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 땅 따먹기 (1)
* * *
이튿날, 아내들 덕분에 무사히 기운을 차린 나는 아침부터 곧장 사티가 있을 마트로 향했다.
내가 끼고 있던 반지나, 카루라가 싸준 도시락을 보며 울면서 떠나갔던 사티를 보고서, 그때는 미처 사티를 잡을 생각조차도 못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까, 굳이 잡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전에 릴리스가, 날 좋아한다는 여자가 있다면 그렇다면 어차피 무작정 품고 볼거냐고 말한 적이 있었을 때, 그때 뭐라 말은 못 했지만 사실 딱히 무조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무작정 나를 사랑하니까 내 아이를 가졌으니까, 그러니까 책임지고 보살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랬더라면, 일단 당장 뮤뮹뮤뭉부터 집으로 데려왔어야 했을 테니까.
하지만 정작 뮤뮹뮤뭉은 슬라임이라서 그런지 애당초 가족이라든지, 아버지라든지, 사랑이라든지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하고본인도 슬라임 퀸이라는, 슬라임 중에서도 고위 계층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런지 사는 걱정도 할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도 이따금 안부를 묻는 문자나 보내는 정도에 불과했다.
뮤뮹뮤뭉과는 반대로 내 아이를 임신했으면서, 동시에 나를 사랑해주고, 웨어허니비의 여왕인데도 내 곁에 있고 싶어 하는 릴리아나의 경우에는자주 연락하고는 했지만.
곧 있으면 출산할 예정이라고 해서, 그때도 시간을 내서 찾아가 볼 예정이었고.
어쨌거나, 내가 책임지고자 하는 여자들은 무작정 나를 사랑하거나, 내 아이를 가진 여자가 아니었다.
그쪽에서 그러길 바라는 여자들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티가... 아무리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한들, 그녀가 내 옆에 있고자 하지 않는다면굳이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근데.
왜 그러는지는 물어는 봤어야 했다.
어제처럼, 그냥 병신마냥 날 두고 사티가 그냥 가버리는 걸 지켜보는 게 아니라.
어째서인지 이유라도 물어봤어야 했다.
“어디에 있으려나.”
일단 무작정 아침부터 들이닥치긴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사티가 언제부터 일하는지도 몰랐다.
연락처도 따로 없어서, 그래서 하염없이 마트를 돌아다니며 분홍 머리의 사티로스를 찾고 있는데.
“...왜 없어.”
식품 코너를 전부 돌았는데도 사티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건가...
매번, 점심 무렵에나 왔었으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일단 출근부터 하고서, 디스펜서 일이나 하고서 다시 올까 싶었는데 눈에 띈 사람이 있었다.
짧막한 팔다리를 열심히 놀리며 아침부터 분주히 물건을 진열중인 하플링이, 전에 사티의 면접 때도 본 적이 있던 마트의 점장이 보였으니까.
마침 잘됐다 싶어서, 그런 하플링에게 다가갔다.
“저기, 사람을 좀 찾고 있는데요.”
“어...”
나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 하플링 점장.
짧막한 팔다리를 가진, 인간의 기준으로 채 절반도 안 되는 체구와 같이 하플링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인, 다른 종족에 비해서 어려보이는 외모를 가진 하플링인 점장이 그러니까 좀 귀여웠다.
키가 작은, 소인 분류에 들어가는 다른 종족인 드워프라던지는 체구만 작을 뿐이지 그 외에는 평범하다고 해야 하나, 털이 많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데, 하플링은 그에 비해서 통통한 인형 비슷한 인상을 갖고 있는 편이었으니까.
귀엽다는 거지, 인간인 내가 보기엔 너무 어려 보일 뿐이었지만.
어쨌든 나를 기억하고 있는 눈치인 하플링 점장을 보고서 말했다.
“혹시 사티 어디 있는지 아세요?”
“어, 그게... 사티양은... 어제, 그...”
떠듬떠듬, 말을 잇지 못하는 하플링 점장을 보고서 왜 저러나 싶었는데, 곧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잘랐는데용...”
“아니, 씹.”
뭘 했다고?
“아니, 어제까진 멀쩡히 잘 일하던 애를 왜 잘라?”
“히, 히익...! 그, 그게용...”
하플링 점장의 설명을 듣고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랑 사티랑 헤어지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사티에게 사티로스라는 이유로 성희롱을 했던 손놈 새끼들이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물건 사줄 테니까, 한 번쯤 대달라는 식으로.
사티로스니까, 물건도 팔고 좆맛도 보고 좋지 않으냐고 시시덕거리며 시비를 걸어온 손놈들을 무시로 일관하던 사티에게빡이라도 쳤는지 손놈 새끼들이 손찌검을 하려고 했는데.
사티로스라는 종족이, 변태로 너무 유명해서 그런지 그 새끼들이 잠깐 까먹었나 보다.
사티로스가 세계 정부에 소속된 모든 종족들을 통틀어서, 종족 평균에서 상당히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상위 종족이란 것을.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신체 능력에 어지간한 마법들은 잘만 써대는, 인간이랑 비교하면 태어날 때부터 마법사로서도 전사로서도 타고난,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셈인 종족이 사티로스라는 것을.
더욱이, 하필이면 별로 기분도 좋지 않았던 사티였고.
결국 일을 내버린 거다.
폭력을 행사하려던 손놈들을 역으로 사티가 두들겨 패버렸으니까.
“아니, 그렇다고 왜 잘라.”
“보, 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용... 사티양이 잘못한 건... 없다는 건 저도 알지만... 그래두... 어쩔 수 없었어용...”
동네 장사하는 마트 점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아서, 울먹이며 그렇게 말하는 하플링 점장의 말에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유야 어쨌건, 마트 직원이 손님을 후려 패버린 거니까.
마트 직원과 손님이라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그냥 흔하디 흔한 사건사고 중 하나로 끝났고 말았을 테지만, 마트 직원이랑 손님이라서 일이 커진 거다.
하플링 점장이, 사티를 잘라버린 이유도 알 것 같아서 한숨을 내쉰 내가 말했다.
“...그럼, 혹시 사티 연락처는 아세요?”
내 물음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마트 점장이 말했다.
“그, 그게... 몰라용...”
“아니... 그럼, 사는 곳은요?”
“마트에 있는, 숙식실을 빌려주고 있었던 지라...”
길거리를 전전하던 사티가 대체 어디서 살고 있었는지 몰랐는데, 이 점장이 호의로 마트 안에 있는 숙직실에서 지내게 해줬었던 모양이었다.
그 덕분에 사티야 어차피 마트에서 사는 셈이니까, 연락처도 딱히 필요 없어서 점장인 주제에 직원의 연락처도 몰랐던 모양이고.
“애...”
입 밖으로 나오려던 욕설을 삼켰다.
나를 올려다보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하플링 점장이 보였으니까.
“...알겠어요. 고마워요.”
그래서,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돌려서 마트를 나왔다.
“씨발.”
그리고, 그제야 참고 있던 욕설을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다.
최소한 연락처라도 받아뒀어야 했는데.
“진짜, 씨발.”
정직원이 되고서, 유니폼을 받았다며 자랑스레 말했던 사티가 떠올라서 한층 더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를 사티를 어떤 수로 찾아야 할지 막막해서 더더욱.
고민 끝에.
릴리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뭔데? 무슨 일 있어?
오늘은 출근하는 날이지만, 사티에게 들를 겸 일찍 집을 나선 나랑 달리 아직 집에 있던 릴리스가 전화를 받고는 그렇게 물어왔다.
뭔가 막상 입을 열려니까 잘 안 떨어지는데.
뭐야, 전화 걸어 놓고 왜 말을 안 해?
재차, 그렇게 묻는 릴리스의 말에 내가 말했다.
“혹시, 릴리스. 사티 전화번호 알아?”
......
하아, 하고 스마트폰 너머로 들려오는 릴리스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죽상이었던 이유가, 그 염소년 때문이었구나?
“응, 뭐...”
일단, 말해두는 거지만. 나도 몰라. 그쪽에서는 내 전화... 아니네, 뮤리 전화번호는 알겠지만. 그래도, 딱히 걔한테 연락을 받았던 적도 없었으니까... 아마 뮤리도 모를 걸.
전에 사티가 릴리스가 자길 찾아왔었다고 했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혹시나 했는데, 릴리스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래... 혹시, 릴리스.”
...일단, 내 쪽에서도 찾아봐 줄게. 근데, 너 말이야. 이런 걸 나한테 부탁하는 거 너무 하다고는 생각 안 해?
“미안.”
할 말이 없네.
“진짜로, 미안.”
재차 사과하자, 다시 한숨을 내뱉은 릴리스가 말했다.
...됐어. 조금만 기다려.
이윽고, 릴리스가 다시금 내게 말했다.
...없는데? 최소한, 이 도시 안에는 없어.
“뭐...?”
아니, 그새 어디로 간 거야.
뭣하면, 더 넓혀서 찾아줄까?
그렇게 묻는 릴리스의 말에, 고민 끝에 말했다.
“아니... 그건 됐어.”
릴리스가 전력을 다한다면, 그러니까 몸에 걸고 있는 봉인을 풀어서 사티를 찾고자 한다면 어지간해서는 사티를 금방 찾을 수는 있을 거다.
근데, 이런 일에 릴리스가 거기까지 해주는 건 좀 그랬다.
더욱이, 봉인을 푸는 것도 릴리스로서 상당한 부담인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어쩌려고?
“일단, 내가 알아서 찾아볼게.”
네가?
“응, 뭐. 해봐야지.”
...그래, 뭐 알겠어.
“고마워. 릴리스. 사랑해.”
...시끄러워. 사랑한다는 새끼가, 다른 여자나 찾아 달라고 부탁해?
“그건 진짜 미안.”
흥. 알면 됐네요.
그렇게 말하고서, 툭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릴리스에, 쓴웃음을 짓고는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뭐, 더 있나 머리를 굴려보다가 떠오른 게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사티를 찾을 방법이 아직 딱 하나 남아 있긴 했다.
될지 안 될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안 해보는 것보단, 또 어제처럼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스으으으으...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가느다란 실들.
나와 연결되어있는, 실들이 보였다.
몇 가닥은, 같은 곳으로 향하고 있고 또 몇 가닥은 제각각 다른 곳으로 향해져 있는 실들이.
같은 방향으로 있는 다섯 가닥의 실들은, 지금 집에 있는 아내들과 연결되어있는 실들이 분명했다.
또 제각각으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는 실 중에서 둘은 릴리아나랑 에일레야일거고.
내게로 곧장 이어진 두 실들은, 호아랑 암무트였다.
남은 하나.
가느다란, 그리고 멀리도 뻗어져 있는 실을 손에 쥐었다.
“이게, 사티네.”
여전히 나와 연결되어있는 가느다란 실.
사티와 나 사이에 이어져 있는 연결을 손으로 짚어서 기운을 실어 보냈다.
내 기를 실어서, 그대로 사티가 있는 곳까지 뻗어 보내봤다.
“멀리도 갔네.”
릴리스의 말대로 그새 이 도시 밖으로 나간 것이 맞는지 한참을 기를 뻗쳐 보내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실을 타고 쭉, 쭉 뻗어나가는 내 기운이 한참을 그렇게 뻗어나가도 도무지 끝에 닿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다가 결국 한계가 찾아왔다.
내 기로는, 이 이상의 추적은 무리였다.
“...진짜 존나 멀리도 갔네.”
정확하게 가늠할 순 없었지만, 도시 한두 개 정도는 될 만큼 떨어진 곳에 있는 모양인데.
바로 어제 잘린 사티가 벌써 이만치 멀어진 걸 보니, 마트에서 잘리자마자 뭘 타고서 훌쩍 가버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대충 어디로 갔는지는 알게 됐으니까, 이대로 사티를 쫓는 건 문제가 없을 거다. 나랑 연결되어있는 이상, 아무리 떨어져 있더라도 추적할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찾는 건 시간문제일거고.
근데 그러기엔 이미 오늘도 꽉 차있는 예약이 마음에 걸렸다.
사티도 중요하지만, 이쪽도 중요하니까.
좀 가까우면 모를까, 뻗쳐 보냈던 내 기가 나아갔던 거리를 감안하면 최소한 오늘 잡힌 예약은 죄다 취소해야 할 판이었다.
“...캔슬하자.”
잡혀있는 예약과 사티,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따지자면 사티쪽이다.
오늘 예약한 고객들은, 딱히 단골들도 아니었고.
고객들과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는 주제에, 그런 주제에 도망치듯이 떠나가버린 사티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묻는다면, 당연히 사티라고 대답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다시 스마트폰을 꺼내서 오늘 예약해줬던 고객들에게 죄송하다고, 캔슬한다는 문자를 보내려고 했는데.
우웅...!
보낼 문자를 적고 있을 때, 전화가 와버렸다.
“...아니, 진짜 뭔 날인가.”
급한 와중에 온 전화라서 그냥 끊어버릴까 했는데, 기다리고 있었던 전화라고 해야 할까, 스마트폰 가운데 떡하니 보이는 남궁무휼이란 이름을 보고서 일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한조님 전화 맞으십니까?
“네, 맞아요.”
아, 이른 시간부터 죄송합니다만, 남궁무휼입니다.
나도 안다.
아니까, 용건이나 빨리 말해줬으면 좋겠다.
“네, 그래서요? 무슨 일 있나요?”
실은, 저번에 말씀하셨던 일로 전화를 드렸습니다만... 혹시 지금 만날 수 있습니까?
“...만나자고요? 지금요?”
네, 혹시 안되신다면... 음, 곤란하겠군요.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은 터라...
“...아뇨, 돼요.”
사티와 아내들 둘 중 누가 더 중요하냐면 당연히 아내들 쪽이었다. 그리고 남궁무휼의 건은 그런 아내 중 하나인 아리아드와도 관련된 일이었다.
아리아드에게 받은 세계수의 씨앗을 심을 땅을,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땅에 관한 일이었으니까.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가면 될까요?”
아뇨,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직접 가지요. 약속 장소는... 혹시, 그쪽에 하피가 하는 카페 아십니까? 유명한 곳인데...
얼마나 유명한 거야 거기.
하긴, 하피가 커피를 직접 볶아서 커피를 내린다는데 유명할만은 한데.
“...네, 알아요. 그럼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전화를 끊고서,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움켜쥐었다.
“...캔슬해야 하는 건 변함없네.”
한숨을 내쉬고, 오늘 예약해둔 고객들에게 문자나 보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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