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늑대 (4)
“그래서 그렇게 됐어.”
“뭐가 그래서 그렇게 됐어야?”
어이없다는 얼굴로 두 뺨이 새빨갛게 부은 나를 바라보던 릴리스가 내 말에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여차저차 에일레야에게 아내들에 대한 걸 고백하고서, 또 영차영차하려다가 결국 얻은 건 두 뺨에 선명하게 남아버린 손바닥 자국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한숨이었다.
내가 다치고온 사실에, 안타까워서 나온 한숨.
절대로 내가 한심스러워서 저런 것이 아닐 거다.
“그보다, 한조야. 상처를 좀 보자꾸나. 그, 자국이 조금 심하게 남았구나.”
“아, 이거 겉만 이렇지 아프진 않아요.”
아직 자국이 조금 남아있긴 했지만 통증은 진작 가신 뒤였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는데.
“그렇다고 남겨둘 만한 것은 아닌 것 같구나.”
“음... 뭐, 그렇죠. 그럼, 부탁할게요.”
고개를 끄덕이고선 내게 다가온 호아란이 이내 내 뺨을 더듬었다.
호아란의 손가락이, 아직 부은 자국을 누르자 조금 쓰라린 것이 아주 다 나았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많이...
느려지긴 했네.
억지로라도 쪼금 능력이 약해진 것 뿐이라고 우기기엔 많이 더뎌진 재생 능력이었다.
“많이 아팠겠구나.”
그런 내 뺨에 난 자국을, 스치듯 어루만지며 치료해주던 호아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웨어울프니까요.”
“으음,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였느니라.”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한 호아란의 손이 내 뺨에서 떨어졌다.
“이제 되었느니라.”
그런 호아란의 말에 뺨을 만져보자 살짝 울긋불긋하게 부어있던 것이 싹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아프더라도 몇 번 만지는 걸로 상처를 낫게 해줄 수 있는 호아란의 손, 이게 정말로 약손이 아닐까.
“고마워요.”
“별것 아니었으니 그리 말할 것은 없느니라. 한조, 네 말대로 상처의 대부분은 나은 뒤였으니 말이니라.”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뭐라 입을 열려던 호아란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고, 호아란에게 그렇게 물어보려고 할 때.
유스티티아가 내게 말했다.
“그래서, 한조는 이제 어쩔 생각이야? 들어보니까, 그쪽은 거절한 모양인데.”
“...에일레야가 좀 진정하면 다시 가봐야지.”
“흐응... 이번에는 놓아줄 생각은 없나 보구나? 저번이랑은 다르네?”
그런 유스티티아의 말에 움찔, 어깨를 떠는 사티가 보였다.
“유스티티아.”
“응, 미안. 하지만 궁금해서.”
마이페이스인 유스티티아가, 딱히 악의를 갖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란 건 알았다. 전이랑 다르게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유스티티아가 남의 눈치를 보거나, 배려를 하는 성격은 딱히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다.
사소한 헤프닝.
아니면...
물끄러미, 나를 보는 유스티티아의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그런 유스티티아의 시선을 받으면서, 슬쩍 사티에게 손짓했다.
“아, 그...”
“괜찮으니까.”
내 말에 우물쭈물 눈치를 보던 사티가 어깨를 으쓱이는 유스티티아와 한숨을 내뱉는 릴리스, 그리고 슬쩍 자리를 비켜주는 호아란을 보고는 꼴깍, 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무얼 망설이느냐? 영웅이 부르지 않느냐, 이럴 때 확실히 점수를 따내야 하는 것이 첩의 역할이노라!”
그 뒤에 냅다 부추기는 카르미나의 말에 결국 조심스레 내 옆에 다가온 사티가 꼼질꼼질, 메이드복의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부, 부르셨나요...?”
“응.”
그런 사티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보들보들, 사티의 분홍빛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걸리고, 빠져나간다.
“읏...”
마구 헝클어뜨리듯이 사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내 손길이, 이내 부러져버린 뿔에 닿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로 손가락으로 꼼지락거리고 있는 사티가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기쁨, 부끄러움, 곤란함, 복잡한 감정이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그러고 있는 사티를 보다가, 다시 나를 여전히 빤히 쳐다보고 있는 유스티티아에게 말했다.
“또 저번처럼 병신 짓하고 싶진 않으니까.”
저번에는.
사티때는...
나는 내가 선택해야 했던 것을, 사티에게 미뤄버렸다.
묻지 않고, 알지도 못하면서도, 그게 사티의 선택이라면, 그걸 존중한다느니 뭐니하는 병신같은 짓을 해버렸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손가락 끝에 닿는, 사티의 부러진 뿔의 단면을 더듬었다.
인간과 달리, 태생부터가 날 때부터 마나를 느끼고, 그를 다루는 법을 익히는 종족들 중 하나인 사티로스.
그리고, 그런 사티로스의 뿔은 마나를 모으고, 다루고, 조절하는 등의 역할을 하는 기관이었다.
단순히 펠라치오를 할 때 붙잡을 손잡이라던지, 들박용으로 잡을 손잡이가 아니라, 좀 더 중요한 역할을 가진 부분이었다.
그게, 한쪽이 똑하고 부러진 사티는 인간으로 치면 반신불수... 심지어 아내들의 도움으로도 낫지 않는, 영구적인 장애를 얻은 셈이었다.
이제와서 내가 기프트도, 기도 전부 느끼지 못하고 사용할 수 없게 된다고 쳐도... 아 씨발, 좆같네하고 넘어갈 뿐 살아가는데는 큰 문제는 없을 거다.
다시 예전처럼, 다른 종족의 눈치를 보며 바닥을 기는 삶으로 돌아갈지언정, 단지 살아가는 데에는 큰 문제는 없을 테니까.
다만, 사티는 달랐다.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있던 것을 잃었다.
사티로스의 능력을 다루지만, 정말로 사티로스는 아닌 관계로 대체 어떤 느낌인지는 몰라도, 멀쩡했던 두 눈을 갑자기 잃거나, 다리가 날아가 버린 것과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확실히, 이전처럼 마법을 펑펑 다루거나 하지도 못하게 됐고.
...전부, 내가 그때 사티를 그냥 떠나보낸 탓에 그렇게 된 거였다.
“그러니까, 저번이랑 이번이랑 다른 건 당연한 거야. 유스티티아.”
“응, 한조는 욕심쟁이니까, 그럴 줄 알았어. 하지만... 그럴 거였으면 이번에도...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 않았어?”
그건...
뭐...
그렇지.
솔직히 말해서, 이번에도 굳이 에일레야에게 싸대기를 얻어맞지 않을 방법은 있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내가 에일레야를 확실하게 내 여자로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단지 그때까지 조금 더 시간을 들이면 그만인 일이었다.
시간을 들여서, 에일레야가 내게 안기는 횟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에일레야는 나를 벗어날 수 없게 되어갔을 테니까.
설령 오늘처럼 대놓고 에일레야에게 내가 아내가 몇 명이고 뭐고 하는 말을 했다고 해도, 결코 에일레야가 먼저 내 곁을 떠난다는 선택을 할 수 없도록,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할 수 있었다.
내게 미움받는 것이 싫어서, 손을 들어 올릴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내게 버림받는 것이 무서워서, 오히려 내게 매달리도록 할 수 있었다.
아내니, 첩이니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주 가끔씩 안아줄 뿐인 관계로도, 에일레야가 만족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자신이 있었다.
사티로스와 서큐버스.
매혹하고, 매료시켜서, 쾌락으로 이성을 노예로 삼아 버리고, 애당초 이성을 유혹해서 그 정기를 먹이로 삼는 종족.
그 두 종족의 능력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나였다.
그런 만큼, 아주 간단하게.
에일레야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시간을 들여서.
내 손이 아니면, 내가 아니면, 내가 없으면 살 수 없도록.
나란 존재에 매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하기엔 좀 많이 달랐다.
에일레야가 내 고백을 듣고서도, 내게 아직 웨어울프의 능력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아직도 에일레야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안심했었으니까.
아니, 그렇다고 그때 그딴 짓을 한 건 지금 생각해보면 좀 많이 발정난 병신 새끼 같긴 했는데.
그만큼 에일레야가 좀 많이 꼴렸지만, 꼴렸다고 덮친 것은, 정말로 실수였다.
결과적으로 그 탓에 이렇게 혼자 와버렸고.
“......”
하지만, 그때 에일레야를 덮치지 않았던 것이 정답이었던 것 같기는 했다.
덮치지 않았다기보단 덮치지 못했던 것이긴 했지만.
...정말로, 정말로 에일레야가 내 곁에 있게 하고 싶었다면.
에일레야가 나를 떠날 수 없게 하려고 했다면, 그때 에일레야를 안았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대체... 대체 어디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들 건데...?’
두 팔을 붙잡은 채, 입술을 맞추려고 다가간 내 얼굴을 피하고자 고개를 돌린 채, 울면서 그렇게 말하던 에일레야를 무시한 채로, 그대로 입술을 맞췄으면 그만인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흑... 그렇게... 쉬워...? 너한테는... 내가, 우스워 보이니?’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지 못해서, 잡고 있던 에일레야의 두 팔을 놓아줬다.
그대로 한참을, 훌쩍이는 에일레야를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울었던 에일레야가, 다시금 날린 싸대기에, 기어코 양 뺨이 시뻘겋게 변할 때까지 처맞을 수 밖에 없었다.
‘...내 눈앞에서 꺼져.’
시큰거리는 뺨과, 그 통증을 억누르며 낫게 하던 재생 능력.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우느라 새빨갛게 변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에일레야의 말이 더 아팠다.
명백한, 에일레야의 ‘거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웨어울프로서의 능력.
내 기프트가 어딘가 맛탱이가 가버린 것이 아닌 이상, 에일레야가 아직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일레야는 나를 거부했다.
그 말은, 내가 에일레야에게 큰 상처를 줬다는 것이었다.
내가 몸을 돌려서 나갈 때까지, 계속 훌쩍거리던 에일레야에게, 정말이지 큰 상처를.
그런 에일레야에게, 능력을 써서... 나를 거부할 수 없도록 했었다면.
그러면, 그걸로 전부 좋게 끝날 수 있었던 걸까.
그때, 척척하고 내게 다가온 카르미나가 내 어깨를 툭툭치며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깨를 펴고 당당해지거라. 여는, 여의 영웅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싶지 않노라.”
“응, 그건 미안.”
너무 죽상이긴 했던 것 같아서 카르미나에게 사과하고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기 위해서 오랜만에 다 같이 카드라도 치자고 하려고 했는데.
하아, 하고 한숨을 내뱉는 릴리스.
으음, 하고 신음하는 호아란.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리며 웃는 유스티티아가 보였다.
“아앗...”
방금까지 나를 위로해주던 카르미나도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표정이 묘해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 있어?”
“으응, 그게에 있지이? 한조오.”
그리고, 그런 내게 아리아드가 해준 말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