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 각성 (1)
* * *
“...할 거 없네.”
대부분의 일들은 전부 은빛 늑대단이나 웨어허니비들이 알아서 해주고 있고, 정화 쪽도 호아란과 카르미나가 열심히 하고 있어서 나는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정화 쪽엔 재주가 없는 릴리스랑 카루라는 요 주변에 좀비들을 정리하느라 바쁜 모양이었고, 평소에 잠만 자며 시간을 보내던 유스티티아도 요즘은... 전에 보지털 콘테스트를 하느라 잔뜩 생겨버린 보지털을 가지고서 내 아티펙트인 천호의 갑주와 용 발톱을 강화하느라 바빴다.
처음에는 무슨 보지털로 아티펙트를 강화하는가 싶었지만...
애시당초 ‘천호의 갑주’부터 호아란의 꼬리털에 자신의 비늘을 섞어 만든 아티펙트였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유스티티아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꼬리털이나 보지털이나 같은 털인데, 확실히 무슨 차이가 있는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두 아티펙트를 만드는 것도 3일만에 뚝딱했던 유스티티아가 웬일로 며칠이고 그것만 붙잡고 있어서 대체 뭘 하는 건지 궁금했다.
궁금한데, 유스티티아가 비밀이라고 안 알려줘서 좀 슬펐다.
“그나저나, 진짜 빠르네.”
여전히 존나 멀었지만, 그래도 보랏빛의 질척질척했던 점액으로 가득했던 땅이 요 며칠 사이에 많이 줄어든 것이 보였다.
줄어들기만 했지 아직도 썩은 내가 진동하기는 했지만 처음 왔을 때랑 비교하면 엄청나게 나아졌다고 해야 하나...
호아란의 말로는, 이대로 한 일주일 정도만 더 정화하면 아리아드가 준 세계수의 씨앗을 심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 뒤에는, 애당초 주변을 정화하는 성질을 가진 세계수를 자라게 해서, 그걸 매개로 해서 이 주변에 대대적인 정화 결계를 세운다는 것이 호아란와 카르미나의 계획인 모양이었다.
이 땅에 내려진 저주와 원망의 주박을 끊고, 거기에 매여있는 혼령들을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나는 머리가 아파서 둘의 해주는 설명을 이해하는 것은 포기했다.
그냥 평범한 주술사나 마법사라면 몇십 년은 정화만 해야 할 땅을, 수 개월도 안 걸리고서 정화할 수 있다는 것만 알아들었으면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정화 쪽은 앞으로도 계속 몇 개월 정도는 해야 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일주일 뒤면 아리아드를 볼 수 있을 거라는 말에 무척이나 기대됐다.
조금 걱정되기도 하고.
그때부턴 의무방어전이 지금보다 더 치열해질 거니까.
그래도...
걱정보다는, 아리아드를 볼 수 있다는 쪽이 더 기뻤으니까 상관없었다.
“심심한데.”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요 며칠 동안은 진짜 의무방어전 외에는 하는 게 없어서 진짜 심심했다.
두 아티펙트를 유스티티아가 강화한다면서 가져가 버린 이상, 나는 아무리 기프트를 발현한 상태라고 해도 쪼금 강한 수준... 릴리스의 말로는 에일레야랑 비슷한 수준에 불과한 모양이고.
물론 에일레야가 약하다는 건 아니었다.
B랭크 수준의 헌터가 어디서 약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인 건 아니니까.
불과 수개월전의 나에게 있어서는 은빛 늑대단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C급 헌터만 해도 대단한 사람들이었고, 그보다 한단계 윗단계인 B랭크는, 사실 종족과 별개로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초인이었다.
당장 에일레야도 잘만 좀비들을 때려잡고 있고, 헤카톤케이레스급도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릴 뿐이지 에일레야 혼자서도 어떻게 잡을 수는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 수준의 에일레야랑 비슷하다고 했으니까, 적어도 내가 어디서 약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근데 고작 그 정도 수준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고 해서, 은빛 늑대단이나 웨어허니비들을 도와서 주변을 정리하거나 하는 것도 못하게 해서 존나 심심했다.
“내 몸은 어느 정도 지킬 정도는 되는데...”
예전에 비하면, 나도 제법하지 않나 싶은데 하지 말라니까 하지 않기로 했다.
다들 만류하는 이유야, 내 걱정하는 거때문인 것도 잘 알고 있고.
심심해도 참아야지 뭐.
그 대신에, 요즘 하는 것이 있었다.
‘암무트. 그만 삐져 있고 나랑 말 좀 하자. 나 심심해.’
그건, 아직도 삐져있는 암무트를 귀찮게 구는 것이었다.
여전히 전혀 대답은 안 해줬지만, 내가 말을 걸 때마다 안쪽에서 반응은 있었으니까.
‘어떻게 만년이 넘게 살면서 처녀로 있었냐고 놀려서 미안하다니까. 만 년 동안 처녀일 수도 있는 건데, 내가 전부 사과할 테니까 좀 나와주라.’
쁘득, 하고 안쪽에서 암무트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튼, 오늘도 일일 퀘스트인 셈 치고 있는 삐진 암무트에게서 반응 얻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할 게 없어서 이런 걸로 심심풀이나 하고 있다는 게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심심했으니까.
사실 뭔 일이 생기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심심해서 애꿎은 암무트나 괴롭히고 있는 쪽이 낫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심심한 건 심심한 거였다.
그때, 우웅하고 뒷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뭐지.”
송신탑이고 뭐고 죄다 없어서, 전화도 안 터지는 곳에서 뭔가 싶었는데, 우웅, 하고 계속해서 울리길래 꺼내보니 첫날에 정기 연락용으로 받았던 아티펙트였다.
“아... 오늘인가?”
일주일에 한 번씩 연락이 갈 거라고 들었었던 기억이 났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나버렸구나.
새삼 시간 진짜 빠르다고 생각하면서, 대충 전에 들었던 설명대로 아티펙트를 발동시키자, 아티펙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이쪽은 정화 작전의 중앙 본부 소속의 마법사, 한유진이라고 합니다. 연락받으신 분이... 에... 강한조씨...?
“한유진씨?”
네, 네... 맞습니다...
익숙한 목소리다 싶었는데, 한유진이었다.
이 사람이랑 왜 이렇게 자주 인연이 생기는 거지.
뭐, 모르는 사람보다는 나으려나 싶었다.
“소속이 자주 바뀌네요?”
아무튼, 내가 그렇게 묻자 그쪽에서 잠깐 어수선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한유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 아아... 네... 마법사들이...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서... 가용 가능한 인원들은 전부 이번 일에 차출된 참입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마법사인데도 공무원이라서 존나 빡세게 구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번의 나르메르 왕국 때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별 별 일에 다 끌려와서 갈리고 있는 한유진에게 살짝 동정심이 들려고 했다.
거기에 이번 일에, 제... 음, 선배님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그런 분들도 오신 참이라서.
“선배요?”
네, 상아탑의 마녀들이라고... 비록, 지금은 탑에서 나와서, 세계 정부에서 일하고 있지만, 한때 제가 적을 두던 마탑의 선배들께서도 이번 일에 참여하셨다고 들어서... 저도 이런저런 이유로 끼게 되었습니다.
“아, 그...”
가슴 존나 큰 누나들, 하고 말할 뻔한 걸 간신히 입 밖에 내지 않고 참았다.
생각해보니까, 그때 그 누나들 차림새가 워낙 눈에 들어오던 가슴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지만, 전에 한유진이 입었던 마녀 차림의 복장이랑 비슷했던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그때 그 누나들이랑 비교하면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한유진도 거유인 편이었지...?
뭐지.
마법사들은 다 그런 건가?
그러고 보니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심장 쪽에 서클이란 걸 만들어서 마나를 저장한다고 들었는데.
그거 때문에 가슴이 커지거나 그러는 건가?
그게 아니면, 하나같이 전부 가슴이 클 수가 없는데.
가슴 크기로 뽑는 것도 아닐 테고.
당장 마법의 종주라고 불리는 드래곤인 유스티티아도, 아리아드나 카르미나 다음으로 가슴이 큰 편인 걸 보니까 왠지 신빙성이 높아지려고 했다.
사실 그 셋 중에서 제일 키가 작은 유스티티아였으니까, 그걸 감안한다면 제일 거유기도 하고.
단순히 마나를... 그러니까, 기나, 내공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을 다른 식으로 저장하거나, 다루는 주술사나 무인쪽을 보면 딱히 눈에 띄게 가슴이 크거나 한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던 걸 보니까, 정말로 심장 쪽에 저장한 것이 거유인 것에 영향을 끼치는 걸지도 몰랐다.
그냥 체질이고, 우연에 불과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뭐지.
진짜 마법사하면 가슴이 커지고 그러는 건가?
한조씨?
“아아, 네. 죄송해요.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네, 일단 확인차입니다만... 지금 위치의 좌표를 알 수 있겠습니까?
“아, 네. 잠시만요.”
대충 아티펙트를 꺼내서 이쪽의 좌표를 알려주자,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지금 거기에 계신 겁니까? 하지만... 거긴...
“좀 깊이 들어오긴 했죠?”
...그쪽이라면 좀비들의 대부분이 헤카톤케이레스급일텐데... 아, 아니... 한조씨라면... 네, 별문제가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닌데.
나도 과보호라고는 생각하지만, 그 헤카톤케이레스급의 좀비들이랑 드잡이하다가 혹시 모를 일이 생길까 봐 그냥 얌전히 제일 안전한 곳에 처박혀있으라는 아내들 덕분에, 심심해서 미쳐 돌아가고 있는 상태인데.
나를 너무 보호하려 드는 아내들이랑 반대로,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한유진이었다.
무슨 내 능력이면 여기까지 온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행입니다. 벌써 연락이 닿지 않는 팀이 몇이나 있어서...
“그래요?”
네... 선배님들도 그렇고, 이번에 참가한 유일한 S랭크의 헌터이신 가오르그씨도 그렇고, 아... 사티로스로만 이루어졌던 팀쪽도, 아직 연락이 닿지 않고 있거든요. 아직 시간이 남아있긴 합니다만...
S랭크의 헌터라면, 그 하프 트롤 전사 말하는 거지?
이번 정화 일에 참가한 유일한 S랭크라고 웅성대길래 한 번 본적이 있었다.
키가 3M쯤 되는데다가, 그런 키만한 존나 큰 대검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라 인상이 깊게 남기도 했고.
아니, 잠깐만...
“사티로스요? 사티로스 파티쪽에서도 연락이 없다고요?”
네? 네... 이번에 열 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파티로 참가한 팀인데... 혹시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아뇨.”
딱히 아는 건 없었다.
그때 사티를 보긴 했지만, 우리야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여기까지 곧장 달렸고. 사티가 있던 파티는 우리랑 정 반대쪽으로 향했었으니까.
사티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것과 별개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버린 사티라서, 말을 붙일 기회도 없었다.
...근데, 연락이 안된다라.
뭔가 좀 많이 꺼림칙한데.
“...음, 죄송한데 한유진씨? 혹시 그쪽 팀에서 오늘 안에 연락이 안 닿으면, 저한테 소식 좀 알려주실 수 있겠어요? 아, 아니지... 혹시 가능하시다면... 그쪽으로 사람 좀 보내서 확인 좀 해주실 수 있겠어요?”
...으음, 네. 뭐... 그 정도는 가능하지만... 혹시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그쪽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아는 사람... 사티로스 중에... 아...
내 직업인 디스펜서를 알아서 그런지, 도중에 말문이 막힌 듯 조용해진 한유진이 이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네... 그럼... 사람을 보내서... 확인 후에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별일 없을 거다.
한유진의 반응만 봐도, 우리처럼 깊숙하게 온 경우는 별로 없거나 아예 없는 모양이고.
얕은 곳의 좀비들이야 숫자만 많았지 C급 헌터들인 은빛 늑대단의 대다수도 쉽게 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단순히 제때 연락을 받지 못해서 생긴 일일 것이 분명했다.
헤카톤케이레스급들의 좀비들도 덩치가 크고 힘이야 셌지만, 둔한 편이니까 그 정도라면 사티 수준의 실력으로 몸을 빼내지 못할 정도도 아니고.
“......”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확인 차원에서 두 눈에 집중하자, 나랑 연결된 실들이 보였다.
한창 세계수의 씨앗을 심을 예정인 장소에 집중적으로 정화하고 있을 호아란과 카르미나가 있는 곳으로 이어진 두 가락의 실들과, 씽씽이 2호에서 열심히 저번에 자른 아내들의 보지털을 사용해서 아티펙트를 강화 중인 유스티티아와 이어진 실.
바로 내 주변에 있는 아내들과 이어진 실들이 보였다.
그 밖에도, 내 주변에 있는 에일레야나, 이 주변의 정리를 하고 있을 릴리스나 카루라의 것으로 보이는, 꽤나 멀찍하게 떨어진 곳까지 이어진 실들도 보였다.
다소 멀리까지 나온 탓에, 더더욱 멀어진 곳으로 향하고 있는 아리아드나 릴리아나와 이어진 실들도 보였고.
그리고, 사티...
“...이게 왜 그쪽에 있어?”
우리보다 훨씬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는 사티의 실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가느다랗게 변해버린 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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