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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족 전용 남창이 되었다-187화 (187/523)

〈 187화 〉 뿌리 내릴 장소 (2)

* * *

“아리아드한테 갔다 온다고?”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릴리스가 입을 열었다.

“왜?”

왜냐니.

“집에 있던 아리아드의 수액 전부 바닥 났거든.”

“...그게 끝?”

“끝인데, 왜?”

그런 내 말에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는 릴리스.

왜 저러나 싶어서 그런 릴리스를 쳐다보자 읏, 하고 얼굴을 붉힌 릴리스가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한숨 쉬길래.”

“...신경 꺼. 그보다, 그런 거 때문이라면 굳이 아리아드의 수액이 아니어도 되잖아.”

포션도 있고, 그렇게 말하는 릴리스에게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포션 살 돈이 없어.”

“내가 있는데?”

“그건 그런데.”

난 돈이 없지만 내 아내들은 돈이 많지.

아니, 나도 페도 지팡이만 팔면 부자긴 한데.

페도 지팡이를 팔기엔 뭔가 아까워서 계속 가지고 만 있는 중이긴 했다.

유스티티아의 말로는 팔려고 해도 살 사람도 아마 없을 거라고 하기도 했고.

사령 술사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저주받은 지팡이였는데, 카르미나가 정화빔을 날린 나머지 이도 저도 아니게 됐다나...

대충 사령 술사 전용템인데 사령 술사가 사용할 수 없게 된 기묘한 물건이 되어 버렸다는 모양이었다.

소재야 좋으니 따로 분리해서 팔면 팔 수 있겠지만, 그러면 제값을 받기엔 힘들다는 모양이었다.

그 잘 받지 못 하는 제값이란 것도, 유스티티아의 감정으론 어마무시하긴 했지만.

근데, 만약에 제값에 팔면 얼마인지 물어보고서 제값이 얼마인지 알게 되고 나니까 팔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반 토막도 아니고 반의반토막은 선 넘었지.

그래서 그럴 바엔, 그냥 기념 삼아 갖고 있자는 식으로 집구석에 장식 중이었다.

참고로, 페도 지팡이 말고 다른 루팅 템이었던 카르미나의 신성을 봉인했던 쇠사슬은 유스티티아가 가져가서 연구 중이었다.

지팡이랑은 다른 의미로 진짜 팔 곳이 없는 물건이기도 해서 그냥 유스티티아한테 맡겨 버린 탓이었다.

쇠사슬을 넘겨 주니까 평소엔 반쯤 감겨 있던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엄청나게 좋아해서 나도 기뻤고.

아무튼, 이게 아니고.

“항상 뭐 사달라고 하는 것도 그렇잖아.”

아까도 생각했던 거지만 아내들에게 항상 뭘 사달라고 하는 건 좀 많이 그랬다.

내게 이런 마초 근성이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하여간 그랬다.

그런 내 말에 릴리스가 흥,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전에는 뭐 주면 잘만 받아 놓고는.”

“그때는 아들이었잖아.”

릴리스가 마망이었던 때랑, 릴리스가 아내인 지금이랑은 상황이 다른 법이었다.

“...하여간 자존심은 더럽게 세 가지고.”

그렇게 중얼거리던 릴리스가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래, 그래서... 아리아드한테 줄 대가는 있고?”

“대가...?”

어...

아리아드가 돈도 받았던가?

“...너, 까먹었지? 전에 수액을 받아왔을 때도 그냥 받아왔던 거 아니거든?”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도 같았다.

나야 아리아드한테 아무것도 안 주긴 했지만, 릴리스가 대신 아리아드에게 뭘 주기로 했었었지.

그때 릴리스가 주기로 했던 게 뭔지는 아직도 몰랐지만.

공짜가 아니었다고...?

아무튼 대가라는 릴리스의 말에 말문이 막혀 버린 나를 보던 릴리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 그럴 줄 알았어.”

하아, 하고 또 한숨을 내쉬는 릴리스.

오늘만 벌써 세 번째인데, 어째 세 한숨 전부 의미가 다른 것 같았다.

“이젠 나도 걔한테 줄 만한 게 별로 없는데... 귀찮게시리.”

“어, 전에는 잘만 줬잖아?”

“그땐...”

뭔가 말하려던 릴리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는?”

“...시끄러워.”

아니, 뭔 말만 하면 시끄럽대.

“릴리스와 무슨 말을 그렇게 나누고 있느냐? 한조야.”

아무튼 그러고 있을 때 씻고 나온 호아란이 그렇게 말했다.

“아, 아리아드한테 줄 대가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리아드한테? 대가?”

고개를 갸우뚱하던 호아란이 으음, 하고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

“아리아드한테 줄 만한 대가라면, 처녀의 피겠구나. 순결할 수록 아리아드가 좋아하니. 그녀의 본체, 세계수는 정순하고 깨끗한 것만을 비료로 삼아 자라나니 말이다.”

“야!”

그런 호아란의 말에 빼액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호아란의 말을 자르려던 릴리스였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들어 버렸다.

“음? 왜 그러느냐, 릴리스.”

아...

그래서 릴리스가 더 이상 아리아드한테 줄 만한 대가가 없다고 한 거였구나.

더 이상 릴리스는 처녀가 아니게 됐으니까.

나한테 뚫려서 처녀가 아니게 된 릴리스의 피는 더 이상 아리아드가 좋아하는 대가가 아니게 됐으니까 줄 만한 게 없어진 거였다.

“어. 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말해, 이 새끼야.”

귀 끝을 붉게 물들인 채 그렇게 말하는 릴리스를 보고서 내가 말했다.

“처녀 찢어서 미안.”

“개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진짜.”

아니,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며.

“무어냐? 무슨 이야기중이더냐?”

찰싹, 하고 달라붙어 오는 축축한 느낌에 돌아보니 카르미나였다.

“뭐야, 벌써 다 씻었어?”

“음! 작아진 다음에 씻으면 금방이다!”

그건 좀 편할 것 같았다.

근데 물기는 다 닦고 달라붙어 줬으면 좋겠는데.

“파라오, 제발...”

봐.

카르미나랑 둘이같이 씻으러 들어갔었던 카루라가 수건을 들고 와서 그런 카르미나의 머리에 잔뜩 남아 있는 물기를 닦아냈다.

진짜 둘을 보면 카르미나가 카루라보다 몇 배는 오래 산 연상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그 반대로밖에는 안 보이는데.

“그래서, 무슨 말하고 있었느냐? 여의 영웅이여.”

카르미나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둘둘 말아서 닦아내는 가운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하는 게 전직 파라오의 자연스러움 같은 건가 싶기도 한데.

다른 누군가에게 떠받들여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당당함이 엿보이는 카르미나였으니까.

뭐, 아무튼.

“응, 그게.”

대충 아리아드... 카르미나는 잘 모를 테니까, 아무튼 내가 평소 마시고 다녔던 수액이 다 떨어져서 그걸 받아 오려고 깨끗하고 정순한, 예를 들어서 처녀의 피같은 게 필요하다는 이야기만을 대략 카르미나에게 전해주자, 골똘하게 고민하던 카르미나가 말했다.

“그건 정순하고, 깨끗하기만 하면 상관없는 것인가?”

“글쎄... 양분으로 쓰는 모양이라니까, 형체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말이 양분이지, 사실상 비료 같은 느낌으로 이해한 상태라서 그렇게 말하자 음, 하고 카르미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건 어려운 일이구나. 몇 주 전이었더라면 여의 피를 얼마든지 내줬겠지만... 아.”

“아?”

갑자기 왜 그러나 싶었는데, 카르미나가 내게 말했다.

“마침, 아직 처녀가 있기는 하구나!”

처녀가 있다고?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카르미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가 알기로는 암무트도 여성체이기도하고, 남성과의 연을 맺은 적이 없으니 처녀일 것이다.”

“...암무트?”

갑자기 걔가 왜 나와?

아니, 그보다 암무트가 여자였어?

이 경우에는 암컷이라고 하는 게 맞는 건가?

뭐, 어쨌든.

“나와라, 암무트.”

내가 부르자, 퐁하고 튀어나온 암무트.

여느 때처럼, 새하얀 털을 가진 작은 고양이의 모습을 한 암무트가 되지도 않는 포효와 함께 외쳤다.

“나 죽음으로 심판하는 자, 암무트! 나의 주인의 부름에 응답하노라!”

“그거 나올 때마다 해야 하는 거야?”

애당초 더 이상 신성도 뭣도 안 남아서, 죽음으로 심판하는 자도 뭐도 아니게 되어서 내 소환수가 되어 버려놓고서.

“...시끄럽다, 나의 주인이여. 그래서 이번에는 무엇 때문에 불렀는가? 혹시... 또 저번처럼 나를 마구 쓰다듬으려고 부른 거라면... 음, 이번 한 번만 더 이해하지. 그대는 나의 주인이니.”

살랑살랑, 흰 꼬리를 흔들면서 그렇게 말하는 암무트를 보고서 내가 말했다.

“아니, 그거 때문에 부른 게 아니고.”

“...아닌 건가?”

“아냐.”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불렀지? 딱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지도 않아 보이는데.”

“그게 말이지, 일단 하나만 물어보자.”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답하마. 나의 주인이여.”

쭈욱, 하고 고개를 쳐들면서 냐앙, 하고 당당히 대답하는 암무트를 보고서 내가 물었다.

“너, 처녀야?”

내 얼굴에 암무트의 냥냥펀치가 날아온 건 그 직후였다.

아리아드에게 줄 대가 문제는 암무트의 협조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다.

비록 그 뒤에 제대로 삐쳐 버린 암무트가 피를 제공하고 나서는 다시 쏙 들어가더니 불러도 나오지 않게 되어 버렸지만.

이건 나중에 사과하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사과하고 싶어도 내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 암무트가 나오지 않으니까 사과할 수도 없고.

아무튼, 대가 문제도 해결되고 나니까 더 이상 문제가 될 것도 없어서 아리아드에게 수액을 받으러 다녀오는 것은 허락받을 수 있었다.

단순하게 아리아드에게 수액만 받고 오는 일이니까 나 혼자 후딱 다녀오겠다고 하니까 또 이런저런 말이 있었긴 했지만.

특히, 카르미나가 자기도 따라가고 싶다고 하는 걸 말리는 게 제일 힘들었다.

어쨌거나 수액 하나 받아 오는데 우르르 찾아가는 것도 그렇지 않냐는 말로 어떻게든 모두를 설득할 수 있었다.

뭐, 나 혼자 갔다 온다니까 걸리는 게 많은지 이것저것 주의를 듣기는 했지만.

아리아드와 함부로 약속하지 말라는 거나 어린 요정이나 정령들의 장난에 어울리지 말라거나, 가급적이면 아예 무시해 버리라는 것 등등.

릴리스나 호아란에게 잔뜩 주의를 받아버렸다.

어쨌거나.

“가자, 씽씽아.”

모처럼 씽씽이를 타고서 아리아드가 있는 드리아데스 식물원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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