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화 〉 하얀 늑대 (2)
* * *
“에일레야 누나 저 왔어요.”
“아, 어? 하, 한조? 갑자기 여긴 무슨 일이야~?”
“그냥요. 그보다 저 오는 줄도 모르고 무슨 일 있어요?”
평소였다면 내가 근처에 오기만 해도 냄새를 맡고 먼저 마중해주던 에일레야였는데 오늘은 내가 안에 들어와서 말을 걸기 전까지도 멍하니 있길래 그렇게 묻자, 멋쩍은 표정의 에일레야가 말했다.
“음, 뭐... 일이라면 일이긴 한데~”
이반이랑 똑같이 말하네.
“아까 이반도 그렇게 말하던데, 대체 무슨 일인데요?”
“...음, 글쎄~? 한조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니까... 그, 그보다~ 오늘은 혼자 온 거니~? 화란 언니나 캬루 언니는~?”
냄새를 맡으면 진작 알 수 있을 사실을 굳이 말하면서, 딱 봐도 이야기를 돌리려는 모양새인 에일레야라서 한숨을 내쉬었다.
움찔, 하고 대놓고 내가 한숨을 내쉬자 에일레야가 눈치를 보고는 말했다.
“아, 아니... 정말로 한조가 신경 쓸 일이 아닌데... 여기 일이랑 관련된 것두 아니구...”
“저는 일 관련이 아니면 누나한테 뭐 물어볼 수도 없어요? 누나랑 제가 겨우 그 정도 사이였나요?”
“...그.”
순간 에일레야의 표정이 묘해지는 것이 보였다.
씰룩, 눈꼬리가 움찔거리는 에일레야.
나도 대충 에일레야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후딱 쐐기를 박았다.
“됐어요, 그럼. 얘기해줄 생각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
에일레야가 우리 사이가 뭔데? 하고 공격을 하기 전에 선수를 쳐서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당황한 듯한 에일레야가 말했다.
“자, 잠깐만. 잠깐만 한조, 기다려봐?”
꽈악, 하고 일어나려드는 내 소매를 급하게 붙잡은 에일레야가 말했다.
“저, 정말로 별일 아니라니까~? 나, 나도 거절하려고 했고... 애당초, 내가 원해서 했던 것도 아니었고... 거기에 무슨 일이 있으니까 나 찾으러 여기 온 거 아니야~? 그렇게 가버리면...”
“저는 딱히 누나처럼 무슨 일이 있어서 온 거 아니라서요. 그냥 누나가 보고 싶어서 온거라.”
“읏...”
그냥 보고 싶어서 온 거라는 말에 살짝 얼굴을 붉힌 에일레야를 보며 이 틈에 말했다.
“그보다, 거절이라뇨?”
거절이니 뭐니하는 걸 보면 어디서 제안이라도 들어온 걸까?
일단 헌터일을 하는 데다가 에일레야 혼자만이 아니라 은빛늑대단의 클랜장이기도 하니까.
아무튼, 설명해보라는 시선을 에일레야에게 보내자 으으, 하고 신음하던 에일레야가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해하면 안 된다~? 정말로, 정말로 나는 거절하려고 했거든~? 애초에, 그게 싫어서 가출한 건데...”
“알겠으니까 설명 좀 해봐요.”
내 재촉에 고개를 끄덕인 에일레야가 말했다.
“그러니까... 집에서 연락이 왔거든...?”
집...?
아니, 그야 에일레야한테도 집이야 있겠지만.
“무슨 연락인데 그래요?”
“...여기.”
그렇게 말해서 품에서 꺼낸 편지를 내게 보여주는 에일레야.
“...저 이거 못 읽는데요.”
물론, 에일레야가 보여줘봤자 나는 여기에 적힌 글은 하나도 못 읽었다.
말이야 저마다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온 사람들 모두가 통할 수 있도록 지구 통째로 펼쳐진 사상 결계 ‘아발론’이 있다지만 그거랑 문자랑은 별개의 것이었으니까.
하다못해 세계 정부에서 새로 만든 공용어도 아니고, 이건 생판 진짜 모르는 문자였다.
아마 에일레야네 세상에서 쓰던 문자이리라.
생긴 건 러시아 쪽의 문자랑 비슷한데.
키라리 문자인지 뭔지 하는 그거.
엄청 꼬부랑거리네.
그러고 보니 에일레야나 이반이나, 이름이 그쪽이긴 했었지?
합쳐진 여러 세상이었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제각각 큰 줄기에선 같은 역사를 지녔던... 혹은 지닐 뻔했던 그런 세상들이란 것이었다.
사소한 무언가로 인해 이리저리 나뉘어버린 세상.
어느 세상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창작물 속의 존재로만 여겨졌던 요정이나 정령, 드래곤이 있었기에 ‘변한 세상’
어느 세상에선 일어났었을 혁명, 전쟁, 혹은 그 어떤 사상의 존재가 사라지거나 없었기에 ‘변한 세상’
또 어느 세상에선 당연하게 존재하는, 마나라든지 하는 것이 전혀 없었던 세상 등등.
존재했고, 존재하지 않았다.
일어났고, 일어나지 않았다.
태어났고, 태어나지 않았다.
크고 작은 계기로 인해 조금씩 바뀌어버린 역사를 지니게 된, 무수한 ‘지구’가 합쳐져서 하나가 된 세상이 지금의 세상이었다.
아무튼, 요점은 그런 관계로 아마 내가 아는 그 키라리 문자랑도 많이 다를, 에일레야네 세상의 문자로 적혀져 있는 이 편지는 내가 전혀 읽을 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랬었지, 참. 그럼, 대신 읽어줄게.”
크흠, 하고 무안한 표정으로 편지를 읽기 시작한 에일레야.
에일레야가 읽어준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애비(내 애비 아님)가 몸이 많이 안 좋으니까 이제 그만 좀 싸돌아다니고 집으로 돌아와서 약혼자랑 결혼하고 애나 낳아서 가문을 이으라는 내용이었다.
덕분에 에일레야가 내게 그토록 말해주기 싫어했던 이유나, 끝끝내 오해하지 말라느니 뭐니 했던 이유는 확실히 알겠다.
일단, 확인차 내가 물었다.
“누나, 약혼자 있었어요?”
슬쩍, 내 눈치를 보며 에일레야가 우물쭈물 말했다.
“으응... 그, 그치만 약혼자라곤 해도 아무 사이도 아니다~?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애초에, 이번 약혼자는 내가 집 나간 사이에 결정된 약혼자라는 모양이라...”
이번 약혼자?
“이번 약혼자요?”
“아~ 뭐, 응. 조금, 사정이 복잡해서...”
멋쩍은 듯 뺨을 긁적이는 에일레야.
그런 에일레야를 쳐다보자, 결국 한숨을 내뱉은 에일레야가 말했다.
“그, 왜. 그런 거 있잖니~? 순수주의다 뭐다 하면서 하는 정략결혼이라든지 뭐라든지. 뭐, 그런 거라서.”
아, 그쪽인가.
순수주의란, 예의 이런 세상이기에 나온 것 중 하나였다.
예전의...
농담 삼아 말했던 드래곤과 거인족의 혼혈이라든지 하는 일로 안그래도 씹창난 세상이 더욱 씹창날 수도 있으니 모든 종족은 서로간의 종족끼리만 혼인하고 아이를 가져야한다는 뭐, 그런 이야기.
실제론 좀 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모양이었지만, 결국 요지는 피를 섞지 말고, 순혈을 유지해야한다는 주의고 당금의 세상에는 그런 부류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딱히 거기에 동의하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저기, 그러니까... 나 정말로 거절하려고 했으니까 오해하지 말아줄래~?”
“괜찮아요, 그 정도야 뭐.”
아내만 일곱에 플러스 알파인 나랑 비교하면 에일레야한테 얼굴도 모르는 약혼자가 있던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들어보니까 딱히 에일레야가 원한 약혼 관계인 것도 아닌 것 같고.
애초에 그런 관계였다면 그녀가 나를 만났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거기에...
“마침 잘됐네요.”
“...잘됐다니? 뭐가? 나한테 약혼자가 있다는 게 잘됐다는 거니?”
“아뇨, 그런 게 아니니까 화부터 내지 말고요.”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정색하고 급발진하려드는 에일레야를 진정시키고서 말했다.
“그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가보죠.”
“가다니? 어딜...?”
“그거야... 당연히 누나네 집이죠.”
내 말에 두 눈을 깜빡거리던 에일레야가 의아한 듯 말했다.
“...한조가, 우리 집은 갑자기 왜?”
“그야, 누나네 아버지한테 누나 약혼자는 이제 필요 없다고 얘기해야 하니까요.”
“...그건 내가... 잠깐, 응...? 어...? 저기, 그... 한조...? 미, 미안한데 그게 무슨 뜻...?”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횡설수설하던 에일레야가 이내 흘끗 나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묻길래, 내가 말했다.
“혹시 약속 안 지키려고 했어요? 누나.”
스윽, 하고 내가 다가가자 움찔한 에일레야가 말했다.
“야, 약속이라니...?”
“그야, 누나 보지 이제 제 보지라고 한 약속이요. 누나 보지는 제 자지 전용 보지인데 약혼자가 필요해요?”
“어, 그... 그, 건... 아닌데...”
새빨개진 얼굴로 그렇게 웅얼거리는 에일레야.
슬쩍, 고개를 돌리려는 에일레야의 턱을 집어서, 내 쪽으로 다시 돌렸다.
“아... 으.”
“그쵸? 그러니까 확실하게 해줘야죠. 그리고, 에일레야 누나. 전에 저한테 말했던 거 잊지 않았죠?”
“내가, 한조한테 한 말...?”
옆으로 까딱거리는 에일레야의 귀를 보니까 기억이 나질 않는 모양이었다.
“혹시 까먹은 건 아니죠?”
“자, 잠깐만... 지, 지금 기억해낼 테니...”
정말로 까먹은 모양인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때 에일레야도 반쯤 농담 삼아 했던 말인 것도 같았다.
나만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싶어서 조금 모양이 빠졌지만, 그래도 말했다.
“제 아이, 낳아준다면서요?”
“아......?”
그런 내 말에 멍한 표정을 짓던 에일레야.
이윽고, 쫑긋하고 위로 솟구친 두 귀가, 에일레야가 예전에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음을 알려줬다.
점점 더 새빨갛게 변하는 에일레야의 얼굴과 쭈뼛거리는 꼬리.
당혹과 부끄러움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에일레야를 보고서 말했다.
“이제 기억 났어요?”
“아, 그, 그게. 그건... 그때 그냥... 했던 말... 인데...?”
더듬거리며 그렇게 말하는 에일레야를 보고서 말했다.
“그래서, 싫어요?”
내 말에, 그런 나에게 턱을 잡혀서, 나를 올려다보던 에일레야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꼬리를 다리 사이로 말은 채로 그러는 에일레야를 보니까 상당히 귀여웠다.
스윽, 손가락으로 그런 에일레야의 입술을 더듬었다.
“우, 읏...”
움찔움찔, 입술을 더듬는 내 손길에 몸을 배배 꼬는 에일레야.
그런 에일레야가 조심스레 내게 시선을 보내오는 것이 보였다.
에일레야가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야, 조금 전에도 본 표정이었으니까.
내가 릴리스에게 키스했을 때, 그런 나랑 릴리스를 쳐다보던 아내들의 표정이었다.
천천히, 그런 에일레야의 입술에서 손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에일레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아...”
추욱 처지는 두 귀가, 에일레야가 느끼는 상실감을 버젓이 보여줘서 조금 미안했지만, 못 본체하고서 말했다.
“정해졌네요, 그럼 저랑 같이 집에 가는 거죠?”
“아, 응... 그... 네에...”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나저나, 마침 정말로 잘됐다.
에일레야한테 약혼자가 있었으니까, 나한테도 아내가 있는 것 정도는 어느 정도 쌤쌤이 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말인데 누나, 저도 고백할 게 있는데요.”
“고, 고백...? 자, 잠깐만...!”
축 처졌던 두 귀가 다시 쫑긋하더니, 붕붕 흔들리는 에일레야의 꼬리가 보였다.
“미, 미안한데... 자, 잠깐만 기다려줄래~?”
“네, 뭐...”
고개를 끄덕이자, 에일레야가 후딱 자세를 바로하더니 크흐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마, 말해봐... 하, 할 말이... 아니, 그, 할 고백이란 게 뭔데~?”
빙글빙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말하는 에일레야.
한껏 기대 어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에일레야에게 내가 말했다.
“실은, 저도 아내가 있거든요.”
“...어?”
기대감으로 가득했던 에일레야의 얼굴이 멍해지는 것이 보였다.
붕붕 좌우로 흔들리던 에일레야의 꼬리가, 느릿느릿해지는 것도 보였다.
“...어, 그... 응...? 자, 잠깐만~? 기, 기다려봐... 내가 이상한 걸 들은 거 같은데... 나보고... 아내가 되어달라는 게 아니고... 아내가, 그... 있다고?”
“네, 누나도 아는 사람들이에요.”
“아는, 사람... ‘들’?”
다시, 에일레야의 얼굴이 핏기가 싹 가시기 시작하는 것도 보였다.
사람의 안색이란 것이 저렇게 푸르죽죽해질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순식간에 시퍼래지는 에일레야의 안색에 후딱 끝내기로 했다.
“실은, 누나한테 제 호위로 고용했다고 했던 헌터들 말인데요.”
사실, 릴리... 그러니까 릴리스를 포함해서 모두 내 아내들이라는 사실을 에일레야에게 고백했다.
내 고백에 처음의 기대 어렸던 얼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서 핏기가 싹 가신, 딱딱하게 굳어버린 얼굴만 남아버린 에일레야를 보고서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도, 아직 누나 보지 제 보지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