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신 (3)
호아란에게 조언을 받아서 대충 암무트의 기억을 통해서 봤던 여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새로 얻은 기술에 대한 감을 잡은 뒤에야 오늘의 수련은 이쯤 하기로 했다.
하려고 하면 더 할 수 있기야 하겠는데, 지금부터 쉬어두어야지 의무방어전에서 제대로 할 수 있을 테니까 이쯤 해두는 것이 맞았다.
귀찮고, 힘들고 한 것을 굳이 감수해가면서 매일 몇시간에 걸쳐서 수련하는 이유가 아내들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려고 그런 건데, 정작 그것 때문에 지쳐서 꽁냥거릴 수 없으면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오늘치 수련을 마치고서 그렇게 아내들에게 차례대로 무릎베개를 해주면서 오늘 순서 정하기는 뭘로 할지나, 릴리스랑 에일레야한테 뭘 어떻게 해야지 엉덩이로 자지를 조르게 할 수 있을지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티가 나를 찾았다.
대외적인 일들, 은빛갈기일족과 관련된 것들은 전부 에일레야에게 맡겼고 그 외의 것들...
대충 디스펜서쪽의 일로 나를 찾는 단골 손님들의 예약이나 한창 공사 중인 인부들의 관리 따위는 사티에게 맡겨놨었는데, 그런 사티가 벌써 찾아와서 살짝 의아해하며 쳐다봤다.
그러자, 내 시선을 받은 사티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치맛자락을 잡는 것이 보였다.
얼마 전에 완성한, 6974호에게 빌렸던 웨어허니비들의 시녀복보다도 훨씬 짧은 치마에, 내 취향이 잔뜩 든 가터벨트까지 달린 메이드복을 입은 사티가 그러니까 좀 많이 꼴렸다.
“...너 이 새끼.”
“미안.”
덕분에 한창 자기 차례로 무릎베개를 받고 있던 릴리스가 째릿하고 나를 노려봤다.
“진짜, 이 개 변태 새끼...”
갑자기 기운이 들어간 내 자지에 불편해졌는지 투덜거리면서 자세를 바꾸는 릴리스를 보고는 사티를 다시 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혹시 하고 싶어진 거라면 좀만 참아, 이제 곧 있으면 할 시간이니까.”
오늘 의무방어전까지 이제 몇 시간도 남지 않은지라 그렇게 말했는데 더욱 얼굴을 붉게 물들인 사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아니라니 그건 그거대로 아쉬워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는데 사티가 말했다.
“그, 주인님께 손님이 찾아왔어요.”
“손님이라니?”
날 찾아올만한 손님이란 게 있었나?
내가 말하는 것도 좀 우습긴 하지만, 내 인간관계는 대부분 2년 전에 이 세상으로 넘어온 이후로 파탄났다.
애초에 이전 세상에서부터 고아였고, 그나마 인연이라고 할 만한 같은 고아원 출신의 동생들도 그때 연락이 죄다 끊겨버렸으니.
그 이후에도 살기 바빠서 사람을 만나고 다닌 적도 없었다.
그나마 생긴 인연이라고는 릴리스를 만나고 나서, 이후에 생긴 인연들 뿐인데...
“아, 혹시 카르미나가 부른 사람들이야?”
얼마 전에 세계 정부에서 주관해주기로 약속했던 결혼 활동에서도 잘 풀리지 않고, 갑작스레 바뀐 세상에서도 적응하지 못한 나르메르 왕국 사람들이 카르미나에게 편지로 도움을 청한 적이 있긴 했었다.
그래서 카르미나가 내게 그 일부 나르메르 왕국 사람들을 받아줄 순 없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마침 은빛 갈기 일족도 받아버린 이상, 여기서 몇 명 더 늘어나는 거야 티도 안 나는지라 허락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나르메르 왕국 출신의 사람들과 편지로 연락을 나누면서 일희일비하는 카르미나가 이번 일로 괜히 우울해하는 것도 보기 싫었고, 어차피 땅이야 아직도 많고 지금도 계속 뻗어나가는 세계수의 뿌리와 함께 넓어지는 중이었다.
여기에 나중에는 릴리아나의 꿀벌 왕국도 올 예정이니까 뭐...
솔직히 처치 곤란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는 땅이라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서 흔쾌히 허락한 셈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그 사람들이 온 건가 싶었는데.
흘끗, 내 말에 혹시나 싶었는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꼬리를 흔들고 있던 카르미나를 본 사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쪽 분들은 아닌 것 같았어요.”
사티의 말에 추욱, 귀가 처지는 카르미나.
그런 카르미나에게 손짓해서 옆에 앉히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다시 붕붕 꼬리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기분이 풀린 모양이라 다행이었다.
아무튼 그쪽 일도 아니면 진짜로 날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혹시 누구인지는 들었어?”
“천매화라는 분이신데요...”
누군데 그게?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천매화라고?”
근데, 내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릴리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직후에 릴리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서 릴리스의 뿔이 내 턱을 찌를 뻔했지만, 그 전에 피했다.
아무튼, 릴리스의 반응을 보고서 혹시 릴리스의 지인이라도 온 건가 싶어서 물었다.
“혹시 릴리스가 아는 사람이야?”
“몰라. 그래도... ‘천’이란 성을 쓰는 애들은 알고 있으니까.”
천씨를 쓰는 애들...
“천마의 제자들?”
나한테 두들겨 맞았던 천 머시기 하는 놈팽이도 분명 천씨를 쓰는 놈이긴 했었지.
혹시나 걔 이름이 매화라는 이름이었던가 싶었지만, 기억은 안 나지만 그런 예쁜 이름이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천마의 다른 제자인 모양이었다.
듣기로는 천마에게 있는 제자만 수천 명이고 그 중에서도 수제자라고 알려진... ‘천’이란 성씨를 받은 제자가 열 명이 안 된다는 모양이었으니까.
그나저나 그 새끼, 스물둘의 영웅 중 하나인 천마의 제자치곤 많이 약했었지.
당시엔 아티펙트빨로 찍어 누르다시피 했지, 맨몸이었으면 비슷비슷하긴 했지만 생각해보니 겨우 그 정도로 어떻게 수천명 중 열 명도 안 되는 천마의 수제자가 됐던 건지 싶었다.
뭐, 나랑 걔가 천마에게 재롱을 부려서 수제자가 됐던 다른 쪽의 재능이 있어서 제자가 됐건 나랑 아무래도 좋은 일이긴 했지만.
그보다 그 천마의 제자가 왜 나를 찾아왔냐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사티. 걔는 여길 왜 왔다는데?”
“그, 주인님을 뵙고 싶다고 찾아왔다는 것 밖에는 듣지 못해서...”
나를 왜?
내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누굴 보고 싶다고 했다고? 지가 왜?”
갑자기 기분이 팍 나빠진 것 같은 릴리스라 살짝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그런 나를 째릿하고 흘겨보는 릴리스.
“...왜 떨어져? 혹시 뭐 찔리는 거 있어?”
“아니, 찔리는 거라니. 그런 거 전혀 없어. 그냥 좀...”
“그냥 좀, 뭐?”
“다리가 좀 저려서.”
내가 슬쩍 옆으로 몸을 떨어뜨리자 더욱 기분이 나빠진 듯한 릴리스를 보고서 열심히 다리에 난 쥐를 푸는 척하고서 도로 찰싹 붙자, 그런 나를 보고 흥, 하고 코웃음을 치는 릴리스가 보였다.
그래도 조금 기분이 풀렸나 보다.
내가 떨어졌던 것이 아직 불만이 남았는지, 꼬리로 내 허리를 감아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긴 했지만, 옆구리를 꼬리로 찔리는 것보단 나았다.
“...그래서, 그 천매화인지 뭔지는 어디에 있는데?”
“일단 에일레야씨가 접객 중이긴 한데... 어쩌면 좋을까요?”
“어쩌고 자시고, 나를 찾아왔다니까 일단 보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
가서 왜 나를 찾냐고 물어보면 그만이잖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하아하고 한숨을 내쉰 릴리스가 말했다.
“이 멍청아, 무슨 이유로 찾아온 건지도 모르는데 대뜸 만나서 어쩌게?”
“어... 그럼?”
“우선 용건이 뭔지부터 알아야지, 사티. 가서 에일레야한테 최대한 시간 좀 끌어보라고 전해줘.”
“아, 넷...!”
릴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선 에일레야에게 말을 전하러 간 사티를 보다가 말했다.
“그냥 왜 왔는지 직접 묻는 게 빠르지 않나...”
내 말에 살짝 얼굴을 찌푸린 릴리스가 말했다.
“순순히 말해준다면 그렇지. 절대로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러니 최소한... 어디까지 알고서 찾아온 건지 알아봐야지. 그보다, 내가 저번에 알려주지 않았어?”
대충 저번에 남궁무휼에게 낚였던 일로 릴리스에게 뭐 이것저것 배웠던 걸 말하는 것 같았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때 릴리스한테 배운 건 대부분 까먹긴 했다.
수사학의 기본이니 뭐니 하는 걸 내가 왜 알아둬야 하는가 싶기도 하고, 솔직히 그때 릴리스가 뭐라고 한 건지 하나도 이해가 안 돼서, 그냥 한 귀로 들어가서 다른 뒤로 도로 빠져나왔다고 해야 하나.
”너 이 새끼 진짜...“
그런 나를 보고 릴리스가 더욱 인상을 찡그리는 것이 보여서 찔끔하고 있을 때, 카르미나가 말했다.
“천마라함은 이 세상에 단 스물둘뿐인 영웅이란 자 중 하나이지 않느냐? 한때 번성했던 여의 세상의 모든 왕국의 왕을 통틀으면 백을 훌쩍 넘기는 숫자이니, 이보다 더 귀한 자의 제자인 자가 구태여 영웅을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란 뜻이노라. 단순히 교분을 나누고자함이라면 마땅히 즐거이 허락하는 것이 좋을지라도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법이니 이를 알아둘 수 있을 만큼은 알아두는 것이 좋노라.”
“아, 그러니까 날 찾아올 이유도 없는 사람이 온 이유가 있을 거란 거지? 다단계나 해서 등쳐먹으려는 새끼들처럼?”
“다단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등 처먹... 아니,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는 것은 맞겠구나.”
종종 망각하고는 했지만, 일국의 파라오이기도 했던...
시대가 시대였던 터라 통치자보다는 전사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정치력은 나랑 비교하기도 미안한 카르미나도 그렇게 말하니까 둘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근데, 왜 그래야 하는진 알겠는데, 뭘 어떻게 알아봐?”
그런 내 말에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쉰 릴리스가 말했다.
“진짜... 아직 내 차례가 끝나려면 10분은 남았었는데... 이거, 나중에 제대로 벌충해둬야 한다?”
하필이면 자기 차례에 일이 터지니까 더 짜증이 난 것 같았던 릴리스가 그렇게 말하고서 공간 전이문을 열고 훌쩍 어디로 가버렸다.
아마 릴리스 나름대로 천매화인지 뭔지하는 사람이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기 위해서 이런저런 정보를 모으러 간 모양이었다.
그걸 사티랑 에일레야가 시간을 끄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인가 싶었지만, 릴리스니까 냅두기로 했다.
하루도 안 돼서 보리스의 신상을 죄다 털어왔던 릴리스니까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그래서, 그 천마란 사람이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릴리스가 저러는지나 좀 말해줘요.”
그 대신에 나는 나대로 정보나 얻기로 했다.
천매화란 인간은 누군진 몰라도, 적어도 그 스승인 천마에 대해선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중 한 사람인 유스티티아는 한참 낮잠 타임 중이라, 결국 남은 건 호아란과 아리아드뿐이긴 했지만.
둘이나 있으니 뭐든 나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호아란과 아리아드를 보자, 곰곰이 생각하던 아리아드가 먼저 말했다.
“으응, 작고 귀여운 아이야아. 무지막지하게 기운이 넘쳐서어, 다들 조금 곤란해하긴 했었지마안. 그래도 착한 애였지이?”
응, 취소.
아리아드의 설명은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은 호아란을 보자 쓴웃음을 지은 호아란이 말했다.
“우선... 세간에서 알려진 것과는 큰 차이가 없느니라. 천생이 무를 갈고 닦기를 좋아하는 무인이니라. 무공에 한한다면 그녀만큼 뛰어난 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니라.”
내가 아는 거랑 별 차이가 없네.
내가 아는 스물둘의 영웅, 천마라는 사람은 흔히들 무림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정점이었다.
무공을 익히고, 내공을 다루는 자.
수많은 세상이 합쳐졌고, 당연히 무림인도 존나게 많은 세상이었다.
그들의 정점이란 소리는, 존나게 강하다는 소리이기도 하고.
그거 말고는... 스물둘의 영웅 중에서 유일한 인간 여성인 존재라는 것 정도?
무공이란 게 굳이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는데 인간, 그것도 여자인 몸으로 그 정점에 있던 탓에 인간 종족에게 있어선 상당히 인기가 많은 영웅 중 하나였다.
인간 중에서 무공쪽을 파려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천마인 모양이고.
아무튼, 그것뿐인가 싶어서 호아란을 봤더니 그런 내 시선에 잠깐 망설이던 호아란이 말했다.
“그리고...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천마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인 것이겠구나.”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요?”
고개를 끄덕인 호아란이 말했다.
“천마는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이 아니게 된 존재... 기신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