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화 〉 자라나라 나무나무 (4)
* * *
‘3년이라아...’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한없이 찰나에 가까운 그런 시간.
하지만 그 찰나의 시간동안, 그저 돌보고 사랑하는 것 밖에는 할 줄 몰랐던 나무와 그 나무의 의지를 도왔을 뿐인 정령은 많은 것을 겪었다.
처음, 이 세상에 도착했을 적에는 세상은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악의로 가득했다.
마치...
이전의 세상을 불사르기 위해 무수하게 쏘아졌던, 그 악의로 된 불꽃이 모든 것을 불태우기 직전의 그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있는, 두려워하고 있는 그런 세상이었다.
당장 자신만 향하는 시선만해도 그랬다.
느닷없이 나타난, 거대한 나무를... 세계수를 두려워하며 그 주위를 철로 두르고, 멀찍이서 관찰하는 이들이 보였으니까.
그래서, 일단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참았다.
참고서.
뿌리를 뻗쳐 보내면서, 어째서 이 세상이 그렇게 악의로 가득 찬 지 알게 됐을 무렵, 아리아드는 고민했다.
‘이걸 대체 어쩌면 좋을지 걱정했었지이...’
이전에조차도 막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늘 가득히.
마치 천상에 닿을 만큼 높이 자라나 있던 나무의 위로 빼곡하게 쏘아져 내리던 불꽃을, 자신은 막지 못했다.
그것은, 악의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오직 나무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불꽃.
그러기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도 함께 불살라 없어지더라도 상관없다고 여기었던, 증오를 연료로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그렇기에, 설령 오랜 세월을 나무와 함께... 그 대행자로서 신앙을 받아왔던 자신이라도 그 전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 하늘을 수놓고, 이윽고 모든 것을 불태울 것을 보았음에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불탔다.
하물며, 지금은 아주 일부만이 덩그러니 떼어져서 이쪽으로 넘어와서, 막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된 무렵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그저 불타오르는 세상을, 불타오르는 나무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미래를 보았음에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시절보다도 없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기다렸다.
멀리, 멀리.
뿌리를 뻗쳐 보내고, 기운을 뿌리면서 기다렸다.
남아있던 신성을 사용해서...
이대로라면 이 세상에 닥치게 될 ‘미래’를. 마땅히 이를 막을 수 있는 존재들에게 보여줬다.
비록 전지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세계의 반을 덮은 나무와 함께 살아가면서 온갖 것을 ‘보아왔던’ 존재로서 전지는 몰라도 이뤄질 예정의 미래를, ‘예지’를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은 가능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강하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존재들에게 뿌리를 뻗어 보내며, 그 ‘미래’를 보여주기를 반복하기를 한참을 했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찾아왔다.
너지? 계속 그 끔찍한 걸 보여주고 있는 거. 그거 때문에 요즘 잠자리가 존나 사나우니까 그만 좀 하지? 말해. 그만할 거야, 아니면 이대로 내가 뿌리째로 뽑아줄까?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신경질적이었지이?’
흘끔, 지금은 덜 신경질적이게 된 친구를 바라봤다.
내 가슴이 줄어들지 않게 해달라고 했던 한조를 열심히 꼬리로 때리고 있는 친구를.
이해는 갔다.
그때의 그녀 역시, 막 이 세상으로 넘어왔을 무렵이었으니까.
그녀 또한, 자신들의 종족을 위해서 어쩌면 좋을지 몰라서 한창 혼란스러웠을 테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때 자신을 찾아왔던 것이 그녀였던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강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무척이나 상냥한 ‘여제’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줬으니까.
아니, 진짜. 내가 대체 왜 이런걸... 이걸 나보고 다 어떻게 하라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투덜거리면서, 그녀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줬으니까.
‘운이 좋았지이.’
그래, 정말로 운이 좋았다.
아무리 ‘여제’가 강하다고 한들, 단 하나의 존재만으로는 막을 수 없던 것들이었다.
전성기 시절의 자신보다도 더욱 강한 힘을 지니고 있던 ‘여제’였지만, 결국 여제는 혼자였다.
그 모든 것들을 홀로 막는 것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여제’는 혼자가 아니게 됐다.
뒤이어서 찾아왔던 ‘천호’가 말했다.
그것들은, 이제껏 본녀에게 네가 보여준 그것들은 진정으로 이 세상의 미래이더냐? 말하거라, 나무여. 진정으로, 그것들은 이 세상에 닥칠 미래이더냐?
또 그 뒤에, 찾아왔던 ‘망아의 용’도 말했다.
이제 막 왔는데, 이대로 망해버리면 좀 그러니까... 도와줄게. 대신에, 가지 좀 몇 개 줄래? 실험해보고 싶은 게 있거든.
처음에는 그저 내가 흘리던 기운을, 강한 기운을 찾아왔었던 ‘천마’도 그렇고...
역시 신기한 세상이로군. 말하는 나무라... 너는 강한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에 벌였던 일로 인해, 하나둘 모인 ‘영웅들’은 서로가 다른 이유로 모이게 됐다고한들, 이해가 일치했다.
어찌 됐건 같은 세상에서 살게 됐는데 다 같이 좆될 수는 없다는 이유로, 힘을 합쳤다.
그렇게 어찌저찌 하마터면 불타오를 뻔했던 이 세상을.
또 한 번, 모든 것이 불살라져서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게 될 뻔한 ‘미래’를 ‘영웅들’이 막아줬다.
정확히는 ‘미래들’이었지만.
세상이 불살라버리는 미래 말고도, 몬스터들에게 수많은 생명이 짓밟히는 미래도, 모든 종족들이 서로간에 총부리를, 이빨을, 손톱을 드러낸 채 영원한 전쟁을 계속하는 미래도, 어느 한 종족이 다른 모두를 노예로 부리는 미래도...
무수한 절망으로 가득한 미래가 한없이 펼쳐진 곳이었으니까.
수많은 세상이 뒤섞여서, 수많은 절망적인 미래로 가득한 곳.
하나같이 삐끗하는 순간, 그대로 모두가 사이좋게 멸망해버릴 수도 있는 그런 곳.
그렇기에, 그것들을 ‘본’ 내가 영웅들에게 알려줬고, 영웅들은 그것들을 모조리 때려 부쉈다.
언젠가 더욱 강해지고 흉폭해져서, 세상을 무너뜨릴 미래를 가지고 있던 사흉이라 불리던 괴물들은 ‘여제’와 ‘천호’가 직접 모가지를 뜯어냈고, 모든 세상을 향해 쏘아지고 불사를 작정이었던 무기들을 ‘망아의 용’이 모조리 해체하고 수거했다.
모든 종족을 노예로 삼으려고 했던 흡혈귀들을 영웅들이 척추를 뜯어내고, 모가지를 분질러 재로 만들었으며 세상을 죽은 자들로 가득 채우려고 들던 사령술사들을 그들이 좋아하는 죽은 자로 가득한 땅속으로 묻어줬다.
한창 차원 간의 틈새가 열린 채로 닫지 않게 됐었던 게이트 사태 때는, 끊임없이 밀려들을 몬스터들의 군세들이 ‘천마’의 주먹 앞에 뭉개졌다.
‘여제’와 ‘천마’, ‘천호’를 비롯한 이들의 무력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을, 세상의 혼란을 가중시키던 세력을 뒤에서부터 해결해온 ‘흑연’이나 온갖 것이 뒤섞인 이런 세상에 어울리는 체제를 구상한 ‘황제’도 있었다.
그렇게 때로는 쳐부수고, 때로는 통합하고, 때로는 반목시키고, 또 때로는 아예 뿌리째로 뽑아내 가면서.
무수한 멸망으로 향하는 미래들을, 고작 1년 사이에 영웅들은 모두 해결하고 해치웠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에 세계 정부라는 이름의 기묘하면서도 불안하고, 하지만 어떻게든 다 같이 살기 위한 세상을 위해 노력하려 하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황제’가 구상하고, ‘맹주’가 그 구상에 살을 덧댄, 국가도 문화도 종족도 아닌, 단지 하나의 지구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모두 통합하는 체제로서.
개인의 강함이나 약함만이 아니라, 종족의 우월성도 모조리 깡그리 억누르고, 모두 평등하다는 기치를 걸은 체제가 만들어졌다.
종교를 비롯한, 모든 갈등 요소를 솎아내가며 만들어낸,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하는 주제에, 평등하지 않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이뤄낸 체제가.
그걸로 내가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분명 그것이, 당시에는 최선이었으니까.
서로 통하지 않기에 반목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천호’의 말대로, 어느덧 ‘영웅들’에 동조하며 모여들었던 이들이 펼쳤던 최대 규모의 사상 마법이자 주술이었던 ‘바빌론’으로도, 서로 통하지 않던 언어를 모두 통하게 하는 걸로도 해결되지 않았던 일들이.
‘여제’나 ‘천마’가 직접 무력으로 찍어 누르는 것으로 대부분이 해결되어버리고 말았으니, 그로 인해 흐른 피가 얼마나 흘렀든 간에, 그것으로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흐른 피로 인해, 이전에는 나로서는 막지 못했던 이번 세상의 멸망은 막을 수 있었으니까.
많은 피가 흘러서.
정말이지 많은 피가 흐르고 흘러서.
멀리 뻗어 보낸 뿌리에도 그 피로 적셔졌을 무렵에.
결국 세계 정부라는 이름의, 모두가 평등하다는 기치를 건 체제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통일하게 됐다.
그렇게 세상을 통일한 세계 정부가 세워졌을 무렵에는 남아있던 신성을 모조리 쓴 나는, 정말로 그냥 좀 강할 뿐인 정령이 되어버리고.
세계수라 불리었던 나무도, 이제까지 뻗쳐 보냈던 뿌리들도 모조리 말라붙어서 그냥 나무가 되어버려서 더이상 ‘미래’를 볼 수는 없게 됐지만.
커다란 위험들을 모조리 때려 부순 영웅들이 저마다 다시 흩어져서... 제각기 제자를 키운다거나, 후손들의 재롱이나 보겠다던가, 혹은 또 자신들의 할 일이나 하러 갔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때, 막았으니까... 이렇게 한조랑도 만날 수 있게 됐고오?’
“이 변태 새끼! 진짜 개변태새끼! 존나 변태새끼! 그렇게 가슴이 좋냐? 응? 가슴이 좋아? 아앙? 이 새끼야!”
“악! 아악! 릴리스! 잠깐만! 악!”
퍽, 퍽하고 꼬리로 두들겨 맞고 있는 한조를 바라봤다.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정령으로 태어났지만, 그러한 생명 중에서, 자신이 보아온 아이들 중에서도 더더욱 사랑스러운 인간을.
릴리스에게 한참을 얻어맞다가, 호다닥 도망쳐서 호아란의 품에 안기는 한조를 바라봤다.
쓴웃음을 지으면서, 릴리스의 구박으로부터 한조를 보호해주는 호아란과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는 릴리스를 웃으면서 말리는 체하는 유스티티아.
어떻게, 그때 사귀었던 친구들 중에서 세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을 공유하게 될지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된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한조로 인해 새롭게 생긴 인연들도, 앞으로도 잔뜩 친해지고 싶고.
그러니까 노력하자.
‘사랑하는 한조가, 정말로 좋아하는 이 가슴이 줄어들어 버리면... 무척이나 슬퍼할 테니까.’
그렇다고, 또 한조의 말대로만 하면 사귄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둘도 없이 친해져버린 친구들... 아니, 이제 더욱 깊은 관계가 되어버린 이들도 실망할 테니.
모두가 실망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무는, 멀리멀리 뿌리를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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