 세상에서 살아갔던 수많은 왕들이.

한때 이 세상에서 호령하던 수많은 영웅들이.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 그 후손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의 죽음조차도, 영원한 안식조차도 거부한 채 스스로 영혼에 주박을 걸고서, 끝없는 종군을 맹세하며 신을 향해 진격했을 때를 떠올렸다.

꿈틀, 몸속에서 느껴지는 기운.

짙은 사기로 점칠되어있지만, 어느 샌가 익숙해져가기 시작한 기운을 품고서 외쳤다.

『일어서라!』

사바세계의 모든 왕과 영웅들에게, 스스로의 안식조차도 포기하며 이 세상을 지키려했던 이들에게 다시 한 번 부탁했다.

『그대들의 후손을 위해, 그들의 마지막 안식을 위해 여에게 힘을 보태다오! 사바세계의 모든 왕들이여, 영웅들이여!』

빛과 함께 솟아나는 군세들.

찬란하고, 영광되었던 자들.

한 때 왕이었고, 영웅이었던 자들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와 함께 죽어다오.』

여의 말에 고개를 숙인 왕과 영웅들이, 이내 녹아내리며 세상에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무너져가던 세상이, 그 붕괴를 멈추었을 때는 여와 암무트는, 힘의 대부분을 잃은 뒤였다.

여에게 종군을 맹세했던 수많은 왕과 영웅들도 대부분 세상에 녹아내리고, 여 자신의 힘도 모두 잃어버린 뒤였다.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의 아주 조금에도 미치지 않는 신성 뿐.

허나, 그 대가로 무너져가던 세상에, 종말이 오고 있던 세상에 잠깐의 유예를 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여는 웃었다.

웃으며 말했다.

“아하, 아하하하! 꼴이 말이 아니구나, 나의 귀여운 짐승아! 네 모습을 보거라! 그 거대했던 몸이 작디 작아졌구나.”

『나의 주인이여, 그대도 마찬가지다.』

그런 암무트의 말에 몸을 내려보자, 실로 그러했다.

과거, 자신의 가슴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던 발끝이 훤히 보이는 데다가 그것만이 아니라 전신이 짜리몽땅한 것이, 아직 과년에 이르지도 못한, 아직 앳된 아이의 몸이 되어있었으니까.

“음, 그렇구나. 여의 풍만한 여체가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으니, 실로 안타깝기 이를 데가 없노라. 허나, 다행인 것이 있다면 더 이상 그러한 몸으로 유혹하거나 아양을 떨 남자조차 없는 세상이니, 그리 생각하면 그리 큰 손해는 아니지 않겠는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철이 들기 전 무렵부터 신과의 전쟁을 치르고, 그 뒤에는 남자가 전혀 남지 않게 되어 원하지도 않게 순결한 몸을 지키게 된 것이지만.

사실 그 또한, 저주가 퍼지고 난 이래 태어난 모든 아이들도 강제로 그런 신세가 됐음이니 그리 억울한 것도 아니었다.

그 아이들에 비한다면, 적어도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라도 해본적은 있는 자신이 훨씬 나을 지경이니.

“...여의 귀여운 짐승아, 이 세상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는가?”

『나의 주인이여, 그리 긴 세월은 아니다. 앞으로 삼백 년... 좀 더 노력한다면 사백 년은 버틸 수 있겠군.』

“충분히 길구나. 나중에 나의 신민들이 모두 안식에 들거든, 그들의 장례는 치르고 끝낼 수 있을 테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그 뒤에는 영원한 소멸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그러한가, 나의 주인이여? 그대와 나의 영혼은 이 세상에 얽혀버렸다. 이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 그대와 나 또한 소멸을 피하지 못하리라.』

“이미 알고서 그리 한 것이다! 여에겐 일말의 후회는 없다!”

『나, 죽음에서 심판하는 자, 암무트가 마지막에 가서야 진정으로 충성을 다할 주인을 모시게 됐구나.』

농담은 그걸로 끝.

여는 여의 앞에서 낮게 엎드린 암무트의 위에 올라탔다.

“가자, 나의 신민들이 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암무트, 여의 귀여운 짐승아. 그거 아느냐?”

『말하라 나의 가여운 주인이여, 내가 그대의 말을 듣고 있노라.』

“이제 이 세상에서 여보다 나이가 많은 자가 남지 않게 되었도다! 이제 여가 나르메르 왕국의 제일로 최고령이니, 이를 축하하는 축제를 열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를 잊었는가, 나의 주인이여. 나는 그대의 수백 배는 오래 살았노라.』

“이런, 그렇다면 그대의 최고령을 기념하는 축제를 열어야겠구나!”

『그대들의 신민들이 그대를 욕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구나.』

“꼬우면 나보다 나이가 많으라고 하거라! 나에게 잔소리할 자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음이니! 여봐라, 축제를 열어라!”

사소한 것으로도 기념하며, 축제를 열었다.

종말을 앞에 둔 나의 신민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죽어서 안식을 취한 자들을 그리워하며 슬퍼하지 않도록.

“암무트, 여의 귀여운 짐승아. 그거 아느냐?”

『말하라 나의 사랑스러운 주인이여, 내가 그대의 말을 듣고 있노라.』

“카루라 그 아이가 대전사가 되었노라!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아 실로 걸출한 영웅으로 성장하였지. 그 작았던 아이가 이젠 여를 지키겠노라고 맹세하는 것이 어찌나 귀여웠는지.”

『나의 주인이여. 그대는 그 아이를 너무 귀여워하는구나.』

“아하하, 혹 질투하는 것이냐? 하지만 네가 그래봤자 카루라와 비교하기엔 네게 귀여움이 턱없이 모자라는구나. 게다가 카루라가 귀여운 걸 어쩌란 말이더냐? 여의 친우들이 남긴 아이다. 귀여워하는 것이 당연하지. 다만, 요즘 들어 카루라가 말을 듣지 않으니 이를 어쩌면 좋을지 걱정이구나.”

『자신의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축제를 열어댄다면 누구라도 그리 할 것이다, 나의 주인이여.』

여가 지키고자 했던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즐거워했다.

저들에게 다가올 종말을 떠올리지 않도록 한껏 웃으며 기뻐했다.

언젠가, 여가 저들의 장례를 치를 것을 잊기 위해 그리했다.

“...얼마나 남았는가?”

『이백 년... 아니, 이대로라면 백 년도 힘들 것으로 보이노라, 나의 주인이여.』

많은 세월이 지나서, 남아있던 신민들의 대부분이 안식에 이르고, 오직 과거라면 영웅이라고 불렸을 이들만이 남게 됐을 때였다.

다시금, 세상이 무너져가기 시작했을 때.

다시금, 세상에 종말이 다가올 때 그렇기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힘이 부족했던 모양이구나. 여가 너무 욕심을 부렸어. 힘을 남기는 것을 하면 안됐었다.”

『나의 주인이여. 이제와서 그대가 다시 희생한다고하더라도 고작 십수 년에 불과할 것이다.』

“아직 나의 신민들이 남아있다. 저들에게... 여는 저들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광경을 다시 보여주고 싶지 않구나.”

고작, 십수 년에 불과하더라도.

그 십수 년을 위해서라도, 여는 여를 희생할 수 있었다.

『나의 주인이여.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나 또한 함께하겠노라. 내 힘을 더하면, 오십 년 정도는 더 버틸 수 있겠지.』

“어허, 이것 봐라. 나의 귀여운 짐승아. 꽁쳐둔 것이 많았구나?”

『나의 주인이여,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내가 그대보다 강했노라. 싸우게 됐다면, 그대가 부리는 불사의 영웅들에게 결국 참살 당했겠지만, 그래도 그대보다는 내가 강하다.』

“뭐, 그것은 넘어가도 좋겠구나. 어쨌거나 둘이 합쳐서 대충 백 년 정도라고 치면 될 테니, 그 정도면 카루라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지.”

그렇게 다시 한번, 천상으로 향하는 길을 열려고 했을 때.

그것이 내려왔다.

아니,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것처럼 그렇게 있었다.

『나의 주인이여. 물러서라!』

그 존재를 마주하는 순간에, 암무트가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그 존재가 가볍게 손을 들어올린 것만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나 마찬가지인 암무트는 그 자리에서 굳은 듯 멈춰섰다.

“...그대는 누구인가?”

『ㅡㅡㅡㅡㅡㅡㅡ』

물음에 답한 그것은, 너무나도 높은 곳에서 말하듯 전혀 알아들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해했다.

다만, 무어냐고 묻는 물음의 답은 아니었다.

오히려,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을 뿐이었다.

“...살고 싶으냐고 물었는가? 당연한 걸 묻는구나. 무릇 생명을 가진 것은, 당연히 살고 싶기 마련이다!”

설령 자신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나의 신민들에게는, 평안한 삶과 안식만큼은 주고 싶었다.

『ㅡㅡㅡㅡㅡㅡㅡ』

그렇게 대답하자, 그 존재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아니더라도 상관이 없느냐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신민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기야 하겠구나.”

그렇다면, 하고.

그 존재가 말했다.

『ㅡㅡㅡ』

그 소원을, 내가 들어주마하고.

그리고, 그것이 내려왔다.

“손...?”

하늘을 드리운, 거대한 손.

『ㅡㅡㅡㅡㅡㅡㅡ』

모두를 구할 수는 없으나, 살아남은 너희는 새롭게 살아가리라.

그리고 그곳에서라면.

“...너도, 어찌 할 도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 음, 익숙하지 않군. 강림은 워낙 오랜만이라.”

이제까지, 전혀 들리지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아니, 당신은 누구인가.”

이해했다.

하늘을, 세상 전체를 드리운 저 거대한 손은, 바로 눈앞에 있는 저 존재의 진짜 모습이라고.

이해했다.

저 존재는, 이 세상의 주인이자, 신이었던 ‘비탄을 노래하는 죽음의 짐승’따위보다 훨씬 거대한, 위대한 존재라고.

“몰라도 된다. 내 이름을 들어봤자 좋은 것은 없으니. 그저, 욕심이 많아 열심히 돌아다니며 먹고 다니는 녀석일 뿐이다. 끝없이 먹어 치우며, 배를 불리는 욕심쟁이지. 그런 녀석의 이름보다는, 너희 걱정이나 하도록. 새로운 세상에서 사고나 치지 말고 잘살아 봐라.”

아, 하고.

그 존재가 덧붙이듯 말했다.

“만약에 그 세상에서 아직 어린 푸른 용을 보게 된다면, 가끔은 얼굴 좀 비추러 오라고 전해다오. 유희는 좋지만, 몇 없는 증손녀가 백 년이 넘도록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것은 너무한 것 같군. 오기가 불편하면 소식이라도 전하라고 말해다오. 곁에 붙여둔 녀석들이 몇이나 되는데 그거 하나를 하지 않으니 원... 아샤랑 아냐에게 잔소리를 듣는 건 나란 말이다.”

대체 누굴 닮은 건지, 하고 그리 말하는 존재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푸른 용, 증손녀.

그렇게 말하는 저 존재가, 용과 관련된 존재란 것만을 기억해두면서.

“자, 보내주마. 다소 혼란스럽긴 해도, 다들 열심히 살아가려는 세상으로. 신들이 없는 세상으로.”

네가 바라는 소원.

내가 이루어줄 테니.

가서 살아라.

그걸로 끝이었다.

여와 암무트가, 그리고 나르메르 왕국의 모두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에 있었으니까.

우리가 살았던 세상에 드리웠던 저주조차도, 이 세상에서는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땅.

그리고, 이 세상에서라면... 여의 신민들은 다시 살아갈 수 있으리라.

『허나 나의 주인이여. 그대와 나는 그럴 수 없음이다. 세상이 바뀌어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세상에 얽혀있구나.』

“상관없다! 그 대신에 더이상 세상이 무너져, 모두가 죽어갈 일이 아예 사라지지 않았느냐. 아주, 아주 좋구나.”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는 아직 몰라도, 그래도 남자는 있겠지.

“자, 아직 여와 그대가 살아있을 적에, 여의 신민들이 이 세상에 녹아들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겠구나. 다들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니, 이 세상의 남자들의 취향이 어떤지는 몰라도 분명 예쁨받을 수 있겠지.”

그리하면 비록, 나와 암무트는 신성이 다하면 죽어, 소멸해버릴 지라도.

이 세상에 녹아들은 여의 신민들과 그 아이들은 다시 살아가리라.

“우선 축제를 열자꾸나! 암무트! 새로운 세상에 온 축제를!”

* *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