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화 〉 땅 따먹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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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내가 그렇게 말하자 카르미나가 말했다.
“그러니 그 땅을 개척한 자가 있다면 대부분의 땅은 그에게 그냥 주는 것이 보통이다. 나라에서 가져오는 2할정도의 땅은... 나라와 그 땅 사이의 가도로 쓰기 위하여, 나라가 가져가는 것이 옳은 일이노라.”
그러면 길을 사용하는 대가로, 세금을 거둘 수 있고 백성들이 살아갈 땅 또한 늘어나니 나라의 이득이지, 하고 말하는 카르미나.
오랜만에 보는 카르미나의 파라오 모드라서 조금 기분이 묘했다.
그런 내 시선에 카르미나도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살짝 무안한 듯 큼,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나라의 주관으로, 오롯하게 나라의 힘만으로 개척하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이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백성의 힘을 빌려서 이루려 하는 개척이니, 여기에 나라가 그 땅의 절반을 가져가는 것은 과한 것이라고 보는데, 여가 틀렸는가? 릴리스?”
“아니, 네 말대로야. 카르미나, 쟤들이 욕심이 과한 거 맞아. 그것도, 아주 과하게.”
그런 카르미나의 말을 듣고 보니, 호아란이 인상을 찌푸린 이유나 릴리스가 이까지 빠득빠득 갈아 댄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누가 이런 조건을 달자고 한지는 알 것 같네. 그 욕심 많은 고블린 같으니라고... 돈 관리 잘한다고 그 자리에 앉혀두는 게 아니었는데. 예산은 더럽게 안 떼어주면서, 돈 욕심은 더럽게 부리는 새끼.”
투덜거리는 릴리스를 보니까 이번 일을 이런 식으로 조정한 윗쪽... 세계 정부의 의원 쪽에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나야 알고 있는 세계 정부의 의원이라곤 남궁무휼 밖에는 없지만, 릴리스나 호아란, 유스티티아 경우에는 세계 정부를 설립한 스물 둘의 영웅이니까, 비교적 교체가 잦은 인간쪽의 의원은 몰라도 의원 자리에 앉은 이래로 딱히 바뀌거나 하지 않았던 다른 이종족들 쪽 의원은 알고 있는 게 당연하긴 했다.
아무튼, 굳이 이번 일만이 아니라 디스펜서 관련 쪽으로도 맺힌 것이 많은지 구시렁거리는 릴리스를 보고 있을 때 호아란이 말했다.
“거기에 땅을 나누는 주체가 세계 정부인 것도 문제이니라. 최소한 정화한 땅의 권리의 절반도 아닌 것은 무척이나 마음에 걸리는구나.”
“그래요? 대체 왜... 아.”
호아란의 말에 왜 그런가 싶었다가, 이내 금방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땅이라고 다 같은 땅이 아니었다.
흔히 노른자 땅이라고 부르는 땅이 있었으니까.
생각해보니까, 진짜 많이 불리하기는 하네.
기껏 열심히 땅을 정화해놨더니 그걸 세계 정부측에서 죄다 가져가고는 어디 구석탱이에 도무지 쓸 수가 없을 땅을 네 몫의 땅이라고 준다면 존나 억울할 것 같았다.
어차피 필요한 거야, 아리아드가 내 곁에 있을 수 있도록 할 수 있게... 아리아드에게 받은 세계수의 씨앗을 심을 땅이기는 해도 기왕이면 좋은 위치였으면 하는 마음도 있으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대뜸 내게 릴리스가 말했다.
“야, 한조. 그 남궁무휼이란 애한테 전화 걸어.”
갑작스러운 릴리스의 말에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지금?”
“지금.”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늦은 시간 아닌가? 갑자기 걸라고 하면...”
“전화 걸라니까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걸라니까 걸었다.
안 걸면 좆될 것 같기도 했고.
...네, 전화 받았습니다. 강한조님?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를...
“어, 그게요.”
스르르륵, 하고.
눈앞에서 릴리스가 꼬리로 허공에 새기기 시작한 글자들이 보였다.
[내가 말하는 대로, 따라서 말해.]
그렇게 적혀져 있는 글자를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조님?
“실은, 아까 말씀하셨던 정화 사업 쪽으로 물어볼 것이 있어서 전화했는데요.”
사업 쪽... 네, 일단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답변해드리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그럼...”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쪽 방향으로 사업 계획서를 수정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 네...”
뭐지.
릴리스가 말하는 대로 그냥 말했을 뿐인데, 그 자리에서 뭔가 많이 바뀌었다.
아까 아내들이 말했던 대로, 정화한 땅의 절반은 그 땅을 정화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정부측에서도 나머지 절반의 땅을 거저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는 걸로 바뀐 데다가 참가자들이 해당 사업에서 소모하는 일반적인 경비들의 일체도 세계 정부에서 지급하는 걸로 바뀌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나 개인에 대한 혜택도 더 주어졌다.
이번 일에 단순히 ‘참여할 권리’랑 세계 정부측에서 헌터 클랜을 하나 고용해주는 것이 이전의 대가였다면 내 쪽에서 정화한 땅의 절반을 세계 정부에서 가져갈 때 치르는 대가가 남들보다 거의 두 배 수준으로 많아졌다고 해야 하나...
처음에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계획을 변경하기는 힘들다고, 앓는 소리를 하던 남궁무휼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쩔쩔매기 시작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어버린 것을 보고서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싶었다.
그리고 이게 전부 꼬리로 내가 해야 할 말을 적어준 릴리스의 덕분이란 것도 뭔가 믿기지 않았고.
그냥 릴리스가 말하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된 거지.
결국 말한건 나였는데,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굉장하다는 것만은 알겠다.
릴리스 굉장해.
당장 나라를 하나 일구고 있던 카르미나조차도 옆에서 오오, 하고 감탄하는 얼굴로 릴리스를 보고 있었고.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닌 것 같으니 확실히 릴리스가 대단한 게 맞았다.
아무튼, 이걸로 된 건가 싶었는데 여전히 릴리스의 꼬리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냥 그대로 남궁무휼에게 전해줬다.
“아, 그리고. 남궁무휼씨?”
네, 네...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요...”
저게 대체 뭔 소리지, 싶었지만 릴리스가 적어준 대로 남궁무휼에게 말했다.
“여우가 호랑이를 잡아먹으러 오는 게 싫으면, 처신 잘하시라고요.”
네? 네? 저기, 한조님? 그게 대체 무슨 의미...
릴리스가 끊으라고 해서 끊었다.
세계 정부의 의원을 상대로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는데, 뭔가 후련해보이는 릴리스의 표정을 보니까 아무래도 좋아졌다.
“근데, 릴리스. 방금 그건 무슨 뜻이야?”
여우가 호랑이를 어떻게 잡아먹는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가서 그렇게 물었는데, 뭐긴 뭐야하고 릴리스가 호아란을 보며 말했다.
“저쪽에서, 이번 일을 벌인 것도 거진 호아란, 쟤만 믿고서 그러는 거잖아? 다른 곳의 정화는 눈가림용이나, 그냥 하는 시늉만 할 거고 주력은 평양 일대랑... 그게 아니면 그 위쪽까지 전부 정화하는 것이 목적이겠지. 계획 전반 자체가 너... 정확히는, 너에게 협조해줄 호아란을 포함한 계획일 거고.”
“어, 그래?”
“애초에 쉽게 쉽게 할 수 있는 거라면, 얘네들이 진작 지네끼리 알아서 했겠지. 여태 못한 이유는 못하니까 못한 거야. 평양만해도, 세계 정부에서 자력으로만 정화하려고 하면... 예산도 예산이지만, 최소한 오십 년은 걸릴 일이니까.”
그것도 그렇네.
그러고 보니, 사흉이 개판을 쳐놓은 사천 땅은 거기에 뿌려진 독기를 정화하는 데만 백 년은 훌쩍 걸릴 거라고 호아란이랑 릴리스가 말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아무튼, 그런 주제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대니까... 선 넘지 말라고 경고한 거지. 너무 까불면 호아란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호가호위였던가 거기에 빗대어서 릴리스가 남궁무휼에게 경고한 거라는 걸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호랑이인 세계 정부가, 여우인 호아란의 위세를 빌린 거니까 내가 알고 있던 사자성어랑은 좀 다르긴 한데.
우리 집 여우가, 확실히 호랑이도 잡아먹을 만큼 강한 여우기는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 이름을 너무 멋대로 쓰는 것이 아니냐? 릴리스.”
“우리 사이에 뭐 어때? 거기에 쟤들이 한조랑 너를 아주 호구로 보는데 기분 안 나빠?”
릴리스가 그렇게 말하자, 으음... 하고 침음을 삼키는 호아란을 보였다.
“...뭐, 확실히 이번 만큼은 그 아이들이 잘못한 것이니 넘어가마. 만약 그대로 일을 벌이려고 했더라면, 다른 아이들에게도 반발이 심했을 터이니. 어쩔 수 없겠구나.”
결국, 호아란도 릴리스의 말대로 그냥 넘어가기로 한 모양이었지만.
“어쨌든, 이제 다 된 거야?”
한껏 남궁무휼의 머리가 더 벗겨질 만한 스트레스를 안겨준 릴리스가 개운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 그렇게 묻자, 기분 좋다는 듯이 꼬리를 살랑거리던 릴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그거고, 너한테 쟤들이 개수작 부리려고 했던 건 따로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따로...? 대체 뭘 하려고?”
“너한테 주어진... 10명까지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아무나 참가시켜도 된다는 권리, 일단 우리를 제외한다고 쳐도 다섯은 남잖아?”
“그런데?”
“일단, 그거 넷은 적당히 비싼 값을 불러서 팔아넘기는 걸로 하고... 하나는, 걔 불러서 한 번 말해봐.”
파는 거야 알겠는데, 걔가 대체 누구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런 나를 보고는 릴리스가 말했다.
“릴리아나 말이야, 걔만 불러도 저쪽에선 머리 장난 아니게 아플걸. 거기에 거절하기도 힘들 거고. 이미 너한테 주기로 한 권리기도 하고... 이미 그쪽 입장에선 경고도 들은 만큼 호아란이 걸릴 테니까. 릴리아나만 협력해도... 응, 노동력은 충분하겠네. 자질구레한 것들은 웨어허니비들을 시키면 될 테니까. 어차피 걔들이야 한조 네 말이면 무조건 따를 거고.”
“아아.”
어... 근데, 그래도 되는 건가?
내가 보증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나 참가 시켜도 되는 권리를 받긴 했어도, 그걸 세계 정부의 공인을 받고 있는 자치국의 여왕인 릴리아나에게 줘도 되나...?
“꼬우면 처음부터 장난질을 치질 말았어야지.”
흥, 하고 코웃음치는 릴리스를 보고서 그냥 하라는 대로 하기로 했다.
“만약 여의 나라에 릴리스 같은 인재가 있었더라면 여는 분명 재상을 시켰을 것이다. 조금... 다루는 게 어렵긴 했을 것 같지만 말이다.”
조금 다루는 게 어려운 거로 끝날 것 같지는 않은데.
아마 릴리스 같은 사람이 나르메르 왕국의 재상으로 있었으면, 수틀리면 파라오를 갈아 치우려고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뭔 일만 있으면 축제를 열려고 하던 카르미나의 뚝배기를 부수려고는 했었을 거다.
하지만, 카르미나의 말에 공감하는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번의 릴리스가 엄청나게 든든했던 건 사실이고.
“역시 릴리스야, 믿고 있었다고.”
“...시끄러워.”
왜 칭찬해줘도 화내고 난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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