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 허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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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잘은 모르겠지만 다들 아까처럼 저기압은 아니더라도 영 그래 보여서 무릎이라도 꿇을까 싶었는데, 그런 내게 릴리스가 말했다.
“한조, 너 아직 기프트 제대로 못 다루고 있지?”
“응? 어, 응.”
릴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 말대로였으니까.
내가 제대로 다루고 있는, 내 기프트 힘은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했다.
섹스를 통해서, 그래서 나를 사랑하고 있는 여자의 능력을, 그 여자의 종족이 가진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긴 했지만 사실 이쪽은 본래 내가 가지고 있던 기프트에 릴리스가 내게 걸었던 유사 레벨 드레인, 좆태창이 뒤섞이면서 변질해버린 능력의 일부였지, 그게 내 기프트가 가진 능력은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내 기프트의 능력은 그렇게 능력을 흡수하는 거 외에 어디까지나 나랑 한 이성에게서 호감을 사는 거나, 다소 신체 능력이 강화된다는 거나, 정신계의 이능에 강한 내성을 지니게 된다는 정도밖에는 몰랐다.
다른 것들...
사티나 릴리아나 그리고 조금 다른 경우긴 했지만, 아무튼 유스티티아의 몸에 새겨진 예속 각인이라던지는 대체 무슨 조건을 충족하면 새겨지는 건지 아직도 몰랐고.
그거 말고도 내가 어째서 그렇게나 다양한 종족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또 어째서 그렇게 습득한 능력을 자유자재로, 그것도 몇 개나 되는 능력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지도, 아직 유스티티아도 밝혀낸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나마 알고 있는 내 기프트가 가진 능력인 이성에게 호감을 산다는 것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
종족이나, 개인차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나랑 하게 된 여자가 나에게 호의를 갖게 되는 건 언제나 그랬었고, 그건 내가 어떻게 하지 못했던 거니까.
즉, 릴리스의 말처럼 나는 아직 내 기프트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는 셈이긴 했다.
경우가 조금 다르긴 해도, 기프트를 다루지 못하는 가장 친숙한 예시 중 하나인 ‘숨결’ 같은 경우처럼, 내 기프트 역시, 정작 그 주인인 내가 스스로가 조절하지 못하고 있는 기프트였으니까.
‘숨결’이 입만 벌리면 어떤 식으로든 ‘숨결’이 튀어 나가버리는 식이라 당장 그 기프트 소유자도 자기가 뿜어내는 물에 익사할 뻔했던 것처럼 조절이 안 된다면, 나도 딱히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나랑 하는 여자는, 결국 언젠가는 나에게 호의를 갖게 되거나 하는 식으로 조절이 안 되는 상황이긴 했다.
근데, 갑자기 이런 걸 왜 묻는 건가 싶었을 때, 릴리스가 나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일단 아리아드는 어쩔 수 없다고, 모두 그렇게 납득했어.”
“어... 괜찮아?”
“이 씨발놈아, 네가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해?”
그건 그렇긴 한데.
설마하니 릴리스에게 이렇게 순순히 허락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그랬다.
아무튼, 한동안 나를 째려보던 릴리스가 퍽, 하고 꼬리로 내 옆구리를 치고는 말했다.
“...전에 내가 한 경고에도 손을 댄 거 보면 그 녀석도 진심이었다는 거니까. 그리고, 우리가 아리아드를 아내로 삼는다는 걸 반대한다고 하면, 네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거야? 응?”
“그건...”
아니지.
분명 허락해줄 때까지 머리를 박고 있든 뭘 하든 해서 모두를 설득하려 하긴 했을 거긴 했다.
그런 나를 보던 릴리스가, 쿡쿡하고 꼬리로 내 이마를 찌르며 말했다.
“...봐, 당장 너도 그럴 생각이라곤 전혀 없었잖아? 그러니까 허락하는 거야. 어차피... 나도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설마하니 일주일만에... 그것도 처음이 아리아드일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지만.”
“아니, 잠깐만.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다니, 나 그렇게 신뢰가 없었어...?”
바람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조금 억울해서, 그렇게 말하자 나를 흘겨보던 릴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 릴리아나랑 염소년이랑 늑대년을 네가 내버려 뒀을 리가 없는데? 아니야?”
설마하니 릴리스가 먼저 그 셋의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라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합죽이가 되어버린 나를 본 릴리스가 말했다.
“적어도, 한 달은 눈치 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일주일이라... 넌, 진짜 언제나 내가 생각했던 거보다 빠르네. 여러 의미로.”
하아, 하고.
내가 어쩌다 이런 새끼한테... 그렇게 중얼거리는 릴리스 덕분에 더더욱 어깨를 움츠린 채 계속 닥치고 있었다.
“...뭐, 됐어. 그래서? 아리아드한테 얻은 능력은 뭐야?”
“아, 그거...”
여기선 좀 쓰기 힘든데.
릴리스의 말에 보여주고 싶어도, 딱히 식물이라곤 없는 우리 집에서 보여주긴 조금 곤란했다.
그때야 주변이 세계수로 가득했으니까 마음대로 능력을 쓸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얻은 능력은 식물의 생장과 조종이었지, 창조 같은 게 아니었다.
이미 있는 식물의 특징을 다소 바꿔서, 아리아드의 수액을 짜냈을 때처럼 착유기 형태로 ‘성장’시키는 것도 가능하긴 한데, 아예 없는 식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식물의 생장, 조종이라... 유스티티아, 뭐 있어?”
“으음, 어디 보자... 이런 건 있는데?”
쑤욱, 하고 아공간에서 유스티티아가 꺼낸 커다란 씨앗.
이게 뭔가 싶었는데, 그런 내게 유스티티아가 말했다.
“나무 몬스터의 일종인 플렌트... 뭐, 움직이는 식인 나무라고 봐도 좋은 거야. 일단 이것도 식물이니까, 한번 실험해볼래?”
“몬스터의 씨앗으로 실험하라고...?”
아니, 뭐.
딱히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 플렌트인지 뭔지하는 거가 뭔 짓을 해도 걱정할 사람은 없긴 한데.
“되려나...?”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 번 해보라니까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해봤더니 됐다.
쭈욱, 대충 3회 정도 사정할 분량의 체력이 빠져나가는 것과 함께 들고 있던 플렌트인지 뭔지하는 몬스터의 씨앗에서 싹이 움트는 것이 보였다.
꿈틀꿈틀, 내가 딱히 움직이게 하거나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움직이는 건, 플렌트인지 뭔지하는 몬스터라서 그런 걸까.
“아무튼, 이런 건데.”
대충 그런 플렌트를 이리저리 조종하면서 보여주자 헤에, 하고 눈을 빛내던 유스티티아가 말했다.
“혹시 더 빠르게 성장하게 하거나 할 수는 있어?”
“될 것 같은데.”
힘이야 들겠지만.
몬스터라길래 될까 안될까 긴가민가했는데 잘만 됐으니까, 그 정도야 아무 문제 없을 거다.
“흐응, 식물의 범주에 들어가는 거라면 전부 되는 거려나...? 그렇다면...”
“유스티티아. 그런 건 나중에 하고. 그거나 꺼내.”
그게 뭔데.
릴리스의 말에 유스티티아가 깜빡했다는 듯이 아차, 하고는 말했다.
“아아, 참. 그렇지... 자, 한조 이거 받아.”
“으응...?”
뭔데 이거.
유스티티아가 사슬로 된 목줄을 건네주길래, 받았다.
“...그래서 이게 뭔데?”
“네 기프트가 가진 힘, 이성에게 호감을 사는 능력을 봉인하는 봉인구.”
“응?”
봉인구라니...?
“봉인구라니, 그게 가능한 거였어?”
기프트 자체를 없애는 거야, 해당 부위를 뜯어내버리거나 하면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필이면 내 기프트의 발현 부위가 부위다 보니까, 릴리스도 못 했던 건데.
내 자지를 뽑을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그렇게 묻자 유스티티아가 대답했다.
“으응, 사실 봉인구라고는 했지만 힘을 봉인한다기보다는, 상쇄한다는 것에 가까울 거야. 많이 다르긴 하지만, 호감을 사게 하는 마법이나 주술 같은 건 많잖아? 매혹 같은 거. 당연히, 그 반대도 있거든... 미움 받게 하는 마법 같은 거.”
아.
“한조, 네 기프트가 가진 힘은 아직 잘 모르지만, 전에 한조가 나한테 줬던 사슬의 일부를 떼어내서 만들었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만들어봤어.”
그래서 사슬이었구나.
그때 그 사슬을 재료로 썼으니까.
“아니, 그보다... 갑자기 웬 봉인구인데?”
“그거야 또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되니까 그런 것이지 않느냐?”
또라니...?
호아란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릴리스도 그렇고 유스티티아도 그렇고 호아란까지.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런 내게 릴리스가 말했다.
“너, 디스펜서 일 다시 하라고.”
“으응...?”
뭘 하라고...?
“아니, 잠깐만... 내가 아는 그 디스펜서?”
“그럼, 다른 디스펜서도 있어?”
아니, 없기는 한데.
갑자기?
“나, 지부장은?”
“그걸 바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처음에는 견습... 뭐, 그런 거로 치고서 내가 옆에서 가르치려고 했었는데... 그보다, 그냥 그동안 디스펜서나 하고 있는 게 낫겠다 싶어서. 아니, 오히려 이쪽이 좋겠네... 새로 뽑기로 했던, 디스펜서 중에서 뽑을 지부장들은 다들 뛰어난 디스펜서들이니까 지부장으로만 굴리는 건 손해니까. 처음부터 디스펜서 출신들의 지부장은 디스펜서도 겸업으로 하는 게 맞겠어.”
아니, 일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매일 꿀 빨고 싶다, 은퇴하고 싶다고 하는 주제에 일은 또 열심히 하는 릴리스였다.
정말로 은퇴하고 싶어 하는 거 맞나...?
아무튼, 릴리스의 말은 대충 알겠다.
나보고 다시 디스펜서를 하라고 한 거니까, 그 간단한 것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근데, 왜?
말이 디스펜서를 계속하라는 거지, 사실상 다른 여자랑 섹스하는 걸 허락해준 셈이니까.
근데 정작 나만 당황했지 다들 어떻게 이야기가 끝난 건지, 그런 릴리스의 충격 발언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내가 인간이라서 이해가 안 되는 건가?
아내들의 공인 아래, 다른 여자랑 해도 된다고 허락받은 셈이긴 한데 기쁘기는커녕 엄청 얼떨떨했다.
섭섭하다고 해도 좋았다.
내가 다른 여자랑 섹스해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으니까.
그야 아내들에게 말도 안 하고 아리아드를 안고 돌아와서는, 아리아드도 아내로 삼겠다고 말해버린 내가 이러는데 좀 그렇긴 한데...
아무튼, 조금 그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인간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일단 생각을 재고하기로 했다.
이종족들은 전부 이런 걸 수도 있으니까.
여러 종족이, 여러 문화에서 살아가던 이들이 모여있다 보니까 이미 세계정부의 혼인제도는 결혼하고 싶으면 하든지 말든지 식의 자유혼인제도이기도 하고.
그래서 한 남자가 한 마을에 있는 라미아들과 모두 결혼했다던지, 수십 명의 남자와 결혼한 여자라든지하는 경우도 있고.
아무튼, 종족이 다르다 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비록 릴리스가 얼마 전까지는 처녀였지만, 서큐버스기도 하고.
구미호나 드래곤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딱히 남편이 다른 여자를 안는 것에 아무렇지 않다거나 그런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뭐, 이해해야지.
뭔가 좀 섭섭하기는 한데, 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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