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1화 〉 하얀 늑대 (1)
* * *
“그래서 그 강신이란 건 어때? 뭐 달라진 게 있어?”
“음, 아직 잘 모르겠는데.”
내게 쓰다듬을 받으며 잠든 카르미나에게 무릎을 내주고서,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내 옆에 앉으며 물어온 릴리스의 말에 그렇게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별로 달라진 느낌이 없어서 그랬다.
카르미나의 말로는 안전상의 이유로 나중에야 기억이 흘러들어온다는데, 그 나중이 아직은 아닌 모양이었다.
뭐, 그 카르미나가 지쳐서 뻗어버렸을 정도인 일이었다.
설령 강신인지 뭔지가 실패한 거라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고 한들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보다...
“음후후...”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건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잘 자는 카르미나의 귀를 계속 만졌다.
호아란의 귀가 복슬복슬한 털로 가득한, 무척이나 복슬복슬한 귀라면 카르미나는 그것과 반대였다.
호아란의 것보다 좀 더 길게 삐죽 나있는데다가, 이쪽은 복슬복슬하기보다는 매끄러운 느낌이었으니까.
공통점이 있다면 이쪽도 만지는 감촉이 무척이나 좋다는 거였다.
호아란이 폭신폭신 복슬복슬하다면 이쪽은 매끈매끈한 비단결 같았다.
아무튼, 그렇게 계속 카르미나의 귀를 만지고 있을 때 릴리스가 입을 열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럼, 할 말이 있는데.”
“...할 말?”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아니, 내가 언제 놀랐다고.”
“...수상한데, 너 이 새끼. 무슨 짓 했어?”
릴리스가 빤히 그런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최대한 그런 릴리스의 시선을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받아냈다.
릴리스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게 들킨 건 아니었다.
지레짐작으로 할 말이 있다는 릴리스의 말에 쫄아버린 탓에 의심으로 가득한 시선을 받게 되긴 했지만 생각해보니 들킬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무리 릴리스라도 속마음을 읽어대거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릴리스의 시선에서 보내져 오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라서 나도 모르게 죄다 불어버릴 것 같다는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호아란의 귀와 꼬리만큼이나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카르미나의 귀와 꼬리가 있었다.
“으우우... 여의 귀는... 먹는 것이 아니니라...”
조금 전까지 행복했던 카르미나의 꿈이 귀를 무언가로부터 먹히는 악몽으로 바뀌었을 무렵에 한숨을 내쉰 릴리스가 눈에 힘을 풀었다.
그런 릴리스를 보고서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릴리스가 말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들켰을 때 이상한 거면 두고 봐.”
“아니,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지랄. 아니면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보던가.”
그건 좀.
딱히 릴리스의 의심대로 뭔가 저지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릴리스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라 양심적으로 좀 그랬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그래서 내가 말을 돌리자, 쯧하고 혀를 찬 릴리스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너,그 늑대년은 어쩔 거야?”
“에일레야?”
“그래, 그 늑대년.”
릴리스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릴리스가 누굴 무슨무슨 년이라고 부르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심지어 호아란도 여우년이라고 불린 적도 있었던 만큼 그걸 가지고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계속 그렇게 부른다면 해야겠지만, 예전에는 릴리스에게 염소년이라고 불리던 사티도 지금은 평범하게 사티라고 불리고 있었고.
아무튼, 저건 어디까지나 릴리스가 보내오는 신호 중의 하나였다.
기분 나쁘니까 어떻게든 하지 그래? 하는 그런 신호.
그리고 에일레야가 릴리스의 심기를 거스른 이유도 짐작은 갔다.
3일에 걸쳤던 호아란의 발정기가 끝났을 무렵에 뒤이어서 발정기가 온 에일레야의 발정기에, 예전에 했던 약속대로 발정을 해소시켜줬던 건 좋은데, 그 이후부터 에일레야의 집착이 심해진 탓이었다.
물론, 예전부터 에일레야에게 은근히 그런 경향이 있었던 건 알고 있었다.
예전의 반지 관련으로 질투하던 에일레야도 그렇고, 아내 중 누군가랑 단둘이 있을 때면 어디선가 튀어나와서 끼어들거나 하고, 이것저것 대놓고 티를 내는 데 모를 리가 없었다.
근데 그게 이번에 더 심해진 거였다.
아마, 인어 사태 때처럼 내 기프트가 가진 힘이 강해진 탓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에일레야에겐 아직 비밀로 한만큼, 릴리스를 비롯한 모두가 내 아내들이란 사실을 알 리도 없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거야 이상할 건 없었다.
반대로 아내들의 입장에서도 사정을 알고 있는 만큼 에일레야가 그러는 것이 이해는 가더라도 기분이 나쁘기엔 충분한 이유가 됐다.
뭐, 전부 내가 잘못한 거였다.
확실하게 하지 않은 탓이니까.
뭔가 말할 분위기가 영 나오지 않더라고.
에일레야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솔직히 격을 올리지 않는 이상 시한부나 다름없던 문제쪽이 조금 더 중요하기도 했고.
그래도...
“에일레야한테 말해야 할 때가 오긴 했지.”
확실히 릴리스의 말대로였다.
가장 급했던 문제가 끝났으니, 이제 그쪽도 신경 써야 하긴 했으니까.
거기에 에일레야와 은빛 늑대단을 고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화가 끝날 때까지였다.
세계수가 점점 더 뿌리를 뻗쳐나가면서 성장할수록 정화하는 속도가 늘어나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이제 몇 달이 안 되는 시간이 지나면 에일레야나 은빛 늑대단이나 더 이상 고용할 이유가 없어지게 될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언제까지고 미뤄둘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최소한 계약이 끝나기 전에는 사실을 알려주고, 에일레야도 내 곁에 두고 싶긴 했다.
사티 때처럼 내 눈밖에서 무슨 일을 당하거나 하게 되는 건 사양이니까.
심지어 직업이 헌터인만큼 사티보다 위험한 일을 겪을 일이 많으면 많았지, 적진 않을 테고.
“그런데, 괜찮겠어?”
내가 그렇게 묻자 릴리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보더니 말했다.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해? 밖에 나가서 웬 생선년이나 꼬시고 온 주제에.”
“아니, 그건 사고였잖아...”
“흥, 글쎄. 어떠려나?”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릴리스.
언뜻 보면 저번 일로 릴리스가 화가 여전히 안 풀려서 이러는 것처럼만 보였지만, 이미 릴리스가 용서해준 일 가지고 계속 꽁해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더욱이, 엉덩이 뒤로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니까 더더욱 그랬다.
그러니까...
“릴리스.”
“...뭐ㅡ 웁?!”
이름을 부르자 새침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던 릴리스의 입술을 훔쳤다.
“웁...! 웁... 응... 츄웁...♡”
기다렸다는 듯이, 내 입술에 호응해오는 릴리스를 보니까 역시 이쪽이 정답이 맞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속 릴리스와 혀를 섞어가며 키스했다.
그렇게 한참을 입술을 맞추고 있을 때, 스윽 내 가슴팍을 밀어내는 릴리스에 입술을 떨어뜨리자, 샐쭉한 얼굴로 나를 본 릴리스가 말했다.
“...점점 더 뻔뻔해지기만 하고, 이 변태 새끼.”
“그래서, 싫어졌어?”
“흥.”
스륵, 내 허리에 감겨오는 릴리스의 꼬리.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뭐, 아무튼.
“그만 쳐다보고 다들 이리 와.”
중간부터 나랑 릴리스가 입술을 맞추던 걸 쳐다보고 있던 모두를 불렀다.
삐친 릴리스를 달래주기 위해 냅다 키스를 박은 대가로, 모두에게 공평하게 키스해주느라 시간을 잔뜩 잡아 먹고서야 에일레야가 머무는 처소로 향했다.
혹시 갑자기 찾아오거나 해서 들킬까봐 나랑 아내들이 머무는 씽씽이 2호랑 은빛 늑대단이 머무는 캠프랑은 상당히 떨어져 있는 탓에 꽤나 걸어야만 했다.
“자, 그럼 이제 어쩐다.”
릴리스의 말대로 에일레야에게도 사실을 밝히고, 하렘에 들여야 하는데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 호위로 고용된 헌터로 되어있는, 릴리스를 포함한 모두가 사실은 전부 내 아내들이나 전용 보지라고 말하면 되나?
사실 이게 가장 간단하고 명료한 방법이긴 했다.
사티한테는 그렇게 하기도 했고.
문제는 에일레야가 그 사실을 듣고서 어떻게 나올지였다.
사티 때는 확신이 있었다.
설령 사실을 말하더라도, 사티는 나를 떠나지 못할 거란 확신이.
자신의 몸을 내던져가면서까지 나를 구하려고 했던 사티였으니까,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에일레야는 조금 애매했다.
에일레야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강해진 웨어울프의 종족 능력이 이를 증명했다.
내가 가진 능력들이, 능력의 제공자가 가진 나에 대한 애정의 정도나 해당 종족의 숫자만큼이나 더욱 강해진다는 건 몇 번의 검증 끝에 이미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내가 안은 여자들 중에서 웨어울프는 에일레야가 유일한 관계로 내가 가진 웨어울프로서의 종족 능력이 강해지고 약해지고는 전부 에일레야의, 나에 대한 사랑에 걸린 셈이었다.
아무튼, 그게 전보다 더 강해진 지금, 에일레야가 가진 나에 대한 애정이 더욱 강해졌다는 건 확실했다.
근데 나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내가 한 손으로도 꼽을 수 없는 숫자의 아내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있던 애정까지 다 식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의외로 질투가 심한 에일레야였으니까.
그런데 짜잔, 아내만 일곱에 자기 외에도 전용 보지인 사티도 있다는 걸 알려주면 어떻게 될까?
애당초 아내조차 아니고, 그런 사티랑 동급의 전용 보지로 내 하렘에 들어올 생각이 있냐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존나 모르겠다.
내 모가지가 달아날 일은, 내가 에일레야보다 더 강해진 이상 없겠지만 그거랑 별개로 에일레야가 나를 거절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사티랑 달리, 에일레야에겐 돌아갈 곳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안 놓아줄 거지만.”
에일레야가 거절한다고 놔줄 생각은 없었다.
저번처럼 또 멍청하게 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미움받는 건 싫으니까, 최대한 에일레야가 납득할 수 있게 해야 하긴 하겠는데...
“그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지.”
만약을 위해, 나중에 내 소원 하나 들어달라고 하긴 했고 에일레야도 질내사정을 한 번 더 받는 대신에 거기에 동의하긴 했는데.
그걸로 이게 어떻게 될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에일레야도 그냥 그런 플레이라고 이해했으면 모를까, 이런데 쓸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무튼 뭔가 방법이 없을까, 최대한 머리를 굴려 가면서 에일레야에게 가던 중에 낯익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저쪽도 나를 봤는지 슬쩍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서 나 역시 그런 그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는 다가가서 말했다.
“이반, 여긴 무슨 일이에요?”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뭐, 형씨가 온 이유야 뻔하겠지만. 우리 누님 보러 왔수?”
평소처럼 능글맞게 웃으면서 중지와 엄지 사이로 엄지를 빼꼼 내밀며 말하는 이반의 말에, 어떻게 보면 처남 비스무리할 것이 될 예정인 이반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뭐, 그렇죠.”
“으음, 누님이랑 형씨 사이야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재미없게시리, 하고 투덜거리는 이반을 보니까 이반이 왜 자꾸 에일레야한테 뒤통수를 얻어맞는지 알 것 같았다.
뭔가 존나 한 대 갈겨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반은 여기 어쩐 일인데요?”
“나도 형씨랑 같은 이유, 나도 누님을 보러 왔었거든... 나는 이미 보고 오는 길이긴 하지만.”
“무슨 일 있어요?”
에일레야와 그 동생들로 이루어진 은빛 늑대단에서 항상 처맞고 다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에일레야 다음, 이인자인 이반이 에일레야를 찾을 이유가, 그것도 이런 애매한 시간에 찾을 이유가 있나 싶어서 묻자 뒤통수를 벅벅 긁던 이반이 말했다.
“일이라고 할 건 아니지. 아니, 일은 일이지만 형씨한테는 굳이 알릴만한 일이 아니라고 해야 하나... 아니, 형씨한테는 알려줘도 되는 일인가?”
지 혼자 뭐라 중얼거리던 이반이 이내 입맛을 다시고는 말했다.
“뭐, 내가 괜히 말했다가 또 뒤통수나 맞을 테니까 정 궁금하면 누님한테 가서 물어보쇼.”
그렇다는 모양이었다.
대체 뭐길래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일단알겠다고 대답하고서 에일레야나 만나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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