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늑대 (18)
공간 전이문을 건너기 무섭게, 휙하고 내게 달려드는 것이 있었다.
“어서 오거라!”
폴짝, 뛰어서 안겨드는 카르미나를 반사적으로 붙잡자, 겨드랑이 사이로 붙잡혀서 대롱대롱 들린 카르미나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째서 막는 것이냐!”
“아니, 나도 모르게 그만.”
갑자기 튀어나오니까 그렇지.
뭐가 갑자기 내게 달려들면 붙잡거나 쳐내거나 하게 만들어버린 릴리스를 탓해줬으면 좋겠다.
“사과는 되었으니 어서 안게 해다오! 벌써 몇 시간이나 영웅을 보지 못했던 탓에 몸이 근질근질하노라!”
영웅 성분이 부족해서 쓰러지면 어쩔 것이냐, 하고 말하는 카르미나.
그게 대체 뭔진 모르겠지만, 두 팔을 활짝 벌리는 카르미나를 보니까 뭘 원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런 카르미나를 놓아주자, 다시 폴짝 뛰어서 나무에 매달린 매미마냥 찰싹하고 내게 달라붙은 카르미나가 가슴팍에 마구 얼굴을 부벼댔다.
아무튼, 카르미나가 그러는 와중에 나를 마중하러 나온 아내들도 보였다.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는 릴리스랑 쓴웃음을 지으면서 카르미나를 보고 있는 호아란, 카르미나에게 제발 체통을 지켜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꾹 참는 듯한 카루라에 부럽다는 듯이 카르미나랑 나를 번갈아 보면서 손을 꼬물거리고 있는 아리아드.
그 뒤로 나랑 눈이 마주치자, 꾸벅하고 고개를 숙이는 사티까지...
유스티티아 빼곤 다 나와 있었다.
나오지 않은 유스티티아에 대해 물으려고 했는데 그 전에 릴리스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직 자.”
“그래...”
딱히 언제 온다고는 얘기 안 했으니까 평소처럼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를 한 유스티티아가 방에서 나왔다.
“아, 한조... 지금 왔나 보네...”
문제가 있다면, 어젯밤에 봤던 유스티티아의 몸을 그대로 드러낸 채로... 그러니까 알몸인 상태로 방에서 나왔다는 거다.
보아하니까 그냥 어제 의무방어전을 마친 후에 그대로 계속 퍼질러 자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리고, 그런 내 등 뒤에서 에일레야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냄새는...?”
유스티티아에게서 나는... 정확히는 어젯밤에 유스티티아의 자궁에 가득 부어준 내 정액에서 나는 냄새를 맡았는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에일레야의 목소리에 급히 말했다.
“자, 에일레야 누나. 이제부터 같이 지낼 거니까 소개해줄게요.”
“어, 응? 소개라니... 굳이?”
이미 알고 지낸 지가 한 달이 넘었는데, 굳이 다시 소개해준다는 내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에일레야도 에일레야지만, 아직도 말하지 않았냐는 듯이 나를 보는 릴리스의 시선도 따가웠다.
하지만 곧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는 걸 보니 그러려니 넘어간 것 같았다.
아무튼, 릴리스는 넘어갔으니까 이젠 에일레야만 남았다.
“실은 누나한테 말하지 않은 게 몇 개 또 있어서요.”
그런 내 말에 눈썹을 꿈틀거리는 에일레야.
“...또? 넌 대체 비밀이 몇 개나 있는 거니?”
화가 났다기보단, 섭섭한 투로 말하는 에일레야를 보니까 좀 미안하긴 했다.
근데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으니까...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아무튼, 다시 소개해줄 테니까... 저기, 호아란? 유스티티아 데리고 가서 옷 좀 입혀주고 와주실래요?”
“잠시만 기다려보거라.”
그런 내 말에 그렇게 말한 호아란이 그새 꾸벅, 꾸벅하고 졸고 있는 유스티티아를 끌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카르미나가 영웅 성분인지 뭔지하는 정체 모를 것을 만족할 만큼 보충하고서, 뿌듯한 표정을 하고서 내게 떨어지고 호아란이 끌고 방으로 들어갔던 유스티티아도 잠에서 깨서, 멀쩡히 옷을 갈아입고 나오고서, 에일레야에게 모두를 소개시켜주기로 했다.
“우선... 릴리스부터.”
“릴리스라니?”
여기에 있지도 않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자 의아한 듯한 에일레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숨을 들이키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야, 조금 전까지 금발로 물들인 채로... 모습을 꾸미고 있던 릴리스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니까.
금발에서, 흑발로.
더욱이, 뿔과 꼬리... 그리고 날개까지 전부 드러낸 릴리스에, 에일레야가 덜덜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예전에 릴리스에게 붙잡혀왔던 사티를 보는 것 같았다.
사티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쓴웃음을 지으면서 에일레야를 보고 있었고.
아무튼, 에일레야의 입장에선 가장 많이 부딪히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시비도 많이 걸었던 릴 리가, 사실은 릴리스란 사실에 엄청나게 혼란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이내, 내 소매를 붙잡은 에일레야를 보자, 딱딱 이빨을 부딪히는 에일레야가 나를 보며 말했다.
“저, 저기... 한조? 리, 릴리... 릴리 언니가... 왜... 어...? 어째서... 응...? 어째서... 여, 여제... 어째서... 여제가...”
“뭐, 그렇게 됐어요.”
설명하려면 아주 복잡하니까 그러려니 넘어가 줬으면 좋겠다.
“...하아.”
그런 에일레야의 반응에 한숨을 내쉬는 릴리스를 보고는 움찔하는 에일레야.
“...그렇게 무서워하지 말지? 딱히 네가 한 걸로 뭐라 할 생각도 없으니까.”
아니, 릴리스.
그렇게 말하면...
“죄, 죄송...”
꼬리를 다리 사이로 말은 에일레야가 덜덜 떠는 모습을 보니까, 그렇게 릴리스가 무섭나 싶기도 했다.
근데, 에일레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다.
에일레야는 아직 한 번도 릴리스를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다는 모양이지만 릴리스는 본래 이종간지원센터의 총지부장 일도 하면서, 동시에 거하게 사고 친 손님들을 참교육하던 존재였다.
나도 자주 구경하고 다닌 ‘맘마통’에서도 릴리스의 존재는 동경 반 공포 반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고.
대충 거기서도 멀리서 보면 동경하는 스물둘의 영웅 중 하나지만, 가까이서 보게 되면 좆되는 그런 존재라고 보고 있다고 보면 됐다.
그야, 릴리스를 직접 보는 날이 온다면 그 날이 릴리스한테 좆되는 날이라고 보면 됐으니까.
근데, 그게 여태껏 자기가 시비를 걸던 사람의 정체라고 하니까 저럴 만도 할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내 소매를 붙들고 있는 에일레야를 보고서, 릴리스가 입을 열었다.
“...나, 그냥 잠깐 들어가 있을까?”
“아니, 됐어.”
그야 릴리스가 잠깐 자리를 비우면 에일레야가 진정하기야 하겠지만.
그래서야 전혀 나아지지가 않을 테니까.
이럴 때는...
충격에는, 충격으로 덮는 법이었다.
내가 호아란에게 눈짓하자, 으음하고 신음하던 호아란이 말했다.
“에일레야가 너무 놀란 모양인데, 조금 진정한 다음에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럼 어차피 또 놀랄 텐데요.”
“그것도 그렇긴 하겠구나.”
내 말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 호아란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릴리스랑 반대로, 금발을 흑발로 물들였던 호아란의 머리카락이 다시 원래 빛으로 돌아갔다.
하나 빼곤 전부 감추고 있던 꼬리들도... 본래의 모습대로, 아홉으로 늘어나고.
꽈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런 호아란의 변화에 내 소매를 아예 비틀어 짜내는 에일레야가 보였다.
지직, 지직하고 애꿎은 내 옷만 찢어지고 있는 와중에 호아란이 입을 벌린 에일레야에게 말했다.
“...이제껏 속여와서 미안하구나, 에일레야.”
“그, 그, 그...”
“좀 진정해요, 누나.”
아직 한 명 더 남았으니까.
“이 순서대로라면, 다음은 나네?”
비교적 얼굴이 많이 알려진 릴리스랑 호아란과 달리, 딱히 머리 색을 물들이거나 하지는 않았던 유스티티아가 재밌는 구경거리를 감상하고 있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서...
아주 간단하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뿔과 꼬리.
유스티티아가 리저드맨 같은 종족과는 전혀 다른 존재감을 가진, 사슴의 것을 닮은 푸른 뿔과 몸만큼이나 커다란 꼬리를 드러내자...
“아, 아니지...? 아닐 거야.”
갑자기 에일레야가 그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누나?”
“꿈... 꿈이야. 그치? 이거, 꿈이지? 리, 릴리 언니가 여, 여제... 릴리스고, 호아 언니가 천호 호아란이고... 그리고, 유스티 언니가... 드, 드래곤이라고...”
그냥 드래곤이 아닌데...
“나는 별로 안 알려진 모양이네?”
“유스티티아, 네가 모습을 드러내서 한 일은 그다지 많진 않잖느냐. 그나마 직접 나선 일도 대부분은 본신의 형태로 나섰지 이런 모습으로 나선 적은 없으니 에일레야가 모르는 것이 당연하느니라.”
“그것도 그렇겠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대화하는 호아란과 유스티티아를 보고서, 에일레야도 뭔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유, 스티... 유스티티아...”
이 세상에 손 꼽을만큼밖에 없는 드래곤이고, 천호 호아란과 알고 지내는 사이인 유스티티아란 이름의 존재.
“망아의 용...”
그렇게 중얼거리던 에일레야에, 키득거리며 유스티티아가 말했다.
“응, 맞아. 앞으로 잘 부탁해?”
그런 유스티티아의 말에 히끅, 하고 딸꾹질을 하기 시작한 에일레야가 아직 소개해주지 않은 나머지를 보는 것이 보였다.
의심과 의혹으로 가득한 에일레야의 눈빛에, 지금 에일레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연달아서 스물둘의 영웅 중 셋이 튀어나오니까 그럼 혹시,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마 에일레야의 머릿속에서 나머지 네 명이 스물둘의 영웅 중 누구일지 막 대조해보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걸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는지, 어깨를 으쓱인 카르미나가 말했다.
“음, 안심하거라! 여는 저 셋과는 다르니 말이다! 아, 그래도 여태껏 카르미라고 알고 있었겠지만, 사실은 카르미나라고 하노라! 이름만큼은 속였으니 미안하구나!”
“나, 나도 마찬가지다. 그... 캬루가 아니라 카루라라고 한다.”
“저, 저는... 그냥 사티... 그대로라서...”
카르미나랑 카루라, 그리고 사티가 선수를 쳐서 먼저 부정하자 비교적 안색이 돌아온 에일레야가 아리아드를 봤다.
그런 시선에 아리아드가 푸근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으으응, 나도 마찬가지니까아 안심해도 돼애. 나도 진짜 이름은 아리아가 아니라아, 아리아드지마안.”
아니...
아리아드도 까보면, 사실상 세계 정부가 세워진 원인이잖아.
전면에서 활동하진 않았으니까 전혀 알려지진 않았지만, 애당초 스물둘의 영웅들을 모은 자가 아리아드였다.
다 같이 좆되기 일보 직전이던 세상을 예지를 통해 보고서, 세상이 좆되지 않도록 좆되지 않게 막을 수 있는 존재들을 끌어모았던 것이 아리아드였으니.
그렇게 끌어 모아진 스물둘의 영웅들이 세운 것이 세계 정부였으니, 결과적으로 아리아드가 세계 정부를 세운 거나 마찬가지기도 했다.
근데...
울먹거리면서, 희망을 찾은 것마냥 그 넷을 보는 에일레야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에, 여전히 덜덜 떨면서 다른 셋...
특히 릴리스의 눈치를 보는 에일레야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말했다.
“뭐, 그렇게 됐으니까 모두랑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요, 누나.”
여기엔 없는 릴리아나는 나중에 따로 소개해주거나, 만나게 해줘야겠지.
릴리스랑 호아란, 유스티티아에 비하면 웨어허니비들의 여왕인 릴리아나는 비교적 선녀니까 그리 놀라지도 않을 거다.
그래도, 내 자식들만 이미 수백인 걸 알게 되면 좀 놀랄 것도 같긴 했지만.
그걸 포함해도 릴리아나가 선녀일 듯싶으니까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뭐 어쨌던.
“이제 모두 다 같은 가족이니까요.”
이제 모두 가족이니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