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종족 전용 남창이 되었다 (354)화 (354/523)

기신 (5)

호아란에게 천마에 대한 걸 듣느라고 몇 분이 지났을 무렵, 쩌억하고 다시 열린 공간 전이문을 통해 넘어온 릴리스가 표정을 찌푸린 채로 나를 노려봤다.

표정이 딱 내가 사고치고 난 다음에 날 보는 릴리스여서 괜히 어깨를 움츠리자 그런 나를 보며 한숨을 내뱉는 릴리스가 보였다.

뭔데.

좀 알려주고 한숨을 내뱉든 말든 해줬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더 무섭잖아.

“그래서, 알아보니 어떠하더냐?”

분위기상 내가 먼저 물어봤다가 한소릴 들을 것 같아서 합죽이 중이었는데 그런 나 대신에 릴리스에게 물어본 호아란의 말에 다시 나를 째릿하고 노려봤던 릴리스가 말했다.

“아마 한조가 네 제자인 건 이미 알고 왔을 가능성이 커. 뭐, 이건 저 녀석이 네 제자인 걸로 기정사실처럼 여겨진 걸 이용한 탓이긴 하지만... 어쨌든간에, 우리로서는 좋지 않은 소식이네.”

내가 천마의 장바구니에 떡하니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늘어나 버렸다.

이렇게 부담스러운 지명은 또 처음인데.

지명을 안 받아주면 죽니마니 하던 단골보다 더 부담스러웠다.

아무튼, 한 1년 전이었더라면 몰라도 지금은 별로 좋아할 수 없는 관심이었다.

그때는 몰라도 지금은 절찬 품절난 상태인데, 어째 품절나고나니까 점점 더 날 찾는 사람이 많아지는 기분이었다.

뭐, 이해는 했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일주일에 한 두 번, 그마저도 몇 명 안 받고 있으려니까 내 몸값이 천장을 뚫었고, 개중에는 따로 돈을 더 줄테니까 해달라고 연락을 취하려 드는 단골 손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횟수 자체는 전보다 훨씬 줄었는데, 벌이로만 따지자면 아직도 이 동네 최고 디스펜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이고.

딱히 어디가서 자랑할만한 거리는 아니긴 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어쨌거나, 밀린 지명 순번을 조금 고쳐주면 좋아라하는 단골 손님들과 달리 천마가 그런 이유로 날 찾는 것도 아니니까 더 난감한 지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릴리스가 나를 흘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리고... 너.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내가 뭔 짓을 하다니? 뭐가?”

내 대답에 확 얼굴을 일그러뜨린 릴리스가 던진 것을 받아쥐자, 이내 눈앞에 환영이 떠올랐다.

내가 보리스를 보리스 꼬치로 만드는 환영이었다.

“어...”

이게 여기서 왜 나와?

난데없이 등판한 보리스 꼬치를 보고서 벙쪄있자 릴리스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분명 우리한텐 별로 안 다쳤었다고 하지 않았어?”

릴리스가 걸고넘어진 건, 내가 모두가 걱정할까 봐 대충 무난하게 보리스랑 결투 끝에 이겼다고 말했던 거랑 달리 미처 재생되질 않아서 너덜너덜해진 몸은 둘째치고, 이미 몇 번이나 그만한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듯 죄다 찢기고 피칠한 내 몸이었다.

미리 에일레야한테도 입을 맞춰놔서 잘 속여넘겼다고 생각했던 건데, 이게 이렇게 걸릴 줄은 몰랐다.

“뭐라도 말해보시지 그래?”

릴리스가 많이 빡친 모양이었지만, 문제는 릴리스만 빡친 게 아니라는 거였다.

릴리스랑 마찬가지로 내 말을 굳게 믿었던 다른 아내들도 사실을 알게 되고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봐서 식은땀이 등 뒤로 흘러내렸다.

좀처럼 화내지 않는 호아란이나, 조금 전까지도 막 자다 깨서 졸려 보이던 유스티티아도 똘망해진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데, 둘 다 평소랑 달리 많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호아란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고, 유스티티아는 눈동자가 십자 모양으로 갈라질락 말락 하는 게 빡친 게 분명했다.

좀처럼 멈춰있거나 하질 않는 카르미나의 꼬리도 요지부동중이고, 카루라의 말없이 응시하는 시선이 무척이나 아팠다.

그나마 아리아드만 많이 아팠겠네에, 하고 태평하게 말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아리아드만 그렇고 과반수가 이번 일로 화가 나있는 건 확실했다.

“어, 음... 그게...”

천마한테 좆되기 전에 마누라들에게 좆될 것 같아서 일단 무릎부터 꿇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변명하기보단 사과부터 박았다.

원래 이런 건 잘 넘어갔으면 몰라도 들켰으면 딴소리하지 말고 사과부터 하는 것이 제일이었다.

고개를 숙인 내 정수리에 꽂히는 아내들의 시선이 너무 서늘해서 쫄렸다.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고 가만히 쳐다보기만해서 더더욱.

한참을, 고개 숙인 나를 보던 릴리스가 말했다.

“...됐어, 이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이번에 천매화인지 뭔지하는 애가 온 이유부터 말해줄게.”

나중에 얼마나 잔소리를 할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 건은 일단 뒤로 넘겨버린 릴리스가 작게 한숨을 내뱉곤 말했다.

“명목상으론, 한조 네가 저번에 유스티티아랑 같이 사고 쳤던 거에 대한 포상이야.”

“포상이라니?”

포상이란 말에 고개를 든 내가 묻자, 그런 나를 보고서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 걸 꾹 참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충 알아보니까, 훈장이랑 세금 감면... 뭐 이런저런 거를 주기로 한 모양이더라.”

전에 받았던 용감한 시민상이랑 영웅이란 칭호 말고 또 뭘 더 받게 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세금 감면이라면 대체 얼마나 감면되는 거지.

영웅 칭호를 받았을 때도 세금 혜택이 있었는데 중복이 되는 건지 아니면 하나만 적용되는 건지도 궁금하다.

적용 시점도 궁금하고.

그 촉수 괴물을 잡은 시점부터면, 이번에 저택을 짓느라 지른 돈도 어느 정도 돌려받을 수 있으려나.

이번에 지른 돈이 한두푼이 아니라서 꽤 중요한 사항인데.

사티랑 에일레야의 메이드복은 현찰로 박은 거라서 소용없을 거고...

그때 내가 딴생각을 하고 있는 걸 귀신 같이 눈치챈 릴리스가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집중 안 해?”

“죄송합니다.”

다시 집중했다.

“어쨌든... 내가 들고 온 것도... 아마 천마, 그년한테도 가있을 테니까 이제와서 뭘 하기엔 많이 늦었을 거야.”

보리스를 꼬챙이로 만들 때, 강기고 뭐고 다 썼으니까 이미 내 대부분이 까발려진 셈이었다.

듣자하니 딱히 내가 기프트 소유자일 거라는 의견보다는 호아란이 날 위해 새로 만든 주술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대다수인 모양이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건 죄다 알려진 셈이었다.

그나마 아티펙트들은 안 썼으니까, 유스티티아나 애당초 환영만으론 알아보기 힘든 레벨 드레인따위까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릴리스가 알아온 것이나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서 결론만 말하자면서, 천매화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대놓고 내 스승으로 알려진 호아란에게 날 픽업하러갈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해둔 셈이나 마찬가지인 거였다.

굳이 세계 정부를 통해서 제자를 보낸 이유는 아무리 착한 호아란이라도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면 물러나지 않을 거란 걸 알아서일 테고.

“...아니, 진짜.”

근데 생각해보니까 호아란도 나도 어느 쪽이든 신경 쓰지 않고 지 꼴리는 대로만 강짜를 부리는 꼴이라서 좀 빡쳤다.

천마야 겸사겸사 장바구니에 담은 나도 픽업해가면서 호아란이랑 한판 붙을 생각인 모양인데.

그건 어디까지나 천마 입장이고 당하는 나나 호아란은 솔직히 기분 나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랑 호아란만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입장이긴 했지만.

천마야 몰랐다지만, 결과적으로 내 아내 모두에게 시비를 건 셈이니 말이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뭘 하려고?”

“아니, 어차피 천마가 여기 오는 건 기정사실이라며? 어차피 피할 수도 없으니까... 받은만큼은 갚아줘야지.”

먼저 잔뜩 시비를 걸어왔으니까, 적어도 그만큼은 똑같이 돌려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갚아주다니...?”

“이 새끼 또 이상한 짓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아직 뭘 한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걱정하는 호아란이나 미심쩍어하는 릴리스를 보니까 조금 마음이 아팠지만, 일단 내가 생각한 걸 말해줬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란 말이 여기서 붙긴 좀 그렇지만.

어차피 맞닥뜨릴 일이라면 그 전에 이미 당한 만큼은 돌려주자는 내용이었다.

호아란... 천마야 몰랐다지만, 따지고보면 내 아내 모두의 신경을 건드린 만큼 되갚아주자는 취지라고 해야 하나.

“으으음...”

“...생각보다 멀쩡한 계획이네, 좀 많이 쪼잔하긴 해도.”

“상대가 본인인 것도 아니잖아.”

시비 건 장본인인 천마면 몰라도, 그냥 천마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 제자를 상대로 너무 그러는 건 좀 그랬다.

그러니, 어쨌거나 제자를 통해 이쪽에 대한 걸 전해 들을 천마만 기분이 좀 나쁘도록 살살 긁어줘야지.

“아무튼, 어때?”

내가 그렇게 묻자 서로를 쳐다보던 아내들이, 주로 천마를 직접 봐서 알고 있는 릴리스랑 호아란, 유스티티아가 고민하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얼마 지났을까.

고개를 끄덕인 호아란이 입을 열었다.

“한 번 해보자꾸나.”

호아란이라면 조금 더 고민하거나, 아무리 화가 나도 안된다며 말릴 거라 생각했는데 흔쾌히 허가를 내려주는 걸 보니 확실히 이번 건 아무리 호아란이라도 많이 기분이 나쁘긴 했나 보다.

내가 생각하기엔 제일 고민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호아란이 이렇게 나오자 나머진 쉬웠다.

쪼잔하다고 해놓고서 더 쪼잔한 방식을 잔뜩 말하기 시작한 릴리스나 이쪽이 더 재밌을 것 같다면서 의견을 내놓는 유스티티아, 사람 속을 긁으려면 이러는 것이 더 좋을 거라며 살을 더 덧대는 카르미나까지.

순식간에 살에 살이 덧붙여가면서 계획이 짜여버렸다.

결과적으로, 맨 처음에 내가 말했던 것은 새 발의 피나 다름없는, 내가 천마라면 혈압이 잔뜩 오를 것 같은 악랄한 계획이 완성되어버렸다.

적어도 이걸 당하는게 나였다면 주화입마가 왔을 것 같았다.

“...이래도 되나?”

“누가 먼저 시작하자고 한 건데?”

그야 내가 하자고는 했지만.

뭐, 됐다.

당하는 건 천마지 내가 아니었으니까 아무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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