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늑대 (5)
“아니, 누님. 갑자기 뭔 소리요? 집으로 돌아간다니, 아까 분명 나한테 거절한다고 했...”
“시끄러워, 넌 가서 짐이나 싸라니까?”
“아니, 좀 설명이나 해보라니까? 혹시 형씨랑 뭔ㅡ”
그르르르, 하고 이를 드러내는 에일레야를 보고서 이반이 찔끔했다.
“...거, 씨발. 사랑싸움하는 건 좋은데 사이에 껴서 개고생하는 동생들 좀 생각...”
“닥쳐, 이반. 그런 거 아니니까.”
“아니긴 뭘, 맞...”
빠악!
“...구만, 씨발. 나한테만 지랄이야.”
끝까지 속을 박박 긁는 이반을 발로 차서 내쫓고서, 싸고 있던 짐을 마저 싸기 시작했다.
“...개새끼.”
유부남이라니.
아니, 유부남인 건 상관없었다.
디스펜서 중에서도 유부남인 경우야 종종 있었으니까. 아내가 딱히 그런 쪽으론 신경 쓰지 않는 종족이라던지 하는 경우에는 그랬다. 그러니까, 딱히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자기가 한조가 유부남이고 자시고 할 것을 뭐라 할 처지도 아니었다.
아니지만...
“...처음부터 티를 내던가!”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스스로 물어봐도, 마땅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애초에...
‘...그래도, 아직 누나 보지 제 보지 맞죠?’
그렇게 묻는 한조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던 자신이었으니까.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화가 나고 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하고 생각해버린 자신이 있었으니까.
만약에...
그냥, 한조에게 아내가 있다는 정도였더라면...
그 숫자가, 일곱이나 되지만 않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아이를 가져줄 거라고 약속했니 뭐니 하는 말을 하더니 곧바로 자기 아내가 일곱이나 있다는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에둘러서 말했더라면...
그러면...
어쩌면...
“...아니, 아니지.”
사실, 전부 다 변명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거였다.
한조의 아내라는 걸 알게 된 그 모두가.
도저히 A랭크의 헌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하면서도, 또 여자인 자기가 봐도 엄청나게 예뻐서 열받는 릴리라는 여자도 그렇고, 나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여성스럽고, 거기에 강하기도 엄청 강한 화란 언니도 그렇고...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강하고, 또 그러면서도 내 부탁에 순순히 가르침을 내려줬던 캬루 언니에... 다친 상처가 어떻든 간에 순식간에 치료시켜주던 카르미 언니, 거기에 어마어마한 아티펙트를 잔뜩 꺼내는 유스티 언니... 심지어 가슴이 아니라 무슨 수박 같은 걸 달고 다니던 아리아 언니까지.
하나같이 자기랑은 비교하기도 어려울 만큼 대단한 여자들이, 전부 한조의 아내란 사실에, 그 사실에 도망치는 것에 불과했다.
그야 자신이 그 사이에 낀 들, 한없이 비참해질 뿐일 테니까.
애당초ㅡ, 한조가 말했던 것에서 나는 언니들이랑도 급이 다른 취급이었다.
얼마 전에, 한조가 새롭게 고용했었던 분홍 머리카락의 , 뿔 한쪽 달린 사티로스... 사티라는 아이랑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아내가 아닌... 전용 보지니 뭐니 하는... 아내 밑의... 첩실이라고 해도 좋을 위치의 여자.
처음부터, 구분 지어진 경계가 명확했다.
그런 것을 태연하게, 한조 그 씹새끼가 내게 권한 것이다.
“...진짜, 나쁜 새끼.”
무슨 생각으로, 내게 그런 말을 한 걸까.
나 같은 건, 그래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던 걸까?
그게 아니면...
“...내가 불쌍하기라도 했냐고, 이 나쁜 새끼야.”
차라리 아내가 있으니까 미안하다고 거절하는 거라면 이렇게까지 비참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없이 가벼운 태도로... 나 정도는 끼워줄 수 있다는 양 말한 한조의 말에, 자존심이 산산이 무너져버렸다.
정말로, 내가 불쌍해서 그런 걸까.
그것조차 아니면, 말만 하면 언제든지 대주는, 그런 여자로 보고 있었던 걸까...
생각을 이어나가면 이어나갈수록, 한없이 침울해져만 갔다.
“......”
눈가가 흐릿해진다.
아까도, 한참을 울었는데.
그런데도 아직도 나올 것이 있었는지, 그렁그렁 맺히려드는 눈물에 벅벅,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일단...
일단 돌아가자.
돌아간 뒤에 있을 일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았으니까.
우선... 아버지가 멋대로 정해버린 약혼자 건은,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얼굴도 모르는, 심지어 자기가 가출한 사이에 정해진 듯한 약혼자랑 결혼해서 애를 낳으라고 한들, 네 그럴게요 하는 미친년은 아니었다.
애당초 사사건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정하려 들던 그 노친네가 싫어서 뛰쳐나왔던 것이었다.
일족의 번영이니, 혈맹이니, 순혈이니 뭐니하는, 이미 진작 뒤집어 엎어진 이 세상에선 존나 시시콜콜할 뿐인 이야기만 떠벌거리던 노친네에 환멸이 나서 뛰쳐나온 모두와 함께 만든 것이 은빛 늑대단이었으니까.
그런 곳으로, 이런 식으로 다시 돌아갈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여기에 계속 남아있는 것보단 나으리라.
“...씹새끼긴 해도, 일단 아버지니까.”
뛰쳐나온 지도 1년이 넘기도 했고, 나이가 나이라서 그런지, 전혀 믿기지는 않지만 일단 아프다고 하니까 얼굴 정도는 봐서 나쁠 건 없을 테고.
만약...
정말로 아픈 거라면, 어차피 돌아가야할 일이긴 했다.
자기가 도망쳐 나오지만 않았더라면, 그 노친네의 말만 들었더라면 그 뒤를 이어서 족장이 됐었을 자신이었으니까.
말이 족장이지, 꼬라지를 보면 순혈이니 뭐니하면서 웬 웨어울프랑 결혼해서 애나 낳는 신세가 됐겠지만.
“...진짜,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진짜로...
일족을 위해.
종족을 위해.
번영을 위해.
그런 말로 포장한 채로, ‘순혈’ 웨어울프를 불리기 위한 ‘순혈’ 웨어울프 낳을 수 있는 ‘순혈’ 웨어울프 딸 중 하나로만 취급하던 아버지와...
나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는 한조까지.
어떻게 된 게 멀쩡한 남자가 주변에 하나도 없었다.
“이반 그 새끼도 그렇고. 진짜...”
어떻게 된 게, 눈치가 있다면 지 누나가 징징 짰던 걸 다 알았을 놈이 속만 박박 긁어대고 가버리고.
진짜로, 죄다 씹새끼들뿐이었다.
“킁...”
훌쩍, 하고 다시금 눈물을 닦은 에일레야는 주섬주섬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언젠가, 유스티티아가 내게 말했다.
‘한조는, 무척이나 욕심쟁이지만, 동시에 겁쟁이니까... 그러니까 이런 기프트가 생겼을 거야.’
키득거리면서, 내게 안겨있던 유스티티아가 그렇게 말했다.
‘사랑받고자 하는 능력, 으응... 아니... 본질은, 조금 다른... 능력.’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가졌던 것을 놓아주지 않으려 드는 욕심쟁이.
억지로 밀어붙이고, 떼를 쓰는 것과 같이... 거절을 거부하는 그런 능력.
‘아마, 한조가 안았던 여자는... 나중에 가서... 정말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그래도 한조를 잊지 못할 거야.’
한조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내 귓불을 핥으며 그렇게 말했던 유스티티아였다.
그런 유스티티아에게 내가 물었었다.
‘ㅡ시간이 지나면 효과가 점점 줄어든다고 하지 않았어?’
내 기프트.
내가 안은 여자가, 나에게 호의를 갖게 하는 능력.
하지만, 이게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나 볼법한, 영원한 사랑이란 것이 세상에 없듯이, 결국 시간이 지나면 결국 흐릿해질 뿐인 감정이었으니까.
‘응, 그렇지... 호감이란건, 결국 그런 거니까. 사랑이란 것도, 결국은 감정일 뿐이고.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 무뎌져버려. 언젠가는 결국 무뎌져가고, 흐릿해져갈 수 밖에 없는 것이 감정이니까. 망각을 모르는 드래곤들의 감정조차도, 언젠가는 무뎌져갈 뿐이야. 하지만... 기억은 조금 다르잖아?’
스윽, 하고.
내 두 뺨을 붙잡은 유스티티아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언제나처럼.
장난치듯, 농담하듯이 웃으면서 말했었다.
‘감정은 무뎌져도, 기억은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 한은 계속되니까. 행복했던 기억, 슬펐던 기억, 괴로웠던 기억. 시간이 흘러 감정이 무뎌지고 흐릿해진다고 하더라도, 기억을 떠올리면, 다시금 무뎌진 감정이 되살아나기 마련이니까.’
스르륵, 내 뺨에서 내려온 유스티티아의 손가락이 내 가슴팍을 더듬으며 내려갔다.
‘그러니까,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되는 거야. 쾌락에 허우적이던 기억, 몸 곳곳에 닿았던... 한조의 그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이 새겨져 버려서.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이 사람 밖에는 없다고, 이게...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해버렸던 기억이 남아버리니까.’
마치, 마약처럼.
‘한 번이라도 알게 되어버린 이상,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거야.’
‘...너무 비약적인 거 아니야? 마약이라니.’
‘하지만, 사실인걸. 그도 그럴게, 나도 이제 하루의 대부분은 한조랑... 한조의 자지만 생각하니까.’
기어코, 내려온 유스티티아의 손가락이, 여전히 발기 중인 내 자지를 건드렸다.
‘할 수만 있었으면, 종일 꽂아두고 있었을지도?’
‘...농담도 참.’
‘으응, 농담 아닌데?’
쿠쿡, 웃으며 유스티티아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서,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이게 진짜네...”
부산스럽게,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은빛 늑대단을 보고서 모두가 해줬던 말이 농담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딱 봐도, 철수 준비잖아.
임시로 세워둔 베이스 캠프들을 죄다 철거하고서, 바리바리 부지런히 싸고 있는 은빛 늑대단을 보니까...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다가, 꽁한 얼굴로 뒤통수를 문지르며 지시 중인 이반을 발견해서 냅다 그쪽으로 뛰어갔다.
쿠웅!
좀 급해서, 펄쩍 뛰어서 이반 앞에 떨어지자 움찔한 이반이 말했다.
“와씨, 아니. 형씨 좀 살살 달려오면 안 돼?”
“그건 미안해요, 이반. 그보다 지금 뭐 해요?”
이미 뻔히 뭐하는지 보면 알았지만, 그래도 묻자 움찔한 이반이 아씨, 하고는 말했다.
“...이 누나가 진짜. 형씨한테도 말 안 한 거야?”
진짜 귀찮게, 하는 표정으로 벅벅 뒤통수를 긁은 이반이 말했다.
“대체 뭐 때문에 싸운 건지는 몰라도, 지금 우리 누나가 생리하는 날도 아닌데 생리 중이니까 어떻게 좀 해보쇼.”
애당초, 그러려고 발에 땀 나도록 뛰어온 거였다.
“알겠으니까, 지금 하는 거 잠깐 멈춰봐요. 에일레야 누나랑 대화 좀 하고 올 테니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반을 보고서, 에일레야가 있는 곳으로 다시 뛰었다.
다시, 에일레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보니 이미 커다란 짐을 등에 들쳐메고 있는 에일레야가 보였다.
“...누나, 뭐해요. 지금.”
이미 내가 오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야, 내가 에일레야를 봤을 무렵에는 이미 귀를 쫑긋하고 있는 에일레야를 볼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냅다 뛰어서 에일레야 앞까지 쿵, 하고 내려와서 묻는 내 말에 에일레야가 말했다.
“보면 모르니?”
안다.
알아서 다시 물었다.
“왜요?”
“그야, 이 일 때려치우려고. 몰라서 물어봐~?”
“...그러니까, 왜요.”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잖아.
대체 왜.
“...누가 보면, 내가 널 버린 줄 알겠네~? 그치, 한조.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거야?”
“......”
말없이, 그런 에일레야를 쳐다보자 움찔한 에일레야가 이내 으득,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잊은 게 있었네.”
그렇게 말한 에일레야가 내게 다가왔다.
“자, 위약금. 어찌 됐든, 먼저 계약을 깬 건 우리니까. 그러니까... 받고 내 눈앞에서 꺼져줄래? 전 고융주님.”
그렇게 말하고서, 나를 밀쳐내며 지나쳐가는 에일레야를 붙잡았다.
“너, 진짜ㅡ”
“누나가 먼저 시작한 거예요.”
뭐가 옳고, 뭐가 그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여전히 내가 에일레야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거였다.
“...뭐래.”
확, 하고 내 손을 뿌리치고서 가버리는 에일레야를 가만히 바라봤다.
“...뭐야, 그냥 보내주게?”
툭, 하고 내 옆으로 내려온 릴리스가 날개를 접으며 물었다.
“그럼?”
“거기서 냅다 키스라도 박아버렸으면, 그걸로 끝난 거 아냐?”
“...날 뭐로 보는 거야.”
“개변태 바람둥이 새끼.”
평생 릴리스한테 저 소리를 들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왤까.
애가 태어난 뒤에도 뭐만 있으면 애를 데려다가 글쎄 네 아빠가 예전에 말이지, 하고 이니시를 거는 릴리스를 볼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인데?”
어쩔 생각이라...
“에일레야네 집에 가서 약혼자니 뭐니 하는 거 전부 파토부터 내고 올려고.”
그런 내 말에 하아, 하고 한숨을 내뱉는 릴리스.
이번의 한숨의 의미는 어째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새끼 또 사고치겠네하는, 그런 한숨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릴리스가 물었다.
“...쟤가 어디서 사는지는 알고?”
“몰라도 쫓을 수는 있지만, 그러면 시간이 너무 걸리니까...”
그러니까.
“나 좀 도와주라, 릴리스.”
그런 내 부탁에, 릴리스가 다시 한번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