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늑대 (6)
빽이란 것이 있으면 좋은 점이 있다.
하나는, 어지간하면 거주이전은커녕 그냥 어디 좀 멀리 나가겠다고 하는 거 하나하나 허가받는 것만 세월아 네월아해야 겨우겨우 할 수 있는 것을 하루도 안 돼서 뚝딱하고 허가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그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한 사람에 대한 것을 알아볼 만한 건 거진 다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내 아내인 릴리스는 그 모두가 가능했다.
“에일레야 누나,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정말로 훌쩍 떠나가 버린 은빛 늑대단과 함께 내 부탁을 들어준 릴리스가 몇시간이 안 걸려서 내게 전해준 에일레야에 대한 정보를 읽어보자니 생각보다 에일레야는 꽤 대단한 신분이었다.
웨어울프중에서도, 그 숫자가 많고 세력이 강한 다섯 일족 중 하나인 은빛 갈기 일족의 족장의 적장녀가 에일레야였으니 말이다.
세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인간과 달리, 이종족... 그 중에서 웨어울프만 따지면 수천만명정도에 불과한 웨어울프였지만, 그건 인간이 더럽게 많은 거지 적은 숫자인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다소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웨어울프는 부족, 혹은 일족 단위의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는 했고, 현재 세계 정부 소속으로 되어 있는 웨어울프 일족은 수만에 달했다.
에일레야는 그 수만에 달하는 웨어울프 일족 중에서도 가장 큰 다섯 일족 중의 하나, 거기에 그 족장의 적장녀인 것이다.
솔직히, 이 정도면 공주님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는 신분이었다.
당연히 에일레야 바로 밑의 동생인 이반도 장남이고, 따지고 보면 왕자님이라고 불려도 될 만한 신분이었다. 다만 이반은 후처한테서 태어난 관계로 에일레야가 적자 취급받는 모양이었지만.
아무튼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에일레야가 자기랑 씨가 같은, 머리 좀 굵은 동생들을 죄다 데리고서 다 같이 가출 중인 사정이란 걸 덕분에 잘 알 수 있었다.
“근데 이런 건 대체 어떻게 구하는 거야?”
몇 시간 만에 뚝딱하고 나온 것치고는 너무 상세했다.
에일레야의 아버지이자, 은빛 갈기 일족의 족장인 보리스에 대한 신상이나 그 가족들, 에일레야의 어머니라든지, 이반말고는 딱히 얼굴만 알지 이름까진 몰랐던 다른 은빛 늑대단의 단원들, 에일레야의 배 다른 동생들의 신상에... 뭐 이런 저런 것들까지 전부 다 구해다 놨으니까.
아무튼, 그런 내 물음에 릴리스가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돈.”
짧막한 대답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렇구나아...”
“농담이야, 그걸 믿으면 어떡해?”
“아니, 릴리스가 돈이라고 하니까 정말로 그럴듯해서.”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면, 돈이 부족한 게 아닐까 생각하란 말은 이 세상에서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좀 많이 비싸지만 영약이 동네 마트에서 나뒹구는 세상이었으니까.
최하급에 불과하고, 급이 더 높아지면 값이 비싸지지만 이 역시 나도 다녀온 적이 있는 경매장에 가면 구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근데 거기에 빽도 있다?
그럼, 세상 살기 존나 편한 건 이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아무튼, 돈도 많고 빽도... 그 본인이 권력 그 자체의 화신이기도 한 릴리스가 하는 말이니까 존나 바로 납득할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내 아내 중에서도, 권력이랑 아예 거리를 두고 은거한 호아란과 마도구 어쩌고 하는 기관에 소속되긴 했지만, 사실 그냥 소속만 되어 있을 뿐인 유스티티아랑 달리 릴리스는 유일하게 세계 정부에 여전히 끈이 닿아있고, 당장 스물둘 의원 중 하나로 있는 서큐버스도 있었으니까.
가장 권력에, 정치에 가까이하고 있고 동시에 거기에 익숙한 릴리스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알았지.
“...정말, 무슨 농담도 못하네. 진짜.”
그런 내 시선에 날 뭘로 보는 거냐고 투덜거리던 릴리스가 말했다.
“...걔는 일단 요주의 관리 대상이었으니까. 예전에 알아본 적이 있었거든. 그래서 그런 거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
릴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에일레야가 전에는 릴리스도 잘 알고 있던 유명한 디스펜서 죽돌이긴 했다.
나랑 만난 이후로는 내 전용 보지가 되긴 했지만, 그전에는 사고를 몇 번 친 적도 있기도 했던 모양이고.
사티 때처럼 릴리스에게 직접 ‘제재’를 받은 적은 없었는지 머리색이랑 이것저것 조금 바꾼 릴리스를 못 알아보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전부 조사해놨던 걸 보면 언제 날 잡아서 개잡... 아니, 다소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던 듯싶긴 했다.
그러기 전에 내 전용 보지가 된 것은 에일레야에게 행운이었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이래서 에일레야가 그렇게 화낸 걸까.”
“뭐가?”
“아버지가 아내만 스물이니까 나한테도 빡칠만도 할 것 같아서.”
아무튼,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본부인인 에일레야의 엄마를 제외하고도 후처만 열아홉을 더 들인 에일레야네 애비에 대한 거였다.
마흔이 거뜬히 넘는 은빛 늑대단의 일원들이 죄다 에일레야의 동생들인 이유는 덕분에 잘 알 수 있었다.
애미가 셋을 넘어서 애미가 스물이라면 에일레야의 애비가 씨없는 수박이 아닌 이상 동생들도 잔뜩일 수밖에 없긴 했다.
릴리아나처럼 한 번에 잔뜩 낳는 경우도 있으니까 아주 통용되는 이야기는 아니긴 한데.
에일레야 누나 애비의 아내들은 죄다 웨어울프인 모양이라 그런 경우는 또 아니었으니까, 평범하게 그냥 잔뜩 싸지른 것이었다.
“근데, 뭐 이렇게 잔뜩 결혼했대.”
“간단하지, 결혼 동맹이란 거야.”
“아아.”
혹시나 나랑 비슷한 케이스인가 싶었는데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뭐, 어쨌든. 고마워, 릴리스.”
“딱히, 그걸로 뭐가 도움이 될 것도 같진 않은데.”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낫지.”
에일레야 누나의 애비가 아내만 스물이나 되는데다가 뼛속까지 종족주의자인 꼰대라는 걸 안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일단 내가 가서 약혼이니 뭐니하는 걸 깽판쳐서 파토를 낸다치면 개난리가 날 거란 건 알 수 있었으니까.
늑대도 개과니까 말 그대로 진짜 개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할 거지만.
“그런데 한조야, 정말로 혼자서도 괜찮겠느냐?”
“이런 거까지 도움을 받으면 안 되니까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이걸로 바로 알릴 테니까.”
전처럼 일이 터지고 나서 구르지 않고, 뭔 일이 생길 것 같다 싶으면 곧바로 바디 체커를 박살내서라도 아내들에게 신호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에일레야 누나네 본가가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은 모양이고 그 정도의 거리면 아내들이라면 몇 초도 안 돼서 후딱 올 수 있는 거리니까 문제도 없었다.
어쨌든.
“그럼, 슬슬 가봐야겠는데...”
그런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르미나가 쭈웁, 하고 내 자지를 뱉어냈다.
“푸하~! 늦어질 거 같으면 미리 연락하거라!”
“응.”
카르미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진짜 잘하지. 아주, 대답은 진짜 잘해.”
옆에서 그런 내 대답에 구시렁거리는 릴리스가 보였지만,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그리고 카르미나의 입가에 붙어있는 자지털도 떼줬다.
시간이 없어서 급하게 빨았다고는 해도, 입가에 자지털과 정액을 묻히고 있는 건 전직 파라오가 하고 있을 꼴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꼴리긴 했지만.
입가에 자지털이 묻은 줄도 모르고, 내 자지를 빠느라 바쁜 카르미나가... 내 부탁대로, 오랜만에 나르메르 때의 옷차림으로 꼬리를 흔들어대는 걸 보는 건 진짜로 좋았다.
아무튼.
에일레야도 중요하긴 했지만, 아내들도 중요했다.
오늘치의 의무방어전이야 릴리스가 이것저것 구하는 동안 분신들을 잔뜩 써서 후딱 끝내놨지만 내일은 내일대로 내일의 의무방어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도 한창 성장기인 릴리스랑 내 정액이 없으면 말라버리는 유스티티아를 둘째치더라도, 나도 아내들을 상대하느라 지나치게 강해진 정력 덕분에 매일매일 의무방어전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인데 오래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내일 안에는 돌아올게.”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유스티티아가 열어준 공간 전이문을 건넜다.
“그나저나, 누님. 대체 형씨랑 뭐로 싸운 거요? 어제만 해도 같이 못 있어서 죽상이였으면서.”
“닥쳐, 이반. 제발.”
“에이, 썅. 드디어 누나가 좀 잘되나 했더니만.”
“내가 닥치랬지?”
구시렁거리는 이반의 뒤통수를 존나 세게 때리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걸로 된 거다.
애당초 맞지 않았던 인연이었던 거다.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노친네 상태가 어떤지는 뭐 들은 거 있어요, 누님?”
한참 뒤에, 다시 뒤통수를 벅벅 문지르면서 말한 이반의 말에 잠깐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글쎄... 어쩌면 아프다는 것도 그냥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
아마도, 거의 무조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 양반이 어디가 아플 위인은 아니었으니까.
“그럼?”
“그럼은 무슨 그럼이야? 우리 돌아가는 거, 그냥 아프다는 노친네 얼굴 좀 보려고 가는 거지 딴 이유는 없거든. 가봤는데 안 아프고 멀쩡하면 다시 돌아오는 거지.”
“그럼 됐고. 누님이 형씨한테 차였다고 해서 절망하더니 얼굴도 모르는 작자랑 결혼할 생각이 아니란 거만 알면 됐으니까.”
나도 매형 정도는 고를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이반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항상 한마디가 많은 새끼였다.
뭐...
대충 저것이 이반 녀석이 날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었지만, 때릴 수 밖에 없게 구는 놈이었다.
말만 좀 예쁘게 하면 맞지도 않고 얼마나 좋아.
“...어휴, 근데. 진짜 오랜만이라 그런지 영 쌀쌀하네.”
오랜만에 밟은 고향 땅.
그리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추위에 그렇게 말하는 이반과 함께 걸음을 옮겨서 집 근처까지 돌아왔을 때였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뭔가 엄청 어수선한 고향이었다.
좋은 말로도 번화한 곳이 아닌, 외진 땅인만큼 이렇게 소란스러운 일이 드문데... 어째선지 소란스러운 것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을 때 옆에 있던 이반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노친네 쓰러진 거 아냐?”
“뭐?”
“아니, 누나한테 편지로 노친네가 지 아프다고 했다며.”
설마...
그건 아마 아닐 거라는 생각과 함께, 혹시나 정말로 그렇다면 하는 생각이 일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너는 결국 여기로 돌아올 테니.’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뛰쳐나가겠다고 말한 나에게, 그렇게 말한 노친네가 떠올랐다.
네까짓 게 그런다고, 뭐가 바뀔 수 있냐는 듯이.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수백 년도 전에 진작 몰락해버린 과거의 영광에 매몰되어서, 심지어 그때 그 세상조차도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금에 와서도 제멋대로 굴던 아버지.
그래도 일단은 아버지긴 아버지였다.
제멋대로에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위인이었지만...
그렇다고 콱 죽어버리라고 바랄 만큼 원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딸로서 아버지의 점수를 주자면 꽝이었지만, 일족의 일원으로서 족장의 점수를 주자면 그럭저럭이었던 아버지였으니까.
애당초, 정말로 죽어버린 거라면 무척이나 곤란했다.
꼼짝도 못하게 족장 자리를 이어받아야할 테니까.
“가자, 이반.”
그렇게 말하고서 뛰쳐나가자, 얼마 안 있어서 수두룩하게 모여있는 일족의 일원들이 보였다.
설마...
정말로?
아버지가 죽은 건 아닐까하고 말했던 이반의 말에 혹시나 했었는데, 설마하니 정말이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꽈아앙!
“오오오! 또 이겼어!”
“하하, 그러길래 단련 좀 열심히 하시라니까! 요즘 뱃살이 나오더라니!”
“삼촌 다음은 나야!”
“이년이? 나중에 왔으면 뒤로 빠져! 다음은 나다!”
굉음과 함께 환호성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노친네가 가버린 건 아닌 모양인데.”
“...그러게.”
족장인 아버지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저들이 이렇게 환호성이 내지를 리가 없었으니까.
그럼 대체...?
그런 생각을 하며, 속도를 줄여서 좀 더 나아갔을 때.
“...어, 이거.”
킁, 킁하고 코를 울리던 이반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맡은 냄새에, 이반이 보인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이곳에 있어선 안 될 남자의 냄새가, 환호성이 들려오는 인파 속에서 나고 있었으니까.
왜?
아니, 그보다...
어떻게?
꼬리를 무는 의문과 함께 달려 나간 끝에 볼 수 있었던 것은 나가떨어진, 오랜만에 보는 삼촌 이고르와 땀을 뻘뻘 흘리며 어깨를 풀고 있는 한조였다.
“아, 누나. 이제 왔어요? 좀 늦었네요.”
“...너, 너 여기...”
대체 어떻게 여기에...?
아니, 정말로.
먼저 출발한 것도 우리 쪽이었는데, 정작 고향에 먼저 도착해있는 한조를 보고서 어안이 벙해졌을 나를 보며 한조가 말했다.
“그보다, 이 사람들한테 설명 좀 해주실래요? 저 정말로 누나 지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